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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 몽키스 구단 에이스팀 사건집
최혁곤.이용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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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팬의 사심을 담아, 근래 읽은 책들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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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앞이었다. 나는 현관 옆에 위치한 바깥 화장실로 기다시피 들어갔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속에 것을 모두 토해냈다. 반나절 묵은 시큼한 맥주와, 함께 딸려온 파전 건더기가 물풀 가득한 끈적한 도랑 모양을 이루며 변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을까. 라는 생각으로 무료한 하루를 보낸 나는 다음 날 학교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각진 코를 찾아갔다. 가끔 교내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긴 했어도 서로 아는 체를 한 적은 없었던 터라 교실로 찾아온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에 뜨아함이 묻어났다.

 

"웬일이냐?"

 

나는 멀뚱해하는 그의 얼굴을 잠시 구경한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 알고 있었냐?"

 

"."

 

"너희 엄마랑 쓰레기..."

 

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멍청한 거야 뭐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잠시 뒤, 우린 학교 운동장 응원석에 나란히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이긴 했어도 오전 내내 달아오른 열기에 시멘트 바닥이 후끈했다.

 

"너희 아빠랑 새엄마가 어떻게 같이 살게 된 건진 알고 있니?"

 

각진 코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삐딱한 자세로 물었다.

 

"대충 짐작 정도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엄마가 죽은 뒤 쓰레기는 클럽 살림을 챙기면서 동시에 나를 돌볼 보모가 필요했고, 어쩌다 만난 늙은 호빵은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내 추측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이틀 전까진.

 

"그럼 뭐, 얘기 다 된 거네."

 

그가 방향을 바꾸어 운동장 건너편 먼 산을 쳐다봤다. 발아래 운동장은 뜨문뜨문 흩어져 공을 차는 애들을 제외하곤 대체로 한가했다.

 

"쓰레기를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할게. 그게 너도 듣기 편할 것 같고- 먼저 만난 건 이모가 아니라 우리 엄마였지. 이혼하고 나서, 뭐 그 전인지도 모르고, 가끔 친구들이랑 너희 가겔 갔는데 아마 그때 쓰레기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 몇 번 만나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을 거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네 죽은 엄마얘기도 나왔을 거야. 우리 엄마 성격에 누가 아무리 좋아도 가진 돈 싸들고 자원봉사 하러 가고 싶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쓰레기한테는 끌렸던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적당히 묘안을 낸 것이 이모를 너희 집 식구로 만들고 엄마는 가끔 얼굴 비추면서 쓰레기랑 계속 관계를 가지는 거였지.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가 아니니 위험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 게다가 당시엔 이모도 변변한 자식 하나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죽은데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하던 시기였으니 자기들 딴엔 썩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 내 생각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둘은 행여 그들 사이가 들킨 다해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이니까."

 

갸름한 턱이야 녀석이 더 잘 알 테지만 어쨌든 쓰레기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고 그 모습을 본 각진 코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보니 미안하네. 난 네가 다는 아니더라고 어느 정돈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나는 그를 마주보았다. 짐짓 비장해 보이는 그의 얼굴 뒤엔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에 대한 우쭐함이 슬쩍 숨어있었다. 나는 거기에 대고 어제 하루 방안을 뒹굴 거리며 내린 결론을 확인시켜줘서 고맙다는 얘긴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충 얘기가 끝났다 생각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했다. 각진 코도 따라 일어서나 했는데 갑자기 녀석이 할 얘기가 더 있다며 다시 앉아보라고 했다.

 

너 지난 토요일에 중년 부부 한 쌍이 쓰레기 찾아간 것 알고 있지?”

 

룸에 앉아 거드름 피우던 그 부부 모습이 떠올랐다. 맞은편에서 쩔쩔매고 있던 쓰레기 얼굴과 함께.

 

. 근데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누나한테 들었지.”

 

마스카라가 흘려준 모양이었다.

