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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동안 ‘본격’이라고 불릴만한 장르에 소원했었어 요.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decca’님께서 <올해의 추리소설 이 벤트> 서두에서 쓰셨던 표현을 빌리자면 ‘시달리고 피곤했기’ 때문이 죠.^^ 지친 몸을 간신히 끌어와 책상 앞에 앉으면, 아무래도 사람 피곤하 게 하는 ‘본격’보다 술술 읽히는 ‘드라마’색 짙은 책들에 먼저 손이 가게 되더라구요. 솔직히 나쁘지 않았어요. 난해한 수수께끼 풀이에 몸이며 머리를 축내는 일 없이, 작가가 그려가는 크고 작은 세상사들에 함께 울 고 웃다가 때론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요. 그러니까…’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수차관의 살인’ 서평에서 말한 것 처럼 ‘추리’소설이 아닌 추리’소설’에 ‘익숙해지게’ 된거죠.
그러던 어느 날, ‘어, 내가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구요. 그리고 책장을 훑어 봤는데 ‘본격’ 쪽에 걸칠만한 책들은 이가 빠진 ‘엘 러리 퀸 컬렉션’을 제외하면 정말 숨은 그림 찾기더군요. 으음…이건 아 니다 싶었죠. 사실 계기가 있긴 있었는데, 미스테리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듯한 ‘사쿠라바 가즈키’와 ‘미치오 슈스케’의 나오키상 수상작을 손에 들고 갈등하는 나를 보게 된거죠. ‘아니야…이대로 무너지면(?) 안되지.’ 하는 생각에 결국 내려놓았어요. 그리곤 반성하기 시작했구요. 암요, 사 람이 근본을 잊으면 안되는 거죠. ㅎㅎ
사실 그렇게 마음은 다잡았어도 본격물 읽기는 여전히 녹녹하지 않았어 요. ’마쓰다 신조’의 신작을 펼쳐 들었다가 한 페이지 가득 빽빽하게 나 열된 등장 인물들과 가계도를 보고는 식겁해서 내려놓고 서양 고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편견이 머릿속에 들러 붙어 떠 나질 않고… 정말 난감했어요. 그렇게 우왕좌왕하던 중에 <수차관의 살 인>이 눈에 들어오게 됐어요. 검정 바탕에 원색을 사용한 표지 디자인 이 마음에 들어 전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래, 이 때다!’ 싶은 생 각이 들더라구요. 사는 김에 <인형관…>이랑 <흑묘관…>도 함께 집어 들 었어요. (오늘 <기면관…>까지…) 본격에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더는 느 낌이었죠. ㅎㅎ
책 이야기 하는데 서두가 너무 길었군요. -,-;; 작심은 했지만 책을 펼쳐 들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채 를 갚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한 거거든요. 그런데… 이 책… 읽어 나가는 데, 피곤은 커녕 졸음이 싹 달아났어요. 제 생애 본격물을 하루 만에 끝 내 본 건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지 싶어요. 본격이 이렇게 잘 읽혀도 되 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구요. 공간에 대한 감각이 한참 뒤떨어져 이런 장 르의 책 읽기는 거의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늘 생각했었던 제가 부끄러울 정도로, <수차관의 살인>은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졌어요. 그 러다 보니 시,공간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을 정리하느라 허덕일 필요 가 없어졌고, 그 덕분에 나름의 논리를 전개 시켜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여유마저 생겼죠. 그리고 결국, 중반을 넘어서면서 첫 번째 살인에 사용 된 트릭과 그 범인에 대한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는 소기의 성과 (?)마저 거두게 됩니다. 물론 여기엔 작가가 설치한 장치들이 그리 낯설 지 않았다는 이유도 한 몫 했는데요, 만약 당신이 ‘능력자’라면 초장에 그 낌새를 알아차리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만큼 이 작품의 트릭은 공 정하고 명쾌합니다. 곳곳에 깔아 놓은 자잘한 복선들이 하나둘 회수 되 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쾌감은 본격에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뒤 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을 훨씬 뛰어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이 책 <수차관의 살인>이 <그리스 관의 미스테리>을 포함해 이런 경험을 맛보게 해준 두번째 작품입니다.
< 수차관의 살인>을 통해 느끼게 된 것이 많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줄기 차게 ‘본격’을 찾을 것 같지는 않아요. ‘피곤한’ 인생, 여전히 드라마에 목을 매겠죠.ㅎㅎ 그래도 이전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겁을 먹는 일은 다 시 없겠죠. 기다려라! <염매처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