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 교양의 탄생 -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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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유적으로역사의 물길에 들어서 젖어 산다샛강이나 시냇물계곡 또는 급류일지언정 사람은 시간의 물기를 말릴 수도 털어낼 수도 없다역사를 다룬 모든 책은 몸에 묻은 물로 그린 그림이다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은 조선 근대사의 정신을 수립한 교양의 진실을 묻는다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많은 분량의 사실 문건들을 뒤지고 대조하며 해석의 칸을 채워간다조선 근대라 뭉뚱그려 부르곤 하는 우리네 과거의 정신 풍경은 명작’ 또는 물질로써 책(정확하게는 명작 전집)을 통해 어떻게 우리 안으로 기입됐고 유통됐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과거의 정신 풍경이라고 했지만 고정된 시간의 풍경이 아니다과거로부터의 정신 풍경이 정확하며 이 책은 역사의 기억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이것은 역사의 풍경인 동시에 현재의 자화상이다.


교양은 일상 언어 장에서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는 지식의 양을 재는 단위일 뿐인가이미 동의하는 바지만 교양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다교양은 정신적이고 신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의 총체로서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누군가를 일러 교양이 있네 없네 할 때의 말은 판단하는 수준으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사회를 이루고 사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성숙의 척도로 교양을 호명해 왔다는 것 자체엔 일말의 진실이 있다그것은 교양이 지성과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와 커뮤니티를 품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진실이다하지만 교양의 가치와 자리에 대해 최소한 동의했지만 복원되어야 할 지점들이 많다. “교양이란교양의 척도란사회가 개인을 시민으로 키어낼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이다. ‘학력과 자본에 비례해서 소장되거나 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같이 거주하는 이들의 감응하는 능력이라는데아직 갈 길이 멀다.


책은 매체이고 전통적으로 교양의 전유물이었다모든 책이 교양을 실어 나르는 데 유용한 것은 아니다흔히 일러 명작’, ‘걸작’,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벗하여 장수하고 쉬이 부서지지 않는 몸체를 갖춘 우람하고 듬직한 작품들이 교양의 퍼스트 클래스에 앉을 수 있었다그렇다면 명작은 좋은 책이어야 한다.아니, ‘좋은 책이 명작이다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세계문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책이라는 세속적 가치로 변용되었다. ‘명작이 제대로 된 길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음이라는 서구적 윤리학의 가치를 안고 있던 책들이 이라는 동양적 도덕의 가치에 호응하지 않고 매개돼 건너왔다그 사이에 명작은 가공됐고 오해됐다그 결과로 식민지 조선에 도착한 명작은 기호로 남게 된다.


기호라는 껍질로만 남은 명작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생활이 살갑게 굴 수 있는 것이 장소라면 전시적 가치와 모방적 값만 갖춘 명작은 백화점을 만들었을 뿐이다백화점에선 전시물을 함부로 만져선 안 된다.” 만질 수 없는 눈의 선망의식은 욕망을 부채질하고 매개체로만 들어온 명작은 경쟁에서 승리하고 부를 걸머지기 위한 매개체로써만 쓰인다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서재다. “지금도 그러하지만서재는 개인의 교양 정도를 대번에 드러낼 수 있는 가시적 공간이다.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뿐만 아니라어떻게 꽂혀 있고책상과 책장 등 서재 가구의 종류와 수준까지 개인의 수준과 취향을 드러내는 척도가 된다.” 서재는 죽은 책들에 기생한 욕망들의 밀실이었다하지만 적어도 이 땅의 역사에서 서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서재는 학교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서재와 서당이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일제강점기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충분하지 않아 각 마을에서는 재래의 서재를 이용해서 강습소로 바꾼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서재는 말 그대로 책을 갖추어두고 읽거나 쓰는 공간이지만근대에 이르러 책을 소장하는 개인적 공간으로 변모했서재는 공공성을 (잃어)버렸고 교양도 공공의 가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교양이자 교양을 담는 그릇인 책은 철저히 상품이 됐다공적 장소였던 서재가 사적 공간으로 변용된 것과 같이 개인이 탄생했다그런데 단자화된 개인들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존재 이전에 소비자였다책은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소유해야 할 것이 됐다자본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식민지 조선의 비극도 희석된다. “’전 조선 독자에 한하여 반가로서 제공키로 결정하였다라는 결정이 일본 거대 출판사의 독자 서비스로 제시되면서 조선인들이 독자로서 특별하게 취급받는다고 제공된환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대의보다 앞선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정언은 청소년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고문학전집에 농축된 서구 중심의 명작 계보가 도서목록을 조각한다. “우리는 당연하게 <일리아드> <신곡>을 시작하는 세계문학을 상상하는데과연 이러한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세계문학이 곧 서구 문학으로 동일시된 이 기억과 구성그리고 목록은 언제부터 고정된 것일까이런 의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 한결같이 세계문학전집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그만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 우리는 당연하게 <일리아드> <신곡>을 시작하는 세계문학을 상상하는데과연 이러한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세계문학이 곧 서구 문학으로 동일시된 이 기억과 구성그리고 목록은 언제부터 고정된 것일까이런 의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 한결같이 세계문학전집을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그만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말 그대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민족적인 공유 기억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말 그대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민족적인 공유 기억이 됐다.


