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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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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다.

뉴스의 시대-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알랭 드 보통, 2014. 7.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도 아니지만, 뉴스의 중심에 있는 셀리브리티는 더 이상 우리 삶과 무관한 외부자가 아니다. 나의 주변에서 일상을 주고받는 지인처럼, 때론 지인보다 더한 심정적 근접 지점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가 되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real'이 된다. 하루에도 무수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뉴스에 세팅된 아젠다만이 실제가 될 수 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방송을 들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게 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쟁점을 분석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 시선의 프레임을 형성한지 십 수 년이다. MBC 시선집중을 13년 듣는 동안, 그는 몇 번의 휴가도 떠나지 않았던 ‘성실한’ 앵커였다. 그가 며칠 휴가를 떠났을 때 방송을 들으며 느꼈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라니. 나의 삶과 무관한 ‘샐리브리티’인 그의 부재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다. 그가 종편을 선택했던 시기는 공중파 3사의 문제점이 정점을 찍을 즈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가 나오든 혹시 실수로라도 종편 채널이 열리면 화들짝 놀라며 다른 채널로 zapping하던 나는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듯 슬그머니 JTBC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자본이 빚어낸 종편에 승선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수치심을 감내해야 했을 만큼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혹 손석희씨가 ‘시선집중’을 떠나면서 말했듯, 그의 선택은 ‘훗날’ 평가될 것인지도 모르겠다. JTBC 만큼 세월 호 보도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종편과 언론 매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직업 특성 상 나는 뉴스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치다. 만일 ‘뉴스’를 알지 않아도 되는 업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뉴스를 멀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스마트 월드의 스마트 기기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뉴스를 수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십 년 전만 해도 한 달 내외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때 접하던 신문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모국어로 쓰인, 내 나라의 기사를 읽다 보면, 그제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보통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느새 나에게 ‘뉴스’가 종교 자리를 차지한 것일까? 아침과 저녁 기도가 이루어질 시간, 나는 뉴스를 읽는다.

 

 

영국 사람은 외출할 때 세 가지를 챙겨가지고 나간다고 한다. 아파트 키, 지갑, 책 한권. 그렇게 간단한 소지품을 가지고 노팅힐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칠 것 같은 잉글리쉬맨이 알랭 드 보통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수학(修學)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모두 유럽인일 뿐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적 분류에 어려움이 있는 아시안이기 때문에.) 나도 주 이상을 보통의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디를 펼쳐도 첫 페이지가 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통은 자신과 뉴스와 마주치는 순간(17쪽)을 모았다. 소소한 사적 경험에 따른 단상이 모여서 한권의 책을 이루고, 하나의 철학을 완성한다. 일상에 대한 성찰이 이룩한 산물, 그것인 보통의 책이다. 뉴스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뉴스는 독자에 의해서 다시 한번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다.

 

 

뉴스는 ‘정상성’을 가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를 강조한다. 뉴스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정상성 좌우에 있는 비정상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과 이질적인 것일수록 메인 뉴스가 될 수 있다. 정상성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듯, 객관적인 보도 또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편향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보통의 주장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은 없다.”는 은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뉴스는 두려움과 공포를 양산한다. 재난, 질병,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관한 보도는 나의 미래를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 버린다. 끔직하고 잔인할수록 뉴스의 가치는 높아진다. 강력 범죄에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보도는 더욱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잔혹한 범죄가 이루어진 과정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것을 보면, 뉴스가 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보통이 예견한대로 대중의 수만큼 다양한 뉴스 채널의 세계(278쪽)를 기대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자신의 취향이 고려된 맞춤형 방송이 세팅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나 또한 손석희의 방송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김어준의 파파이스, 뉴스타파 등의 팟캐스트를 통해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제공받고 있다. 종편 JTBC는 이번 주부터 ‘뉴스룸’으로 개편하면서 8시부터 9시30분까지 30분 연장 방송을 시작했다. 하루에 1시간 30분 동안 보도할 뉴스거리가 있을지에 대한 염려는 첫 방송에서 해결되었다. 뉴스라고 하기엔 깊이 있는 정보 분석까지 곁들여졌다. 다만 보통의 말대로 각자가 필요한 뉴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격을 ‘대중’ 이 갖출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든다. 지난 수년 동안 나타난 언론의 행태와 대중의 정치적 선택을 보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중의 진화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의 수명은 짧다. 많은 사람들은 매번 새로운 뉴스를 원한다. 세월호를 지겨워하는 사람들의 증가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월호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었고,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뉴스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방문 내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며 세월호를 현재의 시점으로 호명한 프란체스코 교황께 감사할 뿐이다. 제도화된 기억상실증(288쪽)은 우리에게 도덕 불감증을 가져다준다. 보통의 주장처럼 뉴스 의존증에서 벗어나서,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어 있는 타자와 실제 연결망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독창적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자신의 윤리와 가치 속에서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일상에 관한 단상이 모이면, 우리 역시 각자가 추구하는 각자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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