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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 우리 시대의 고전 23
어빙 고프먼 지음, 심보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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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이의 조건에 따라 어떤 책은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가 나에겐 그런 책이다. 군대, 수도원, 교도소와 정신병원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구조에 관한 시시콜콜한 분석과 서술을 읽는 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용이 무가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단락에서는 아니! 이런 기가 막힌 분석이, 라며 무릎을 치기도 했고, 마치 시체를 해부하고 병자를 수술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수용소의 직원과 재소자들의 상황을 풀어헤쳐 설명하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수용소의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었다.

군대에서 짱박히는 병사 얘기에 먼 옛날 두돈반 트럭 적재함에서 몰래 낮잠을 자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정도였을 뿐.  

 

<수용소>에서는 고프먼의 글쓰는 스타일이 핵심이며, 그게 결국 내용이다.

말하는 방법과 태도, 다루는 자료의 범위와 유형, 그리고 근거의 생경함과 의외성, 무엇보다도 몸으로 부딪치는 조사와 연구방식 등등. 그가 붙인 각주 하나를 보면 고프먼이 도대체 어떤 연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하나의 실험을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두번째로 좋은 의자는 방의 다른 쪽으로 옮겨져 있었고 나는 그 환자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의자에 미리 앉아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독서를 하는 척했다. 늘 그렇듯 같은 시간에 방에 도착한 그는 나를 오래, 그리고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같이 반응했다. 나에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상기시키는 데 실패한 그 환자는 방을 둘러보며 또 다른 좋은 의자를 찾았다. 의자를 발견하자 그는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 즉 내가 앉아 있던 의자 옆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그 환자는 정중하고, 적개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젊은이, 괜찮다면 나를 위해 저 의자로 옮겨 앉아줄 수 있겠나?" 나는 다른 의자로 이동했고 실험은 그렇게 끝났다. (286쪽 주 106)

내용과 거의 무관한 이 사회학자의 (연구) 형식을 읽어내는 것만이 이 어리둥절한 책에서 거둘 수 있었던 수확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말미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독서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나는 곧바로 서론부터 읽기 시작해서 다 읽은 지금까지도 내가 뭘 본거야, 내가 뭘 본거지? 하며 헤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맥락에 그야말로 꾸역꾸역 읽었다고 해야겠다.

어리둥절했다가, 기막힌 분석과 비유에 감탄도 하고, 무슨 말인지 현란한 표현에 잠깐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서 완독한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느낌은 고프먼이라는 학자의 치열함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연구가 책상 위에서 책과 자료나 넘겨가면서 한가롭게 진행된 게 아니라 범죄자와 미친자, 온갖 종류의 혐오스러운 상황과 장소에 맞닥뜨리면서, 악착같이 비정하고, 치밀하게 낱낱이 분석적 언어로 치환하면서 이룬 것임을 알았다.

그래, 이건 머리로 쓴 책이 아니야, 몸으로 쓴 책이지: 적어도 이걸 느낀 것만으로도 독서의 수확은 있었다.

결국 나는 책에서 내용을 학습한 게 아니라 고프먼의 악착같고 철저한 태도를 배운 것이며, 사실 그것이 이 책에서 스타일이 더 중요했다고 단정한 이유이다.

 

 

물론 재소자들은 출소 직후 시민적 지위가 제공하는 자유와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시민들에게는 대단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것들이다. -신선한 공기와 신산한 향, 말하고 싶을 때 말하기, 성냥을 마음껏 써 담뱃불 붙이기, 네 명이 앉은 테이블에서 조용히 간식 먹기. 주말에 고향집을 방문하고 병원에 돌아온 한 정신병 환자는 귀를 기울이는 한 무리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가서 커피를 내렸어. 굉장했어. 밤에는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밖에 바람을 쐬러 나갔지. 정말 근사했고 진짜 맛있었어. 그 모든 자유의 순간이 잊히지 않아."(저자의 현장 연구 노트에서) - P95

특별한 존중의 제스처로 주어졌던 것도 얼마 정도가 지나면 당연시되어 통상적 기대치에 준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일종의 퇴행이 발생했다. 존중을 표하는 모든 새로운 방식은 일상화되어 결국 배려의 표식으로서 갖는 효과를 잃어버렸고, 따라서 추가적 베풂이 이를 대신해야 했다. - P337

