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어문회에서 발간하는 <어문생활>이라는 곳에 박노자 교수의 글이 있어 옮겨온다. 한국어문회는 전국한자능력시험을 주관하고 한자교육을 강조하는 곳인 만큼 여기에 실린 박노자 교수의 글도 자연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여타의 사람들과는 달리 박노자의 글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다. 좋은 읽기 자료가 될 듯 싶다.

우선 원문 그대로를 옮기고, 읽기가 어려운 분들을 위해 아래 한자에 우리말 음을 달아 다시 옮겼다. 먼저 원문을 읽어보시고, 뒤에 우리말 음을 따라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서 자신의 한자실력을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語文隨想

'斷絶(단절)의 世紀(세기)'를 넘으려면

                                         朴露子 오슬로대학교 인문학부 동유럽 및 동양학과 副敎授

  지금 나는 韓國 旅券을 가지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敎授 生活을 하고 있지만 초 · 중 · 고등학교 敎育을 1970년대 말~1980년대에 蘇聯에서 받았다. 학교에서 國文學(러시아 문학) 수업을 들었을 때에 12~13세기로 추정되는 러시아 文學의 初期 作品부터 同時代 文學까지 몇 년에 걸쳐 배웠다. 러시아어의 原語民인 나에게 古代 敎會 言語의 흔적이 강했던 17세기 말까지의 文學 作品의 言語는 다소 어려웠지만, 대체로 18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을 별도의 國譯 없이 그냥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컨대 푸시킨(1799~1837)의 詩 같으면 文學的 言語의 標準으로 삼아 많이 외우기도 했다. 푸시킨의 言語가 약간 '옛날 투'라는 것을 感知할 수 있었지만 그 言語와의 이렇다 할 만한 '斷絶'을 느끼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가? 나와 같은 20세기 후반의 러시아 出身에게는 18세기 중반 이후의 러시아 文學 作品부터는 거의 '母語'의 범위에 포함돼 있다. 平均的 敎養을 갖춘 英語圈 出身에게는 셰익스피어(1564~1616) 作品의 原文 읽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를 原文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을 '敎養人'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즉 유럽의 다수 近代 國民들은 飜譯이라는 매개 없이 근대 초기 내지 18~19세기 부르주아 문화 전성기의 古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또 敎育을 통해 접하게 돼 있기도 하다. 한국은 어떤가? 金萬重(1637~1692)은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보다 약간 '後輩'지만, 영국, 스페인 학생들이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의 原本들을 學習하듯이 韓國 學生에게는 『九雲夢』을 學習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漢文本은 어림도 없을 것이고, 國文本도 현대어 國譯이나 최소한 아주 상세한 註釋을 붙이지 않고는 학생들에게 읽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國譯이 없을 경우에 英語 狂風에 휩쓸린 요즘 세상에서는 어떤 학생들에게 國文本보다 차라리 'The Cloud Dream of the Nine' 題下의 게일 목사의 英譯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끔가다 韓國에 대해서 "대단히 民族主義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이를 肯定視하고 어떤 이들은 否定視하는데, 거의 다들 旣定 事實로 여긴다. 그런데 民族主義가 그렇게도 강하다는 이 나라에서 平均的 敎養人에게는 金萬重의 原本 읽기보다 셰익스피어의 原文 읽기가 훨씬 손쉬울 것이다. 金萬重이야 그렇다 치고 漢字가 많이 들어 있는 廉想涉(1897~1963)의 『萬歲前』(1924)의 原文도 상당수 大卒者들에게까지도 크게 부담스러울 것이다. 外勢 侵略이 계기가 된 부자연스러운 近代化 旅程, 삼국시대 이래의 公用語였던 漢文의 使用 廢棄와 조급한 民族主義的 '國文運動', 日本에서의 '支那 글 漢字 廢止 運動'을 본뜬 '純 한글主義'……, 國粹主義者들을 抑制하여 漢字를 살린 일본과 달리 南北韓은 극단적 주장을 따라 '純 한글'을 '民族語'로 정했다. 그러기에 近代에 접어들 때에 불가피하게 되는 현상인 '傳統文化와의 斷絶'은 韓國의 경우에 불필요할 만큼 극도로 심해져 金萬重은 우리에게 셰익스피어 以上의 '他者'가 됐다. 언어적 民族主義의 逆說이라 할까? 日本의 국수주의적 '國文主義'를 모방하여 "조선의 글로 쓰여진 것만은 조선 문학이다."라고 외친 李光洙, 한글만을 '조선 글'로 인정한 崔鉉培 등 渡日 留學生 출신의 漢字 廢棄論은, 결국 '民族'의 가장 중요한 遺産인 傳統文化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父母를 의식적으로 택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運命대로 이 세상으로 오게 된다. 우리 文化 遺産의 대부분이 동아시아 공동 언어였던 漢文으로 돼 있다는 것도, 우리가 쓰는 언어 자체는 漢字語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選擇 事項이 아닌 運命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民族主義者'가 된 우리가 그걸 싫어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風塵에 얽매여 떨치고 못 갈지라도 江湖一夢을 꾼 지 오래더니 聖恩을 다 갚은 후에는 浩然長歸하리라."와 같은 名文에서 '風塵'과 '浩然長歸'가 뭔지 몰라 감상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貧困함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國譯 사업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傳統文化와의 斷絶 문제의 根本的 解決策이 될 수 없다. 위의 時調를 아무리 國譯을 잘해도 '江湖一夢'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렵고 부담스러울 것이고, 『九雲夢』을 아무리 현대어로 잘 풀이해도 "鬼卒이 대문을 열자, 力士가 성진을 데리고 森羅殿에 들어가 염라대왕께 뵈니 대왕이 말하였다."와 같은 문장에서의 '鬼卒'이나 '森羅'는 漢文과 전통 사상에 대한 基礎 知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기가 거북스러울 것이다.