다시자본은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국가도 활용한다일본이 대중잡지를 통해 반미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는 것이 그렇고조선의 민중에게는 생존의 논리로 다가가 민족의식에 불을 당겼다. “가난한 백성은 우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그러므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민족적 생존으로 이야기한다이는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민족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적용하면서 속물적 인간형을 양산해냈다.” 비극적 인식을 카테고리 한 뒤 메커니즘을 조립하고 가동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기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돌고 있다기계에 집중하는 응집력의 악순환은 국가의 무의식과 언어가 됐다그 앞에서 질문은어떻게 플러그를 뽑을 것인가?” ‘속물’ 교양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근대성의 풍경에서 어쩌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다.


질문은 한 사람이 시작하지만 그것이 멀어질수록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돼 버린다면 하릴없이 세다가 잊고 말 하늘의 별만큼도 안 된다두 개세 개의 소실점으로 분화되고 그만큼 폭과 깊이를 확장해 갈 때 질문은 타인에게 인지되고 의미 있게 존재한다질문은 다음 질문을 불러온다질문하는 타자들의 공동체는 질문과 질문 사이의 답들이 기하학적 수순으로 발전하는 입체들이 조형한 다층 공간 안에서 숨쉬고 있다. “책 자체가 아니라 독서하는 커뮤니티를 매개하는 것그것이 명작의 힘이 아닐까 싶다이미 우리 역사 안에서 그러한 가능성이 있었으며그렇게 책을 읽었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조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으로 가는 역사그 역사가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고 하는데질문들의 사이 장소는 이미-커뮤니티의 기억을 복원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박숙자 씨가 이 책 이후우리 역사 안에 이미 있었던 좋은 책의 역사를 연구하여 또 한 권의 책을 써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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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4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황현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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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의 실험"


 

 역사의 찡그림

 

 대도시에서 인간들이 맺게 되는 상호 관계들은〔∙∙∙∙∙∙〕청각 활동에 대한 시각 활동의 현저한 우위로 특징지어진다. 자유와 권리를 옹호햇던 자들은 나폴레옹 3세에게서 그가 자기 숙부로부터 계승하고자 했던 군인-황제가 아니라, 행운의 은총을 입은 고등 사기꾼을 보았다. (그의) 법은 풍자의 재능과 훈련을 갖춘 일군의 화가들을 일거에 정치로부터 몰아냈다. 포도주는 혜택 받지 못한 자들에게 미래의 복수와 지배의 꿈을 열어준다.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회에 대해 다소간 은근한 반항을 품은 채, 다소간 불안정한 새벽 여명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영웅의 근대성

 

 현대는 자살의 기표를 통해 유지될 수밖에 없다. 자살은 적대적 정신 상태에 추호도 굴하지 않는 어떤 영웅적 의지의 근저에서 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러한 자살은 포기가 아닌 일종의 영웅적 정념이다. 영웅은 “근대성”의 진정한 주체이다. 영웅적 풍모는 그들이 대중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 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거대한 대중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데 있다. 보들레르는 영웅으로서〔∙∙∙∙∙∙〕떨어져 나온다. 보들레르의 고대성은 로마의 고대성이다. 그리스의 고대는 그의 세계에서 단 한 군데에서만 나타난다. 그리스는 그가 보기에 현대로 옮겨질 수 있다고 여겨졌던 여성 영웅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위고의 몽상의 기원인 파국의 고고학적 시상은 보들레르를 진정으로 동요시킨 시상이 아니다. 그의 견해로는, 아테네 여신이 손상되지 않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듯이 고대성은 손상되지 않은 근대성에서 일거에 솟아 나와야 했다. 인간에게도 역시 위대함과 태평함이 서로 일치하는 어떤 특수한 별자리가 있다. 그 별자리가 보들레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그 별자리를 해독하고, 그것을 “근대성”이라고 불렀다. 그가 정박지의 배들을 침잠하여 바라볼 때, 이는 거기서 하나의 비유를 거두어들이기 위함이다. 보들레르는 고티에처럼 자기 시대가 유쾌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르콩트 드 릴처럼 실망할 수도 없었다. 그는 라마르틴이나 위고의 인도적 이상주의를 걸머쥘 수도 없었으며, 베를렌처럼 신앙심으로 도피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 확신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얼굴을 둘러썼다.