 

그 부부 거기 뭐 하러 간 건지는 알고 있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돈 다발. 아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각진 코가 얘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녀석 답지 않다. 방금 전언니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제 엄마 얘길 했을 때보다 더 신중한 모습이었다.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가 어렵게 입을 뗀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한 달 전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토요일 오후로 나를 데리고 갔다. 클럽 옥탑방 부엌. 마치 뭍으로 내팽개쳐져 숨이 막 끊기기 직전의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던 그녀를 본 바로 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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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동안 쭉 기다리고 있습니다...천천히 가시더라도...조금은 올려주셨으면...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도로에 면한 지하 만화방에 들러 책을 돌려주고 나왔을 땐 주위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띄엄띄엄 늘어선 가로등에선 희미한 빛이 어슴푸레 스며 나오고 있었고 인근 가게들 간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과 어울려 특유의 밤거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도로 반대편으로 건너가 타야했지만 알싸한 밤 분위기에 홀린 나는 그냥 인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거리이긴 했어도 한낮 무더위 속에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삼겹살집에서 새어나오는 달싹한 고기 냄새와 레코드가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김완선의 노래, 그리고 전파상 쇼윈도에 진열된 TV를 통해 보이는 드라마 속 여배우의 열연에 나는 한껏 들떴고, 건물사이로 난 좁은 골목 안 여관을 향해 두 손을 꼭 잡은 채 걸어 들어가는 커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처럼 보였다. 나는 밤이 선사하는 여유로움에 완전히 취했고, 이 길이 그냥 이대로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낭만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황홀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어느 덧 그녀가 운영하는 양품점에 도착해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가게는 고만고만한 보세 옷가게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주로 30~40대 여성들을 위한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옷들을 다루고 있는 덕에 주위가게들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문을 열자 안쪽 카운터 뒤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던 가게 주인이 보였다. '갸름한 턱'. '각진 코'의 엄마이자 새 엄마의 여동생. 둘은 자매이긴 했어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같이 있을 땐 그 외모의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는데 동생이 언니보다 몸매며 얼굴이 훨씬 예뻤다. 특히 계란형 얼굴과 늘씬한 목 사이를 있고 있는 날렵한 턱은 그 우월의 차이를 압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배다른 자매. '갸름한 턱'을 처음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을 사실로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각진 코'가 마치 자신의 학년 석차를 얘기 하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중요해?'

 

긴 이야기 끝에 녀석이 짧게 덧붙인 말이었다. 자신의 가정사를 여자 탤런트의 미모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 하찮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갸름한 턱이 단정한 자세로 일어서서는 기계적인 미소로 나를 맞았다. 각진 코가 늘 '가식으로 도배된' 이라고 얘기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 왔니?"

 

그녀는 흰색 원피스 차림이었고 허리엔 뱀처럼 생긴 가는 벨트가 조이듯이 둘러져 있었다.

 

", 가져갈 것이 있다 해서요."

 

", 그래 잠깐만 기다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카운터 뒤의 연결된 방으로 사라진 그녀가 얼마 뒤 한 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아침에 시간 나서 부친 건데 언니 갖다 줘. 비닐 팩에 싸서 넣어 놨으니 대충 데워 먹으면 될 거야."

 

그녀가 해물파전이 든 종이가방을 내게 건넸고 나는 전달받은 가방을 손에 들고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아직 다른 용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시답잖은 배달 심부름이나 하자고 꿀 같은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었다.

 

"여기 이거..."

 

그녀가 풀로 봉해진 편지 봉투를 카운터 서랍에서 꺼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침한 표정과 함께 내게 내밀었다.

 

"아저씨한테 갖다 줘."

 

여기서 아저씨란 우리 클럽에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로 무대에 서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는 그를 항상 '동남아'라고 불렀는데, 늘 초췌한 표정에다 지저분한 구레나룻은 언제나 좌우길이가 맞지 않았으며 무대에 서지 않을 때의 후줄그레한 차림까지 더하면 도저히 아마추어 가수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갸름한 턱과 그 사이에서 이런 연락책을 맡기 시작한 것이 약 세달 전인데, 도대체 그의 어떤 면에 갸름한 턱이 끌리게 되었는 지는 그의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자연산인지 아니면 고급 미용실 파마 덕인지 만큼이나 내겐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이건 수고비"

 

그녀가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주었다. 내가 일요일 오후의 단잠을 포기하고 버스 두정거장을 걸어 여기까지 온 진짜 이유였다. 편지 한통을 전달하고 받는 심부름 값치고는 꽤 큰돈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전 이혼한 남편으로 부터 받은 상당한 액수의 위자료에 지금도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생활비를 받는 그녀에게 이까짓 푼돈이 아쉬울 리가 없었다.