조직이 열성을 요구하면 그들은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충성에는 불만으로, 출석에는 불출석으로 대응한다. 건강하라고 하면 아프다고 한다. 일을 해야 할 때는 온갖 나태를 부린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소박하고 사소한 역사들을 발견한다. 각각의 역사는 고유한 자유의 몸짓을 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는 지하 생활이 만들어진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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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 의례 - 대면 행동에 관한 에세이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38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아카넷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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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동과 언행, 예절과 처신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나 모르겠다. 스스로 예의범절이란 별로 쓸데없는 짓이고 가식적인 절차라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맞춰 내가 지금 올바로 처신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긴 했다.

 

막상 그 때가 지나면 도로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에 묻혀 그런 걱정은 필요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면서 애써 신경을 끄려고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내 경험과 인맥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처신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그래서 일부러 그런 상황과 장소를 외면하거나 피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체면에 위협이 될 상황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위험이 될 법한 접촉을 피하는 것"(27)이기 때문에. 

 

어빙 고프먼의 <상호작용의례>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체면 지키기'라든지 '존대'와 '처신'의 문제, '당혹감', 대화 과정의 '몰입'과 '소외', '행동'과 그에 따르는 '사후영향' 등에 대해 논구한 저서이다. 저자가 책에서 다루는 용어들은 우리가 살면서 흔히 사용하는 것들이 많지만 문장의 맥락 속에서는 무척이나 분석적이고 학술적으로 읽힌다. 

 

예를 들어 제6장 '행동이 있는 곳'에서 '행동(action)'은 단순한 동작이 아닌, 마치 도박에서 운을 걸고 어떤 베팅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에 '사후영향'을 가져올 '운명적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내가 과연 얼마나 '운명적 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건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도박이나 내기처럼 사후영향이 명쾌하고 곧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효과가 나타났었을 건설적인 도박(모험)을 그때는 왜 하지 않았었는지 회한이 밀려왔었다. 

 

책을 읽는 동안 타인을 대하는 인간의 행동들은 거의 다 연극이자 의례의 연속이고, 나 자신도 그 연극과 의례가 벌어지는 무대의 등장인물처럼 여겨졌다. 이런 느낌은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읽을 때도 들었었다. 

나는 되묻게 된다. 정말 인생은 한바탕 '쇼'인 건지, 내가 보는 사람들의 겉모습은 그들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연출된 '가면(persona)'일 뿐인 건지, 그리고 나도 이런저런 가면을 바꿔쓰면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일 뿐인 것인지... 결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겠더라. 

 

사회학에는 과문하지만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해서 이다지도 냉혹하고 비정하게 그 이면에 감추어진 (사려 깊은, 또는 불경한) 의도들을 철저하게 폭로했던 사회학자는 없었던 거 같다. 어떤 문장은 정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속마음을 완전히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그곳엔 참 다양한 인간들이 나타난다는 걸.

혼자서 미친 듯 중얼거리는 사람들 많이 본다. 이 책 5장에서 말하는 정신병동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겠지. 이들은 공공질서(즉 의례)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 본 한 사람은 참 재미있는 정신이상자였다. 보통의 정신이상자들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의 공간을 이용해서 그들만의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출근 시간에 그 꽉 찬 지하철 안에서 공연을 하더라. 그렇게 많은 승객들 속에서 공연을 벌이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땡큐! 땡큐!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오른쪽이에요!"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도 엄밀히 따지면 공공질서를 위반하는 사람들이지만 (먹고살자고 하는 거라서) 승객들이 어느 정도는 그 행위를 묵인해 줄 수도 있다. 반면 선교 행위인 경우,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예수천국불신지옥)을 강요하는 행위라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하게 여기고 항의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도 몇 번 된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적은 종이를 승객들에게 돌리고 껌 따위를 팔거나 금전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냥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종이를 팽개치는 사람도 있고 그리하여 볼썽사나운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행위들이 지하철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연과 그 반응들이다.