“발자크는 커피로 몸을 망친다. 뮈세는 앞생트로 바보가 되어간다.〔∙∙∙∙∙∙〕뮈르제르는 정신병원에서 죽어간다. 바로 이 순간의 보들레르처럼. 그런데 그 작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많은 알레고리를 되풀이하지만 그것을 위치시키는 언어 환경의 덕택으로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는 근대의 센세이션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즉 충격 체험 속에서의 아우라의 붕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에 동의한 데 대해 그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시이 법칙이다. 그의 시는 프랑스 제2제정기의 하늘에 “분위기 없는 하나의 별”로 떠 있다.『악의 꽃』은 산문적일 뿐만 아니라 도시적인 근원의 낱말들을 서정시에 사용한 최초의 책이다. 『악의 꽃』이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작품이 된 이유는 오히려 그 작품이, 동일한 위안이 무력해지고, 동일한 열정이 좌절되고, 또 동일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가운데서도, 조응이 축제를 벌이는 시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시들을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꽃들은 시의 손때를 입지 못해 그 생경한 빛이 눈에 거슬리는 신어들을 결코 피하지 않는다. 보들레르는 언어 그 자체와 음모를 꾸민다. 보들레르의 악마주의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보들레르에게 얼마 동안 비순응주의적 자세를 지킬 수 있도록 해준 단 하나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의견을 대부분 정언적(定言的) 형식으로 제시한다. 토론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내세운 앞뒤의 주장들 사이에 엄연한 모순이 있어 논쟁이 필요할 때조차도 토론을 피한다.


“도대체 왜 가난한 자들은 구걸을 하기 위해 장갑을 끼지 않는 것일까? 한 재산 모을 수 있을 텐데”〔∙∙∙∙∙∙〕“나는 ‘혁명 만세’를 부른다. ‘파괴 만세! 참회 만세! 순치 만세! 죽음 만세!’를 부르듯이. 나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형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혁명을 두 가지 방식으로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뼈 속에 매독균을 가지듯 혈관에 공화파의 정신을 지녔다."


 보들레르는 고독을 사랑했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그것을 원했다. 보들레르는 작가의 진정한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거리산보자로 시장에 간다. 그는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벌써 구매자를 찾는 것이다.

 

 

 발가락의 굳은 살

 

 만보(漫步)는 파사주가 없었더라면 그만한 위력을 얻기가 어려웠으리라. 거리산보자는 군중 속에 버려진 사람이다. 군중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거리산보자(Flaneur)의 가장 고유한 관심거리이다. 대도시 군중은 그들을 처음으로 목도한 사람들의 내면에 불안과 적의 그리고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는 자는 쾌락을 추구한다. 그는 개성을 지닌 사람처럼 한가롭게 걸어간다. 그는 또한 전문가들의 산업 활동에도 저항한다. 1840년경, 한동안은 파사주에서 거북이를 몰고 산보하는 것이 품위 있는 일이었다. 거리산보자는 거북이 걸음의 리듬을 따라가며 즐거워했다. 진보가 그 뒤를 따라갔더라면 이 걸음을 배웠으련만. 육체를 찾아 떠도는 혼처럼 그는 제가 원하는 때에 다른 사람의 인격 속에 들어간다. 거리산보자는 관찰에 자신을 집중할 수가 있다. 그러면 아마추어 탐정이 만들어진다. 거리산보자는 이렇게 자기 의향과는 반대로 탐정이 되지만, 그에게 이 변신은 사회적으로 시의적절하다. 이 변신이 그의 무위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태는 겉모습일 뿐이다. 그 나태 밑에는 악한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 한 관찰자의 경계가 숨어 있다. 탐정은 이렇게 자기 자의식에 제법 넓은 영역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대도시의 리듬 템포에 적합한 반응 형식들을 만들어낸다. 한 사람에게는 알레고리의 이상야릇한 집합장,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음모가의 신비로운 고물 잡동사니. 


