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인가 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연령별 특성을 개인적 특질로 오해한다,는 얘기가 뇌리에 와 박혔다. 나이가 들어가니 정말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연령과 비슷한 사람이 기실 스무 살의 어처구니 없었던 내 자신보다 더 지금의 나와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십 대의 나, 이십 대의 나, 삼십 대의 나를 한 공간에 다 불러모은다면 서로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언쟁만 벌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만으로 웃음이 나온다. 


동양의 유교 문화권, 특히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흔히 서열과 관계의 역학을 규정한다. 통성명 후에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나이에 관한 질문이다. 그것은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애초에 관계의 한계나 성격을 단정짓고 불확실성에서 벗어나려는 체득된 본능기기도 하다. 나보다 나이가 너무 적거나 지나치게 많으면 일단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많이 살아서 혹은 너무 적게 살아서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지대가 있다고 단정짓고 시작하는 관계가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할머니와 젊은이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프로에서 아들뻘의 젊은이들과 낯선 곳을 여행하는 영국 할아버지의 모습은 신선했다. 그는 시중을 받으려 하거나 습관화된 권위나 잔소리 대신 같이 맥주를 들이키며 세대를 뛰어넘는 농담이 몰고 온 유쾌한 분위기에 젖어 보는 이를 절로 웃게 만들었다. 어떤 틀은 쉽지만 결국 그 안에 고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사각지대를 반드시 품고 있다. 


모모요는 무레 요코의 외할머니다. 아흔이 훌쩍 넘었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거나 삶의 경험을 뭉근히 녹인 너그러움의 화신은 아니다. 오히려 빈 말은 하지 못해 자신에게 소용이 없는 선물에는 쿨하게 인사를 생략하기도 한다. 할 수 없거나 모자란 부분은 젊은 세대에게 확실히 양보하거나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증손자의 버릇 없어 보이는 행동에 잔소리 대신 몸으로 받아주며 함께 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오히려 모모요는 항상 어떤 예상이나 기대를 뛰어넘는 의외성으로 가족들을 걱정케 한다. 뻔하거나 예상되는 경로에 이 귀여운 할머니는 없다. 담담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무레 요코의 그 잔잔한 색깔은 그녀의 할머니의 역동적인 하루 하루를 부드럽게 감침질한다.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는 좀 심심하지만 빠져나오고 싶어지지 않는 그 무엇에서 술술 풀려나온다.















모모요의 잔잔하지만 침잠하지 않는 나이듦의 일상이 부럽다. 그것은 결국 수많은 곡절과 삶의 위기를 통과하고 나온 자의 자존감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발명광 남편이 급작스럽게 죽고 남겨진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혼자 건사해야 했던 혹독한 나날들이 있었다. 산만큼 큰 숙제를 통과하고 나면 그런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늙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거다. 아직 아흔 살밖에 안된 모모요 같은 할머니와 동물원 구경을 함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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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21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과 친해져도 항상 대화를 할 때 높임말을 써요. 그걸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서로 친한 사이라면 연장자인 제가 상대방에게 동생처럼 대해도 된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만나면 웃어른 모시듯이 대합니다.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예의를 지키려고 해요. 그러면 서로를 존중하게 되고 나이 차가 있어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

blanca 2018-02-22 03:18   좋아요 0 | URL
우리 말에는 경어가 있고 그게 사람 간의 거리와 속도 완급을 조절하는 기능을 해 주는 것 같아요. 오히려 동년배나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 경어를 쓰면 섣불리 조언하거나 잔소리를 해서 멀어지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