  根本的 解決策은 무엇인가? 언어적 民族主義와의 訣別, 그리고 漢文 교육의 필수화와 內實化 이외에는 없다. 한문을 학교에서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면 다 무조건 金萬重의 애독자가 될 일이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漢文'이라는 이름의 자물쇠로 꽉 잠근 상태에 있는 古典 文化라는 보물상자를 열어 둘 만한 '열쇠'를 일단 萬人에게 平等하게 주는 것은 社會의 義務다.

<語文生活> 2007.9 통권 제118호 4~5쪽.

   
  金萬重은 우리에게 셰익스피어 以上의 '他者'가 됐다. 언어적 民族主義의 逆說이라 할까? 日本의 국수주의적 '國文主義'를 모방하여 "조선의 글로 쓰여진 것만은 조선 문학이다."라고 외친 李光洙, 한글만을 '조선 글'로 인정한 崔鉉培 등 渡日 留學生 출신의 漢字 廢棄論은, 결국 '民族'의 가장 중요한 遺産인 傳統文化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나는 韓國(한국) 旅券(여권)을 가지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敎授(교수) 生活(생활)을 하고 있지만 초 · 중 · 고등학교 敎育(교육)을 1970년대 말~1980년대에 蘇聯(소련)에서 받았다. 학교에서 國文學(국문학; 러시아 문학) 수업을 들었을 때에 12~13세기로 추정되는 러시아 文學(문학)의 初期(초기) 作品(작품)부터 同時代(동시대) 文學(문학)까지 몇 년에 걸쳐 배웠다. 러시아어의 原語民(원어민)인 나에게 古代(고대) 敎會(사회) 言語(언어)의 흔적이 강했던 17세기 말까지의 文學(문학) 作品(작품)의 言語(언어)는 다소 어려웠지만, 대체로 18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을 별도의 國譯(국역) 없이 그냥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컨대 푸시킨(1799~1837)의 詩(시) 같으면 文學的(문학적) 言語(언어)의 標準(표준)으로 삼아 많이 외우기도 했다. 푸시킨의 言語(언어)가 약간 '옛날 투'라는 것을 感知(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 言語(언어)와의 이렇다 할 만한 '斷絶(단절)'을 느끼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가? 나와 같은 20세기 후반의 러시아 出身(출신)에게는 18세기 중반 이후의 러시아 文學(문학) 作品(작품)부터는 거의 '母語(모어)'의 범위에 포함돼 있다. 平均的(평균적) 敎養(교양)을 갖춘 英語圈(영어권) 出身(출신)에게는 셰익스피어(1564~1616) 作品(작품)의 原文(원문) 읽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를 原文(원문)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을 '敎養人(교양인)'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즉 유럽의 다수 近代(근대) 國民(국민)들은 飜譯(번역)이라는 매개 없이 근대 초기 내지 18~19세기 부르주아 문화 전성기의 古典(고전)들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또 敎育(교육)을 통해 접하게 돼 있기도 하다. 한국은 어떤가? 金萬重(김만중; 1637~1692)은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보다 약간 '後輩(후배)'지만, 영국, 스페인 학생들이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의 原本(원본)들을 學習(학습)하듯이 韓國(한국) 學生(학생)에게는 『九雲夢(구운몽)』을 學習(학습)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漢文本(한문본)은 어림도 없을 것이고, 國文本(국문본)도 현대어 國譯(국역)이나 최소한 아주 상세한 註釋(주석)을 붙이지 않고는 학생들에게 읽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國譯(국역)이 없을 경우에 英語(영어) 狂風(광풍)에 휩쓸린 요즘 세상에서는 어떤 학생들에게 國文本(국문본)보다 차라리 'The Cloud Dream of the Nine' 題下(제하)의 게일 목사의 英譯(영역)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끔가다 韓國(한국)에 대해서 "대단히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이를 肯定視(긍정시)하고 어떤 이들은 否定視(부정시)하는데, 거의 다들 旣定(기정) 事實(사실)로 여긴다. 그런데 民族主義(민족주의)가 그렇게도 강하다는 이 나라에서 平均的(평균적) 敎養人(교양인)에게는 金萬重(김만중)의 原本(원본) 읽기보다 셰익스피어의 原文(원문) 읽기가 훨씬 손쉬울 것이다. 金萬重(김만중)이야 그렇다 치고 漢字(한자)가 많이 들어 있는 廉想涉(염상섭; 1897~1963)의 『萬歲前(만세전)』(1924)의 原文(원문)도 상당수 大卒者(대졸자)들에게까지도 크게 부담스러울 것이다. 外勢(외세) 侵略(침략)이 계기가 된 부자연스러운 近代化(근대화) 旅程(여정), 삼국시대 이래의 公用語(공용어)였던 漢文(한문)의 使用(사용) 廢棄(폐기)와 조급한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國文運動(국문운동)', 日本(일본)에서의 '支那(지나) 글 漢字(한자) 廢止(폐지) 運動(운동)'을 본뜬 '純순 한글(主義)주의'……, 國粹主義者(국수주의자)들을 抑制(억제)하여 漢字(한자)를 살린 일본과 달리 南北韓(남북한)은 극단적 주장을 따라 '純(순) 한글'을 '民族語(민족어)'로 정했다. 그러기에 近代(근대)에 접어들 때에 불가피하게 되는 현상인 '傳統文化(전통문화)와의 斷絶(단절)'은 韓國(한국)의 경우에 불필요할 만큼 극도로 심해져 金萬重(김만중)은 우리에게 셰익스피어 以上(이상)의 '他者(타자)'가 됐다. 언어적 民族主義(민족주의)의 逆說(역설)이라 할까? 日本(일본)의 국수주의적 '國文主義(국문주의)'를 모방하여 "조선의 글로 쓰여진 것만은 조선 문학이다."라고 외친 李光洙(이광수), 한글만을 '조선 글'로 인정한 崔鉉培(최현배) 등 渡日(도일)留學生(유학생) 출신의 漢字(한자) 廢棄論(폐기론)은, 결국 '民族(민족)'의 가장 중요한 遺産(유산)인 傳統文化(전통문화)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父母(부모)를 의식적으로 택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運命(운명)대로 이 세상으로 오게 된다. 우리 文化(문화) 遺産(유산)의 대부분이 동아시아 공동 언어였던 漢文(한문)으로 돼 있다는 것도, 우리가 쓰는 언어 자체는 漢字語(한자어)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選擇(선택) 事項(사항)이 아닌 運命(운명)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가 된 우리가 그걸 싫어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風塵(풍진)에 얽매여 떨치고 못 갈지라도 江湖一夢(강호일몽)을 꾼 지 오래더니 聖恩(성은)을 다 갚은 후에는 浩然長歸(호연장귀)하리라."와 같은 名文명문에서 '風塵(풍진)'과 '浩然長歸(호연장귀)'가 뭔지 몰라 감상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貧困(빈곤함)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國譯(국역) 사업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傳統文化(전통문화)와의 斷絶(단절) 문제의 根本的(근본적) 解決策(해결책)이 될 수 없다. 위의 時調(시조)를 아무리 國譯(국역)을 잘해도 '江湖一夢(강호일몽)'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렵고 부담스러울 것이고, 『九雲夢(구운몽)』을 아무리 현대어로 잘 풀이해도 "鬼卒(귀졸)이 대문을 열자, 力士(역사)가 성진을 데리고 森羅殿(삼라전)에 들어가 염라대왕께 뵈니 대왕이 말하였다."와 같은 문장에서의 '鬼卒(귀졸)'이나 '森羅(삼라)'는 漢文(한문)과 전통 사상에 대한 基礎(기초) 知識(지식이) 없는 사람게는 보기가 거북스러울 것이다.