 도시인의 사랑은 첫눈의 사랑이라기보다 마지막 눈의 사랑이다.



 간주


 시선에는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에게서 응답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내재해 있다. 이 기대가 응답되는 곳에서는 아우라의 경험이 충만하게 이루어진다. 대도시인의 눈이 위험에 대비하는 방어기능으로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 원천으로 투영되는 소망을 충족해주는 무엇인가가 그림 안에 들어 있다면 이 무엇은 바로 이 소망을 끊임없이 키워낸다. 사진을 그림과 분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사진과 그림 모두에 해당되는 포괄적인 ‘형상’ 원칙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이로써 분명해졌다. 지칠 줄 모르고 한 편의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진의 관계는 오히려 굶주림과 음식의 관계나 혹은 갈증과 음료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기억이라는 지문과 그 행간의 경험이라는 전통


 영화에 이르러서는 충격의 형식을 띤 지각이 일종의 형식적 원리가 되었다.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생산의 리듬을 규정하는 것이 영화에서는 수용 리듬의 근거가 된다. 질적인 시간의 인정과 양적인 시간의 측량을 합친 것이 달력이라는 작품인데, 달력에서 사람들은 기념 축제일이라는 이름으로 회상의 자리를 말하자면 비워두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주저하지 않고, 흘러가버린 것은 “이지(理智)적 능력이나 그 영향권 밖의 어떤 실제적 대상 안에” 있다고 요약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 그 대상을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끝내 만날 수 없을지, 그것은 우연에 속하는 일일 뿐이다.”우리가 원래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관조 대상의 주위로 모여두는 연상들을 그 대상의 아우라라고 부른다면, 그러한 관조 대상에서의 아우라는 사용 대상에서 연습으로 남게 되는 경험에 상응한다. 지난 19세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철학은 문명화된 대중의 규범화되고 변질된 일상적 삶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경험에 대항해 ‘참된’ 경험을 확보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행하고 있었다. 사실상 경험(Erfahrung)이라는 것은 집단생활이나 개인생활에서 모두 일종의 전통 문제이다. 경험은 기억(Erinnerung) 속에 엄격히 고정되어 있는 개별적 사실들에 의해 형성되는 산물이 아니라 종종 의식조차 되지 않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하나로 합쳐지는 종합적 기억(Gedachtnis)의 산물이다. 물론 이러한 기억을 역사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베르그송의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경험을 역사적으로 규정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거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문제의 경험에 근접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독자적 철학은 바로 그 경험에서 생겨났으며 특히 그 경험에 반하여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은 이것들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마련인 사적인 성격을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이 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주위의 외적 사실들을 자신의 경험에 동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신문은 그러한 감소 현상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독자의 경험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데 신문의 의도가 있었다면, 신문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며, 이러한 정반대의 의도는 달성되고 있다. 신문의 본질은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영역으로부터 제반 사건을 차단하는 데 있다. 베르그송의 말을 따를 것 같으면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인간의 영혼에서 없애주는 것은 지속(duree)의 현재화이다. 프루스트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이 믿음에서 그가 평생 과거의 것을 현재화하는 데 몰두할 수 있었던 어떤 명상의 상태가 생겨났다. 무의식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세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온갖 기억들로 가득 찬 과거의 것 말이다. 



