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에 북을 주자
자기 전에 읽는 책에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도 포함시켜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조금 전에 잠깐 박지원 글을 읽다가 빨려들듯이 그의 글들(228-291쪽)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고 내처 초록 작성까지 마쳤다.
박지원 선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핵심적인 조언을 들은 기분이다. 아래에 몇 줄 옮겨 본다.
글이란 것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놓고 붓을 잡은 다음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고전의 사연을 찾으려 뜻을 근엄하게 꾸미고 글자마다 장중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화가를 불러서 초상을 그릴 적에 용모를 고치고 나서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구르지 않고 옷은 주름살이 잡히지 않아서 보통 때의 모습과 달라지고 보니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진실한 모습을 그려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인들 또한 무엇이 다르랴?
말은 큰 것만 해서 맛이 아니다. 한 푼, 한 리釐, 한 호毫만 한 일도 다 말할 수 있다. 기왓장이나 조약돌이라고 해서 내버릴 것이 무엇이냐? 그렇기 때문에 초나라의 역사는 도올이란 모진 짐승의 이름을 빌려서 썼고, 사마천이나 반고와 같은 역사가도 사람을 죽이고 무덤을 파헤치는 흉악한 도적놈들의 사적을 서술하였다. 글을 짓는 데는 오직 진실해야 할 뿐이다. (243)
- 공작관문고 머리말, 《연암집》
비록 조금난 재주라도 모든 것을 잊고 덤벼야 성공할 수 있다. 더구나 도처럼 큰 것에서랴.
최흥효는 나라에서 이름난 명필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서 글을 쓰다가 그중 한 글자가 신묘함을 얻자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 글을 바치지 못하고 품에 품은 채 돌아왔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일쯤은 이롭고 해로움을 전연 마음속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징이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그를 찾아 사흘 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아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볼기를 쳤더니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지고 새를 그리고 있었다.
학산수는 나라에 이름난 명창이다. 산속에 들어가서 노래 공부를 할 적에 한 곡조를 부르고는 나막신 속에 모래 한 알씩을 던져서 그 나막신이 모래로 가득 찬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도적을 만나서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들도 모두 심회가 울적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죽음과 삶을 마음속에 두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264-265)
- 형언도필첩에 부쳐, 《연암집》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전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글자는 말하자면 군사요, 사상-감정[意]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요, 옛일이나 옛이야기는 전장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로 만들고 구를 합해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과 같으며, 성운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로 빛을 내는 것은 북, 종, 깃발 같은 것이다.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에 해당하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 부대에 해당하고, 억양 반복이라는 것은 백병전과 육박전에 해당하고, 제목을 끌어내고 결속을 짓는다는 것은 적진에 먼저 뛰어들어 적을 생포하는 데 해당하고, 함축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은 적의 늙고 쇠한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데 해당하고, 여운이 있게 한다는 것은 기세를 떨쳐 개선하는 데 해당한다.
대체 장평 땅의 군사가 날래고 비겁한 것이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아니요, 활이나 창도 날카롭고 무딘 것이 전날보다 변한 것이 아니건만, 염파가 거느리고 나서서는 승전하다가 조괄로 바뀌고서는 몰사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떼내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는 쓰지 못할 글자가 없다. 만약에 적당한 장수만 얻는다면 호미, 곰방메 따위 농기구 빈 자루만 가지고도 무서운 무기로 쓸 수 있고, 옷자락을 찢어서 작대기 끝에 달아도 훌륭한 깃발로 된다. 또 만약에 일정한 이치에만 들어맞는다면 식구끼리 나누는 이야기도 학교의 한 과정으로 넣을 수 있고, 아이들 노래와 속담도 고전 문헌과 대등하게 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 글자의 탓은 아니다.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용감치 못한 장수가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적의 굳은 성벽에 부닥친 것이나 마찬가지로 글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글 제목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산 위의 풀과 나무까지 적병으로 보이는 바람에 붓과 먹이 다 결딴난다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것조차 이렇게 상하고 저렇게 패해서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군대가 한번 제 길을 잃어버리는 때에는 최후의 운명을 면치 못하며, 아무리 물샐틈없이 포위한 때라도 적이 도망칠 틈은 없지 않은 것과 같다. 한마디 말을 가지고도 요점만 꽉 잡으면 마치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쳐들어가는 것이요, 반쪽의 말을 가지고도 요지를 능히 표시하면 그것은 마치 적의 힘이 다할 때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그 진지를 함락시키는 것이다. 글 짓는 묘리는 바로 이것이 최상이다. (275-277)
-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연암집》
<호질>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연암의 문장은 폐부를 찌르는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혜안과 비유가 곳곳에서 나온다. 게다가 어떤 글은 왜 이렇게 비실비실 웃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언젠가는 <연암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똥구리는 둥그런 제 말똥덩이를 대견히 여겨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용도 또한 자기의 구슬로 말똥구리의 말똥덩이를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255) - 박지원, `낭환집에 부쳐`,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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