 

금전적 이익을 위해 물건 파는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물건의 질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이다. 능숙한 제품시연과 자신감, 설득력 있는 대사와 목소리, 불법행위 신고의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등등.  

구걸을 위한 공연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초췌한 몰골, 불편한 신체, 때로는 철 모르는 아이와 동반하여 동정심을 유도하기도 한다. 추운 날 맨발에 허름한 삼선 슬리퍼를 신고 종이를 돌리는 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일탈적 행동들은 그야말로 또 하나의 연극이자 의례가 아닐까. 그 공연에 우리들은 외면하거나 동조하기도 하지만 저항하기도 한다. 고프먼도 좋아했을 '상호작용'의 재미난 연구 과제들이 아침 저녁으로 타는 지하철 안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 제1장 '체면 차리기'를 읽을 때 떠오른 한 장면은 은팔찌를 찬 처지에도 꾸역꾸역 올림머리를 하고 재판을 받던 어떤 무직자의 모습이었다. 이야말로 딱 '체면차리기'의 희극이 아닌가. 남은 건 체면 밖에 없는 자의 애잔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올림머리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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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사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 추가) 알라딘 싱글즈 특별 기획 3
대한민국 / 알라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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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런 연설을 할 수 있고, 이런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딸 같은 여인이 가진 아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함께 눈물 흘리던 노신사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선다.

희생자가 살아 있었다면 얼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이기에 그의 딸은 마치 내 딸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일어섰던 노신사,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의 몇 걸음은 아마도 국민과 공감하는 문재인 정권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어제 5·18 추모식 행사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딸이 희생자였던 아버지에게 보내는 추도사를 낭독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고, 낭독을 끝내고 내려가는 그 여인을 선뜻 뒤따라가 위로하며 안아주었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통에게서 늘 볼 수 있었던 태도였고,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문통의 그 행동, 여인을 뒤쫓아가는 몇 안 되는 발걸음은 왜 나를 감동시키고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을까.

그리고 왜 문통의 기념사를 들으며 사람들은 연달아서 박수를 쳤을까. 

단순히 정권이 바뀌었고 쥐와 닭이 물러났으며 그래서 그간 억압됐던 상황이 바뀌었고, 이제 다시 민주정권의 시대와 왔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상황만으로는 저 감동의 무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연설문 자체가 명문이었고 진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 말들은 가식과 수사로 가득한 언설이 아니라 공감과 위로를 드러낸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기에 저절로 박수가 나온 거다. 때마침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오월의 아름다운 하늘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느껴진다.
남을 생각하고 남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나만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운 길이며 결국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겠지.
진짜 보수주의자는 바로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 말이다.
문통은 스스로 자신이 대단히 보수적이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었다.

5.18 민주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자기와 가족을 지키려던 보수다. 빨갱이 아니다.

1980년 오월에 "주먹밥과 헌혈"을 나누었던 모든 광주 시민들 역시 진정한 보수다.

진짜 보수라면 그들이 우리 역사에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

앞서 발매된 무료 e-book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사>에 이번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까지 추가되었다.

내심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앞으로도 문통의 명연설문들을 이렇게 전자책으로 업데이트 해준다면 한 명의 보수이자 문빠로서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 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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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둔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게 됐다.

 

우선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참모들과 머리와 어깨를 맞대고 토론하겠습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습니다. 그 어떤 권력기관도 무소불위 권력행사를 하지 못하게 견제장치를 만들겠습니다.


낮은 자세로 일하겠습니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는 국민을 높이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드높였고,

 

 

 

존대하고 높여줄 필요가 없는 이에게도 의례적인 처신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모독하였다.

나는 이미 이 장면에서 문재인이란 사람은 시대의 지도자적 위치에 올라섰음을 알았다.

 

믿을 수 없는 자제력과 초인적인 도덕성을 가진, 

그런 존경할 수 있는 이를 지도자로 두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제서야 내가 문빠였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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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스 Topos - 장소의 철학 철학의 정원 11
나카무라 유지로 지음, 박철은 옮김 / 그린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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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와 직결되는 책 제목이어서 벌써 3년 전에(2014) 사 두었던 책이다. 장소·장·토포스의 문제를 여러 측면에서 고찰했는데, 예상처럼 쉽지 않았지만, 기대한 만큼 소득도 있었던 독서였다.