 미래의 독자


 충격 체험이 규범이 되어버린 경험 속에서 어떻게 서정시가 자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러한 서정시엔 고도의 의식성이 기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그러한 시는 그것이 창작될 때 작용했던 어떤 계획을 상상하게 만들 것이다. 예전의 관계를 정보가 대체하고 그 정보를 다시 센세이션이 대체하는 과정 속에, 점차 위축되는 경험이 반영되고 있다. 이 모든 전달 형태들은 그 나름대로 이야기(Erzahlung) 형태와 구분된다. 이야기는 사건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보고자의 삶 속으로 침투시키는데, 그것은 그 사건을 듣는 청중에게 경험으로 함께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에 도공(陶工)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충격 방어의 본래 업적을 궁극적으로, 사건의 내용을 포기하는 대가로 의식 속에서 정확한 시간의 지점을 사건에 지정해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찰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일 것이다. 이 성찰이 사건을 하나의 체험으로 만들 것이다.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원칙적으로 즐거운 경악 내지는 (대부분) 불쾌한 경악이 나타날 텐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경악은 충격 방어의 결락(缺落)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들레르는 하나의 끔찍한 이미지 속에서 포착하였다. 서정시의 수용 조건이 열악해졌다면 그것은 서정시가 아주 예외적으로만 독자들의 경험과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력이나 집중력은 독자들의 강점이 아니다. 대신 그들은 감각적인 향락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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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은혜다 - 브레넌 매닝 회고록
브레넌 매닝 & 존 블레이스 지음, 양혜원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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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넌 매닝과 미로슬라브 볼프는 2012년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사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13년. 2012년에 '서문'(들)은 읽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발견' 운운했지만, 시기상조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거 제대로네."라는 탄성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헤비급 펀치로 가격하는 작가들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아, 그것이 '그리스도교'로 코드 분류된 책들에 한해서입니다. 한동안 기독교 서적 읽는 게 습관이고 즐거움이었는데, 시무룩해지는 시기가 찾아왔고 소장한 책들 중 처분한 대부분이 기독교 서적이었습니다. 많지도 않지만 신학서적은 대부분 남겼지만 신앙서적은 남을 주거나 헌책방에 팔아 버렸습니다. 지성으로의 후퇴. 지적 만족에 세운 나르시즘의 급자탑. 나만 알아주는 (어쩌면 하느님도) 자뻑의 신앙에 목매기. 현실과 문자의 괴리는 당연지사지만 특정 종교의 책은 말의 잔치로 그치고 말 전망이 농후한 것에 환멸을 느끼고, 신앙(도서)을 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닝은, 볼프는...... 한 사람은 풀 죽은 신앙을 소성케 했고 다른 사람은 굳어버린 신학의 환상에 금을 냈습니다.

 매닝은 랍비입니다. 은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질문하지만 답을 주지 않고, 해석하지만 교훈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아니고, 유대교가 아닌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매닝은 랍비입니다. 실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가 신뢰를 말하고, 감사와 영광, 거룩을 말할 때 저는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가갔지만 전에 없이 생경한 얼굴과 목소리를 만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매닝을 랍비라 말할 때, 저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이 히브리어를 배울 때 느낀 권위와 신비로움의 전율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서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선생"이라 부르며 뒤따르는 대목에서 우리는 랍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를 가둬두었던 장막을 찢고 언어를 그 안에서 끄집어 내 현실에서 살게 하는 것. 언어가 우리와 동등하게 숨쉬게 만드는 일. 매닝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어를 육화시켜 버리는 선생입니다.

 하지만 매닝은 저의 명명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랑아'라고 부릅니다. 부랑아 매닝은 은혜의 원풍경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는 회고록치고 가볍습니다(분량으로다 내용으로나). 그렇지만 책의 왜소함이 은혜에 압도된 매닝의 자아상이라고 생각해보면 책의 가벼움이 곧 은혜의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들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아바와의 만남이 있"고 나서도 그는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외로움과 실패로 두드려 맞아 멍들었기 때문이고낙심하고 불안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예수님에게서 눈을 뗐기 때문이다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나를 천사로 변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수술대에 마취된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 인간이란 속수무책인가요? 맞습니다. 저도 속수무책의 인간이고 이런 저를 비롯한 "사람만이 절망"인데 은혜의 불가해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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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믿음의 길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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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넌 매닝과 미로슬라브 볼프는 2012년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사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13년. 2012년에 '서문'(들)은 읽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발견' 운운했지만, 시기상조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거 제대로네."라는 탄성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헤비급 펀치로 가격하는 작가들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아, 그것이 '그리스도교'로 코드 분류된 책들에 한해서입니다. 한동안 기독교 서적 읽는 게 습관이고 즐거움이었는데, 시무룩해지는 시기가 찾아왔고 소장한 책들 중 처분한 대부분이 기독교 서적이었습니다. 많지도 않지만 신학서적은 대부분 남겼지만 신앙서적은 남을 주거나 헌책방에 팔아 버렸습니다. 지성으로의 후퇴. 지적 만족에 세운 나르시즘의 급자탑. 나만 알아주는 (어쩌면 하느님도) 자뻑의 신앙에 목매기. 현실과 문자의 괴리는 당연지사지만 특정 종교의 책은 말의 잔치로 그치고 말 전망이 농후한 것에 환멸을 느끼고, 신앙(도서)을 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닝은, 볼프는...... 한 사람은 풀 죽은 신앙을 소성케 했고 다른 사람은 굳어버린 신학의 환상에 금을 냈습니다.

