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냄새가 있다. 약간의 비릿함, 적당한 음습함, 향내는 아닌데 달콤한 어떤 전조. 그 냄새는 비를 몰고 온다. 그 냄새만 의식하게 되면 나는 다시 여섯 살이 된다. 왜 그렇게 혼자 비를 맞았는지. 그 비를 맞으며 묘한 행복감에 젖었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흠뻑 비를 맞고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수건으로 비를 닦아주던 기억에 불쾌한 느낌은 섞여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시간인 듯하다. 나를 만들고 나를 통과하고 마침내 나를 없애버릴 시간.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하고 눈부시게 형상화한 이야기로 이것을 능가할 것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번역되는 순서와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 읽을 수 있을까? 거의 삼천 페이지에 달한다는 이 방대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결국 가장 보편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사실 현 시점에서 어느 누가 벨 에포크 시대의 귀족 살롱에 드나들며 그들의 속물적인 대화와 심리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겠나, 싶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신기하다. 그들 모두에 '내'가 들어있다. 프루스트는 그래서 프루스트다. 그의 삶 자체가 그리 다이나믹하거나 공적인 영역을 종횡무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한계에 봉착할 것도 같은데 그는 마침내 제한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시간의 단층들로 해체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느끼다 다시 재조립해 죽음을 넘어서는 찰나의 영원성을 포착해냈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중독성을 가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 안에 푹 젖어서 내가 잃어버렸던 그 모든 어떤 그리움의 요소들을 놀랍게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넣어 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결국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과 섞인다.





프루스트를 읽기에 좋은 계절이 있을까? 사실 여름보다는 실내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겨울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딱히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그 삶의 시간성이 어떤 계절성에 머무를 것 같지도 않다. 프랑스의 작가, 교수 등 여덟 명 각자가 이야기하는 프루스트는 묘하게 겹치고 어긋나고 확장되고 사라지다 다시 읽는 사람의 내면으로 점프하듯 뛰어들어온다. 각자가 좋아하는 구절, 대목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를 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와 한결 맑아진 눈으로 바로 자신의 인생, 삶, 그것의 종결을 바라보는 확장된 지평을 제공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들어간 와중에도 나온 후에도 이 책은 따뜻하고 유쾌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이다.








인생의 대원리, 의미를 확언할 수 있는 지점이 과연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힘들게 담금질하는 것이 유의미할까? 이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의 결이 훑고 지나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 길은 괴롭고도 고독하다. 프루스트가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그가 했던 고민들이 시간의 결 속에서 어떤 마침표를 찍는지를 그의 고통스럽도록 예민한 목소리로 듣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시간도 지나간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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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 0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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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0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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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5 1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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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5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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