 

"따로 전해드릴 얘기는요?"

 

그냥 가기 머쓱해 인사대신 던진 질문이었다.

 

"없어."

 

용무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돌아서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갸름한 턱이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 아빠한테도 안부 전해줘"

 

나는 '그럼 수고비를 좀 더 주셔야죠.'라고 하려다 말았다.

 

 

손에든 종이가방이 거추장스러워 올 때는 그냥 버스를 타고 왔고, 클럽에 들러 갸름한 턱이 부탁한 일을 마치고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준 파전을 안주삼아 가게서 들고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이내 잠이 쏟아졌다.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아침에 깼을 때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어제 먹은 해물파전때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학교를 안 간 적은 많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본 적은 없어서 일단 등교는 하기로 했다. 하지만 1교시를 지나자 머리까지 깨질듯이 아파왔고 결국 교무실을 찾아갔다. 사정을 얘기하고 조퇴를 신청하자 담임이 한심한 녀석이라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꺼지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울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바닥이 아닌 창밖 먼 곳을 보려고 노력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지나가는 전봇대 개수를 세고 사람들의 옷차림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길가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 다왔다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두통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갸름한 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손이 누군가의 허리에 둘러져 있었고 상대는 동남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내고 싶어졌다. 갸름한 턱은 어젯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던 그 커플이 손을 잡고 들어가던 여관 골목을, '쓰레기'와 함께 부둥켜 안은 채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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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코'가 내 방을 마치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건 이 집 자물쇠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였다. 다세대 주택 1층 구석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쪽방인데다 딱히 돈 되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탈이 난 채로 두고 있었는데, 한 손에 만화책을 든 채 낄낄거리며 누워있는 녀석을 보니 수리비가 좀 들더라도 고쳐놓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에 다니는 학교도 같았다. '각진 코'란 별명은 그가 틈날 때마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위로 세우듯이 문지르는 버릇 때문에 내가 붙인 별명이었는데, 그는 그런 식으로 자꾸 비비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코가 높아질 것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좀 음흉한 구석이 있는데다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애들 흉내를 내느라 가끔 건들거리긴 해도 바탕 자체가 나쁜 녀석은 아니어서, 나는 그가 새엄마의 여동생 아들이란 사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는 좀 더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 왜 왔어?"

 

각진 코의 옆에 쌓아올려진 만화책들 중 한권을 집어 들며 내가 물었다. 고행석의 불청객시리즈였다.

 

"누나 만나러 갔었는데, 목욕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신세지러 왔지"

 

누나란 '마스카라'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녀석 혼자서 쫓아다닌 지 좀 됐다.

 

", ... 오늘은 꼭 한번 해야 되는데."

 

"아직이야?"

 

". 줄듯 하면서 자꾸 튕기네."

 

녀석이 몇 번 같이 자자고 졸랐었는데 잘 안됐나 보다.

 

"근데, 어디가 그렇게 좋아?"

 

"딱 봐도 죽이게 생겼잖아. 테크닉도 끝내줄 것 같고."

 

각진 코의 손이 느슨해진 벨트 아래로 들어가더니 불룩해진 팬티 위를 쓰윽 한번 훑었다.

 

근데...“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가게 오는 아저씨들 매일 상대하다 막상 네꺼 보면 물건 같기나 하겠냐?”

 

각진 코가 발끈했다.

 

"미친 새끼. 너 내꺼 봤어?"

 

나는 울그락불그락하는 그를 앞에 두고 '안 봐도 뻔하지 뭐'라는 말을 더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러면 진짜로 꺼내 보여줄 기세다. 별로 유쾌한 그림은 아니다. 남자 둘만 있는 좁은 방에서.

 

"근데, 좀 전에 들어와서 나 있는 거 슬쩍 보고는 다시 나갔다 왔잖아."

 

흥분을 가라앉힌 각진 코가 보고 있는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누구야?"

 

모자라 보이긴 해도 눈치하난 귀신같다.

 

"교회 친구. 같이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어."

 

"여자?"

 

"."

 

녀석이 손에 든 만화책을 접더니 '호오' 소리를 내며 내 쪽을 쳐다봤다.

"괜히 미안하네. 나 때문에."

 

맘에도 없는 얘기였다. 그는 곧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내가 먼저 오자고 한 것도 아니니까."