기억과 기억술의 문제로서 토포스는 1장에서 고대와 중세의 레토릭(수사학)으로서 소개된다. 가장 기본적인 토포스의 개념은 여기서 거의 다 설명되었다. 2장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의 ‘방법’, 그리고 뉴턴의 ‘절대공간’에 의해 장소가 부정되었음을 설명하였다. 물리학의 ‘장’은 내 지적 수준으로 완전한 이해가 어려웠다. 하지만 절대공간이란 것조차도 물리학적 실천에서는 무용하다는 점이 밝혀졌고(40), 자연현상 속에서도 일종의 ‘場’의 개념이(‘에테르’ 가설, 전자기장, 전자장, 양자장 등) 제안되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3장 역시 어려운 논의였다. 수사학과 물리학의 장에 이어서 생물학에서 ‘장소론’을 다루고 있었는데, 결국 생물과 환경의 관계를 고찰한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4장과 5장에서 가장 소득이 많았다. 일단 4장에서는 장소로서의 신체 문제가 언급된다.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으로 ‘체성감각적’으로 공간을 답파하는 것이 동적인 파악이라면, 자신을 움직이지 않고 ‘조감(鳥瞰)’적인 공간으로 지각하는 것을 정적인 파악이라고 규정한 부분이(90) 와 닿았다. 이를테면 책이나 사진으로 유적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직접 발로 걸어서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조사의 방법일 것이다. 또 상징공간으로서의 장소, 언어적 토포스를 다룬 두 절은 막연한 공간과 장소의 개념적 차이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5장에서 술어논리학, 古논리학, 일본어의 논리 문제 등과 연관된 장소론을 다루었는데 이 장에서 건진 단어가 바로 ‘장면’이다.

 

장면은 주체나 소재와 함께 구체적인 언어 경험의 존재조건을 형성짓고 있다. 그리고 장면의 의미는 예컨대 ‘장면이 바뀐다’, ‘불유쾌한 장면’ 등이라 하듯이 장소의 개념과도 통하지만, 장소의 개념이 단지 공간적·위치적인 데 비해, 장면 쪽은 장소를 채우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장면은 “장소를 채운 사물, 情景과 상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사물들, 정경들을 지향하는 주체의 태도, 기분, 감정도 포함하고” 있다. (116)

 

이 구절을 읽기 위해서, 그리고 이 ‘장면’이라는 낱말 하나를 얻기 위해서 이 어려운 책을 굳이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장면’이란 평범한 단어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책 한 권을 읽고 겨우 단어 하나라니. 이처럼 비효율적인 것이 어디 있겠냐고 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겨우 단어 하나라도 얻기 위해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단어 하나가 의미를 띠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공간 속에 위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성의 유무 이전에 그것이 (장소 또는 장이) 균질적이지 않고 방향성을 가졌”(126)기 때문일 테니까. ‘장소’를 다루는 이 책에서 ‘장면’이란 단어가 있었기에 그것이 특별한 의미로 내게 각인되었다는 말이다.

 

… 토포스론을 풍자만화에서 보이는 일시적인 화제(topic)와 결부하는 것으로 새로운 전개의 가능성을 연 것은 케네스 버크이다(『동기의 수사학』). 그는 말한다. 근대 저널리즘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토픽의 목록(토포이 카탈로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일시적인 공통 화제(commonplace)를 이용한 풍자만화에 관한 토픽의 목록이 그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은 거기에 표현된 것이 어떤 특정 환경 속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업을 테마로 한 만화는 설령 그것이 발군의 뛰어난 것이어도 완전고용의 시대에는 출판할 수가 없다. 그러한 시대에는 일손 부족을 다루는 것이 선호된다. (99)

… 나의 경우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연히 주체를 부정해서 없애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주체주의 철학에 의해 무시되고 등한시되어 온 장소를 철저히 생각해서 그것과의 관계로 주체를 재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주체를 실체가 아닌 활동으로서 파악, 주체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주체가 경직화하거나 쇠약해지지 않기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함이었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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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0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조하셨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돌궐 2017-05-02 13:28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 님 반가워요.
다들 그러셨겠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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