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아만 - <호동거실> 평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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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책을 비롯해 이언진과 그의 스승 이용휴 그리고 조선시대 말 지식인사회의 지층과 위상을 곡진하게 살핀 좋은 서평은 이미 파란여우 윤미화 씨가 그녀의 홈페이지에 시리즈로 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독후감(感)을 헐겁게 적을 뿐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파란여우의 글을 읽어주세요(http://pporoo.khan.kr/69). 

 

 저자 박희병 교수는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로 먼저 만났는데, 연암의 원문 읽는 맛을 배가시키는 좋은 해설서였습니다. <저항과 아만>은 저자에 대한 신뢰로 선택한 책이기도 합니다. 이번 책은 우상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을 평설하는 책입니다. 서문격인 '독호동거실법'에도 나오지만 연암은 우상과 동시대인으로 <연암집>엔 '우상전'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저 역시 한때, 연암을 받들어 그의 <연암집>을 성경처럼 1일 1편 1독하며 지냈던 적이 있는데, 연암과 우상의 관계가 사뭇 안타까와 계속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은 자신의 글을 (당대 이미 유명세 떨친 문장가였던) 연암만큼은 이해해주리라 생각해 글 몇편을 보냈지만 연암은 악평만 더해 우상에게 울화를 남겼습니다.

 

 연암이나 우상 모두, 가계가 궁한 것이야 서로 비교우위를 점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연암은 엄연히 노론계층의 이름 있는 집안 자제였던 반면 우상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신분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는 중인층이었습니다. 정조의 문체반정 때, 유해한 문장에 첫 손 꼽혔던 연암이니만큼 그 역시 소수였지만 아무래도 우상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연암의 문장이 기발하고 힘이 넘친다 해도 그의 사상적 경향 역시 급진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예의 <연암집>을 읽을 때, 적잖이 놀랐던 건 그의 당파적 글이 갖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때문이었죠. (물론, 그의 글 몇편에 푹 빠져서 멋대로 연암상을 그려놓았던 제가 순진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편을 평설하며 꼼꼼히 따져보이지만,) 연암이 우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겠죠. 연암이 그 정도였다면 이언진을 대하는 당시의 몰이해와 비판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아만(我慢)은 "불교 용어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르는 부정적 말이지만 "이언진에게서 느껴지는 아만은 자의식 내지 주체의식이 아주 큰 것"입니다. 스스로를 이백과 동급에 놓거나 부처 또는 신선이라 밝히는 과언을 나르시시즘에 빠진 얼뜨기 예술가의 망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이언진이 지녔던 넘쳐흐르는 주체성과 강한 주체에 동반되는 그의 그늘까지 포괄"한다고 보는 게 온당할 것입니다.

 

 독자는 이언진의 무거운 정신을 담은 낯선 한문시를 정으로 돌을 깨고 다듬듯 읽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쉬운 번역어로는 심부의 들끓는 투쟁의 흔적을 바로 느끼기도, 알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발부터 직행할 수는 없고 해설자의 글을 잘 따라가는 게 우선해야 하겠죠.

 

 

  덧 - 연암 박지원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은 것이 특이하죠.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연암이 쓴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연암집 제4권 - 영대정잡영> 수록)가 다시 읽고싶어지더군요. 오늘은, 그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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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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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도덕적 치부에 픽션을 가미해 소설적 외향을 갖춘 '고백문학'은 일본에서 면면이 이어오던 전통이라고 합니다. 『가면의 고백』은 그 흐름 가운데서도 불세출의 것으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탐미적인 특유의 문체와 사건을 르포 식으로 조립하는 표면적 흐름을 벗어나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분석하여 내면의 구조와 진실을 밝히고자 벌이는 치열함 때문입니다.


 그가 고백하는 가면의 진실은 동성애적 취향이고 그의 동성애 뿌리는 유년기의 체험과 생활환경에 기인합니다. '이성애'라는 상식의 가면을 쓰고 사는 괴로움을 숱하게 토로하지만(순교하는 성자의 그림을 보며 피어오른 성적인 각성과 학창 시절 선망하던 동성 친구에 대한 집착과 질투,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와의 각별한 관계와 키스, 결혼 문제 등)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전기적 사실을 대조해 본다면, 그를 폐쇄적 성관념에 희생된 소수자로 이해하는 건 과한 듯 합니다.