 

이번에는 그가 벌떡 일어섰다.

 

"이 새끼. 진짜 미친 놈 맞네."

 

그가 쥐고 있던 만화책이 바닥에 팽개쳐지듯 엎어졌다.

 

", 여자가 제발 좀 따먹어 달라고 남자 혼자 있는 집엘 찾아오는데, 그런 기횔 걷어 차냐. 븅신 새끼야."

 

착한 녀석이긴 한데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나는 못들은 척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고 잠시 씩씩거리던 녀석도 늘 그렇듯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엎어놓은 만화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만화방에서 빌려 온 스무 권 남짓 한 만화책들을 모두 끝내고서야 각진 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그가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책들로 인해, 마치 관객들이 먹다버린 음료수 캔이며 과자봉지들로 뒤 덥혀진 영화관 객석만큼이나 어지럽혀져 있었다.

 

'가려고?"

 

". , 설마 여태껏 때 밀고 있진 않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아마 제멋대로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구제불능인 놈이다.

 

"만화책 좀 이따 갖다 줘."

 

그가 나에게 명령하듯 말하고는 방문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뭔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돌아서서는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참, 엄마가 아침에 해물파전 만들어 놨다고 이따 와서 가져가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이 더운 여름에 다른 음식도 아니고 웬 파전이람.' 하고 생각하고는 보고 있던 고행석의 '노래하는 불청객' 열두 번째 권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 샌가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방안의 뜨겁던 공기가 한 풀 꺾여있었고 창밖으로는 어스름이 져 있었다. 옆에서는 잠들기 전에 틀어놓은 선풍기가 이 일이 마치 자신의 숙명이라는 듯 묵묵히 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시 이대로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해야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어지럽던 방안을 대강 정리한 뒤 각진 코가 빌려온 만화책을 챙겨서는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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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기야...”

 

평소에도 붉은 기가 도는 그녀의 앳된 얼굴이 마치 때깔 좋은 자두처럼 불그스레해졌다. 그녀는 지나가는 교인들 한가운데 멈춰서 있었고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앞장을 서 걷기 시작했다. 주춤대던 그녀가 곧 뒤따라 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제 우리 가게 왔었지?”

 

.”

 

?”

 

교회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썩 친한 사이도 아닌데다, 설령 친구 집이라 하더라도 나이트클럽 같은 곳엘 무턱대고 혼자 찾아올 수 있는 애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역시나 안 물어 보는 게 나았다.(아는 이도 없는 집엘 혼자 찾아와서는 귀신화장을 한 접대부 환대를 받고 갔으니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진짜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살짝 기가 죽긴 했지만, 어쨌든 난 지금이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연습했던 그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늦어지면 더 어색해 진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준비한 그 말을 꺼냈다.

 

우리, 같이 좀 걸을래?”

 

나름 최선을 다해 폼을 내 봤는데 아무래도 많이 어쭙잖았나보다. 그녀가 말이 없었다. 긍정이나 부정의 표시만을 염두에 두었지 멍청하게도 대답을 회피했을 때의 경우에 대해선 전혀 고려해보지 않는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공백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귀엽긴 했지만 퉁명함이 묻은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가 바로 들었다. 적어도 앞으로 함께 걸을 동안은 말을 섞어야 할 텐데 얘기하는 내내 이런 식의 단답형 대화라면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나로서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별안간, 느긋해야할 일요일 오후에 이 무슨 쓸데없는 고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란해진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어디로 갈건 지를 태평하게 물어왔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범위는 우리 둘 중 하나의 집으로 좁혀졌고 최종 결론은 결국 내가 사는 방으로 내려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곳이 -작년에 이사해 여기서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인- 그녀의 집보다 좀 더 가깝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은 내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고집에 어영부영 밀린 탓이었다. 이 동행이 더욱 마뜩찮아졌다.

 

한 가지 주제가 끝나자 대화는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갈 것 같아 뭐라도 해야겠다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소정이 그 고민을 덜어 주었다.

 

너 영화 좋아하니?”

 

진짜 궁금해서가 아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보였어?"

 

". 매점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이더라고."