 매닝은 랍비입니다. 은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질문하지만 답을 주지 않고, 해석하지만 교훈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아니고, 유대교가 아닌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매닝은 랍비입니다. 실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가 신뢰를 말하고, 감사와 영광, 거룩을 말할 때 저는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가갔지만 전에 없이 생경한 얼굴과 목소리를 만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매닝을 랍비라 말할 때, 저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이 히브리어를 배울 때 느낀 권위와 신비로움의 전율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서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선생"이라 부르며 뒤따르는 대목에서 우리는 랍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를 가둬두었던 장막을 찢고 언어를 그 안에서 끄집어 내 현실에서 살게 하는 것. 언어가 우리와 동등하게 숨쉬게 만드는 일. 매닝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어를 육화시켜 버리는 선생입니다.

 하지만 매닝은 저의 명명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랑아'라고 부릅니다. 부랑아 매닝은 은혜의 원풍경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는 회고록치고 가볍습니다(분량으로다 내용으로나). 그렇지만 책의 왜소함이 은혜에 압도된 매닝의 자아상이라고 생각해보면 책의 가벼움이 곧 은혜의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들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아바와의 만남이 있"고 나서도 그는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외로움과 실패로 두드려 맞아 멍들었기 때문이고낙심하고 불안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예수님에게서 눈을 뗐기 때문이다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나를 천사로 변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수술대에 마취된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 인간이란 속수무책인가요? 맞습니다. 저도 속수무책의 인간이고 이런 저를 비롯한 "사람만이 절망"인데 은혜의 불가해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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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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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실패하며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는 나로호 발사 준비가 정부 입장에서야 별스럽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드렁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저는 국가 간 경쟁에 냉소적이기도 하거니와 저 광막한 공간에 무언가를 쏘아 올린다는 것의 의미가 그다지 범우주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도 봅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는 그것이 한낱 치졸한 경쟁심리로 불 붙는 것이라고 해도 모두가 눈 여겨 봐야 하며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학과 물리학 등으로 원리를 조밀하게 펴 보일 때는 두 줄도 집중하기가 힘들더군요. 하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 지식을 쥐어짜내며 저자의 글발을 따라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밤하늘을 봐도 별 하나 보기가 힘들만큼 내 눈은 어둡지만 항상 그 자리에 드리우고 있던 허공을 이제는 경이로 보게 됩니다. 탄소 원자에서 시작된 우연의 음악이 수백 억년을 흘러와 존재의 신비를 연주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언어로 직조된 한 뭉치의 정보일 뿐인데도 그 어떤 노작의 예술품 못지않게 감동입니다.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과학 정신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지와 악덕에 대한 탄식을 드러내며 윤리적인 답변들까지 제공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비겁함의 소유자”들이 “1,000년이나 지속된 암흑 시대라는 혼수상태”를 만들고 “인구가 100만이나 되던 고도의 문명 사회를 지구상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런 역사 위에서 우리는 두세 걸음이 아니라 10보, 100보 후퇴했다 한두 발 앞으로 나아가곤 했습니다. 저자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고 아름답게 논해 보이지만 거기에만 매여 지구 상의 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 인류는 지적 생물과의 교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와 같이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지적 생물과의 교신부터 먼저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일갈합니다. 아래와 같은 통찰은 과학 정신이 올바로 서 있을 때, 가장 윤리적이고 지혜롭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과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보급판, 620~621쪽)

 이쯤 되면 우주적 정신의 핵은 ‘관용’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20세기에 관용에 몰두했던 문필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작(이자 미완성)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뭉테뉴>(안인희 옮김, 유유)서 아무 구절이나 끄집어내 대조해보면 교학상장하여 한 길로 이어지는 지성의 흐느낌과 가느다란 희망이 좀 더 밝게 타오르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 삶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고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 우리의 평화, 독립, 타고난 권리 등 이 광신도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겨우 열 명 남짓한 인간들의 광증에 제물로 바쳐진 시대에, 시대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든 문제는 단 한 가지로 집중된다. 곧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온갖 위협과 위험에 맞서, 서로 다투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 한가운데서 어떻게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 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32쪽)

 
  - <위로하는 정신>. 츠바이크의 문장력은 여전하고 재미도 있지만, 분량 상 김이 새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차라리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아롬미디어)이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바오)를 추천합니다. 아! <코스모스>와 함께라면 <광기와 우연의 역사>(휴머니스트)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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