 소설이 끝나고 부록으로 실린 평론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동성애 심리는 정치적 활동으로 자리를 옮겨 천황 숭배와 내셔널리즘 등으로 나름의 해소를 했다는 게 온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고백'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과 형식의 묘를 취하고 있지만 태평양 전쟁 이후 무조건 항복을 하기까지 한 세대를 관통하던 내일에의 허무와 병적인 낭만주의 등, 화자의 행보 곳곳에 스며든 일본 사회의 정신 풍경이 개인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그리 사소하지 않은 진실을 겨냥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가면? 위장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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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340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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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바슐라르'라는 태그를 써선 안될 것 같습니다. 개인의 필력을 벗어난 무의식의 책, 모두의 책, 우주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앞서 쓰여진 네 물질의 상상력 시학론들을 '몽상'으로 수렴하지만 거창하지 않습니다. 모든 시적 상상력과 휴식의 심리학에 분母가 되는 아니마의 몽상을 느리고 잔잔하게 써 내려갑니다. 써져서 씌여진 책이라는 게 온당할까요?


 장중한 대양에 흘러들기 전 책의 물줄기는 최후의 좁은 문에 이르고 그곳에서 제 소임의 문을 닫습니다.


 적어도 시학 연구로 쓴 바슐라르의 책은, 제가 알기로 가장 겸허한 철학서들입니다. 그는 랍비들이 신의 이름을  필사할 때마다 목욕재개하듯이 한 문장, 한 문장 쓰며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였을 것만 같습니다.


 덧- 제가 읽은 건 김현 번역의 홍성사 판입니다. 오래된 역본이라 알라딘엔 서지정보가 없네요. 그 탓에 별점은 하나를 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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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그레이트북스 10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김유동 옮김 / 한길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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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였던가요, 독서의 리듬을 말한 사람이. 저는 벤야민의 글 중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이 책을 순전히 리듬감으로 읽었습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지휘를 듣는 것처럼, 아주 빠르고 신나게 읽었습니다. 벤야민은 학술적 글에도 자기 속의 검은 담즙을 주제로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폭발시킵니다. 별이 뜹니다. 우주가 되고 별자리가 보입니다. 그가 서문에서 강조했듯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별자리 같은 책입니다.

 
 알레고리, 엠블럼, 슬픔, 폭군, 음모자 등등. 그가 선택한 17세기 바로크 비애극의 풀이어들은 20세기를 읽는 렌즈가 됩니다. 예술 형식으로 당대와 현재를 읽어내는 혜안, 앞서 말한 리듬감은 이 책을 수시로 읽을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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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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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으며 경제학은 필수 교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인간 머리 꼭대기에 있는 현실에 대한 처세가 아닙니다. 돈과 물질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을 기르는 중에 지성을 무릎 꿇리지 않으면서 가슴이 뜨거울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별 게 아닙니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인문’입니다. 경제학도 인문입니다. 수치와 그래프만 내세워 인간의 자리를 밀어내는 전문가들의 경제학은 경제학일 뿐입니다. 그건 사이비입니다.

 

 이 유고집이 내세우는 문제의 꼴은 한 단어로 ‘세계화’입니다. 저자 정운영 씨는 좌파 경제학자입니다. 제 모자란 깜냥으로 이 한 권의 정운영 씨를 평할 때 그는 균형잡힌 좌파입니다. 그는 당대(21세기 초) 진행됐고 지금도 이어온 세계화에 부정적이지만 그건 한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가치판단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글들이 저자의 판단을 강화하고 독자에게 전염시키고자 선별한 정치 팜플렛이 아닙니다. 정운영 씨는 좌파로 규정하기 전에 학자로 봐야 합니다. 그만한 양심을 지킬 줄 알아야 좌파, 우파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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