 

난 학교 매점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점은 지난 주 토요일 우리가 만났던 영화관 안의 그곳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리라. 영화관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2편 동시상영관,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장국영 주연의 홍콩영화를 보고 나가는 길이었고 나는 뒤이어 상영될 실베스타 스탤론의 '오버 더 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회이외의 장소에선 만난 적이 없었던 우린 서로 어색한 인사를 교환했고, 이후 어찌하다 우리 가게 이름까지 (가까워서 자주 들른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알려주고 말았다.

 

", 영화가 좋아서라기 보단 토요일이라고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가는 거야. 언젠가 재미삼아 한번 갔는데 시간 때우기가 괜찮더라고."

 

나는 재미삼아 본 그 첫 영화의 포스터에 벌거벗고 끌어안은 두 남녀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고 있었다는 얘긴 덧붙이지 않았다. 소정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후로 우리는 서로가 싫어하는 요일 및 싫어하는 과목, 그리고 싫어하는 선생님의 체벌 방법과 강도에 대해서 한동안 떠들었다. 또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을 달고 우리 가게 무대에 서고 있는 동남아에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구레나룻 아저씨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긴 시간 얘기를 끌고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들뜬 척도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얼마 전 파혼한 교회 전도사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이제 좀 재밌어지나 했는데 그것도 잠깐, 그냥 그가 그럴만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한 여름 내리쬐는 볕에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그녀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금방 지쳤다. 그래서 난 평소에 늘 궁금해 했던 걸 물어보는 것으로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집사랑 권사가 뭐가 다른 거야?"

 

그녀의 어머니가 권사, 아버지가 집사라는 사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미안한데, 실은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대답한 소정이 나를 흘끗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는 또다시 바보가 되었다. 아무래도 타고난 재주인가 보다.

 

그 질문을 끝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적어도 그녀를 앞에 두고서 할 수 있는- 화제꺼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첫 만남에서 오는 어색한 긴장감도 이제 슬슬 그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조금씩 빨리하기 시작했고 소정은 순식간에 뒤쳐졌다. 그 때였다. 그녀가 마치 자기만 아는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다는 듯이 얘기를 꺼낸 것은.

 

"아까 네가 물어본 거."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어제 너희 가게 왜 갔었느냐고."

 

이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실은 엄마가 이전부터 너 어떻게 지내는 지 늘 궁금해 했었거든. 그러니까 네 어머니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소정의 어머니와 죽은 내 엄마가 교회에서 가끔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근데,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죽은 지 벌써 2년이 다된 그 여자의 아들 사는 모습이 궁금할 정도로.

 

"혹시 너한테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해주고 싶다, 라고도 하시더라고."

 

나는 앞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걸으니 편했다. 애당초 누군가와 보조를 맞춰 함께 걷는다는 귀찮은 계획을 세운 자체가 잘못이었다.

 

"미안해."

 

소정이 재빨리 뒤 쫓아와 내 어깨를 잡았다.

 

"부탁이니 오해하지는 마. 엄만 그저 네 걱정이 되서 그러는 거니까."

 

네 엄마 염려 따윈 필요 없다고 하려했으나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가자. 오래 서 있으니 더워."

 

소정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익숙한 느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엄마. 부드러우면서도 편안한,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그 경계를 단번에 풀어버릴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은 죽은 엄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모에서 오는 따듯함이, 어린 시절 먹을 것을 사주지 않는다며 거리 한복판에서 칭얼대던 나에게 그 자리에서 혼을 내고서는 이후 집에 돌아와 아까는 미안했노라며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시던 엄마의 그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오해하지 말라던 소정의 강인하면서도 따스한 표정이, 그리고 미안하다며 내민 그 편안한 손이 나를 돌아가신 엄마 옆에 다시 세워 놓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부끄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 둘은 어느 덧 내가 사는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왜 그때까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아수라장 같은 방안 풍경이 떠올랐다. 며칠 신다 둘둘 말아놓은 양말, 땀이 배어 누렇게 변한 속옷과 대충 접어 구석에다 던져놓은 바지, 그리고 어젯밤에 본 이후 펼쳐진 그대로 두고 온 포르노 잡지까지. 나는 소정에게 미안하다며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지는 걸 보니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내 방을 향해 뛰어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걱정했던 속옷이며 양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멀뚱하게 서있는 소정에게 지금 집에 누가 와있으니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불쑥 찾아오자고 한 자기 잘못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손으로 뭔가를 썼다.

 

집 전화번호야. 시간 날 때 전화 줘.”

 

나는 그녀가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각진 코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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