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믿음의 길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브레넌 매닝과 미로슬라브 볼프는 2012년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사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13년. 2012년에 '서문'(들)은 읽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발견' 운운했지만, 시기상조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거 제대로네."라는 탄성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헤비급 펀치로 가격하는 작가들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아, 그것이 '그리스도교'로 코드 분류된 책들에 한해서입니다. 한동안 기독교 서적 읽는 게 습관이고 즐거움이었는데, 시무룩해지는 시기가 찾아왔고 소장한 책들 중 처분한 대부분이 기독교 서적이었습니다. 많지도 않지만 신학서적은 대부분 남겼지만 신앙서적은 남을 주거나 헌책방에 팔아 버렸습니다. 지성으로의 후퇴. 지적 만족에 세운 나르시즘의 급자탑. 나만 알아주는 (어쩌면 하느님도) 자뻑의 신앙에 목매기. 현실과 문자의 괴리는 당연지사지만 특정 종교의 책은 말의 잔치로 그치고 말 전망이 농후한 것에 환멸을 느끼고, 신앙(도서)을 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닝은, 볼프는...... 한 사람은 풀 죽은 신앙을 소성케 했고 다른 사람은 굳어버린 신학의 환상에 금을 냈습니다.

 매닝은 랍비입니다. 은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질문하지만 답을 주지 않고, 해석하지만 교훈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아니고, 유대교가 아닌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매닝은 랍비입니다. 실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가 신뢰를 말하고, 감사와 영광, 거룩을 말할 때 저는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가갔지만 전에 없이 생경한 얼굴과 목소리를 만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매닝을 랍비라 말할 때, 저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이 히브리어를 배울 때 느낀 권위와 신비로움의 전율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서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선생"이라 부르며 뒤따르는 대목에서 우리는 랍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를 가둬두었던 장막을 찢고 언어를 그 안에서 끄집어 내 현실에서 살게 하는 것. 언어가 우리와 동등하게 숨쉬게 만드는 일. 매닝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어를 육화시켜 버리는 선생입니다.

 하지만 매닝은 저의 명명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랑아'라고 부릅니다. 부랑아 매닝은 은혜의 원풍경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는 회고록치고 가볍습니다(분량으로다 내용으로나). 그렇지만 책의 왜소함이 은혜에 압도된 매닝의 자아상이라고 생각해보면 책의 가벼움이 곧 은혜의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들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아바와의 만남이 있"고 나서도 그는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외로움과 실패로 두드려 맞아 멍들었기 때문이고낙심하고 불안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예수님에게서 눈을 뗐기 때문이다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나를 천사로 변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수술대에 마취된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 인간이란 속수무책인가요? 맞습니다. 저도 속수무책의 인간이고 이런 저를 비롯한 "사람만이 절망"인데 은혜의 불가해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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