  根本的(근본적) 解決策(해결책)은 무엇인가? 언어적 民族主義(민족주의)와의 訣別(결별), 그리고 漢文(한문) 교육의 필수화와 內實化(내실화) 이외에는 없다. 한문을 학교에서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면 다 무조건 金萬重(김만중)의 애독자가 될 일이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漢文(한문)'이라는 이름의 자물쇠로 꽉 잠근 상태에 있는 古典(고전) 文化(문화)라는 보물상자를 열어 둘 만한 '열쇠'를 일단 萬人(만인)에게 平等(평등)하게 주는 것은 社會(사회)의 義務(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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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9-1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잘 읽고 갑니다. 근데 한자가 너무 많아요. 읽기 너무 힘들다앙~~^^
역시 박노자 교수의 글은 깊이있고,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멜기세덱 2007-09-12 00:46   좋아요 0 | URL
이거 옮기느라 저도 힘들었어요. ㅎㅎ
그렇게 어려운 한자들은 없는데요, 아마도 글씨가 작아서 그러실 거에요.ㅎㅎ
김만중이 셰익스피어 이상으로 타자가 됐다는 지적에 뜨끔하네요.

심술 2007-09-1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77년 뱀들이랑 같이 공부한 78년 말인데 꽤 어렵군요.

멜기세덱 2007-09-12 23:24   좋아요 0 | URL
이 정도가 어려우시면 좀 곤란한데...ㅋㅋㅋ 농담입니다.
아무래도 한자가 섞여 있으면 익숙치 않아서 그럴 거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