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 존 버거 <자화상> 중 -Axt
처음에는 잘못 읽은 줄 알고 드러누웠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존 버거였다. 그는 구십이 되었고 여기에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여기에서 나간 세상에서는 결국 한 세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었다. 평균적인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놓고 본다면 역시 짧다. 나는 존 버거를 알지 못한다. Axt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를 번역한 번역가 김현우는 전업 번역가가 아니지만 그에게 존 버거는 각별하다. 때로 전체 안에서의 비율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보면 오해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번역가의 본질에 그 자신이 사랑하고 경외를 느낀 작품과 작가가 오롯이 자리잡은 느낌이 영롱하다. 실제 존 버거를 대면하고 자신이 그를 번역한 시간의 의미와 의의를 술회한 대목에서 이러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팔십 년간 글을 쓴 작가와 그러한 그의 언어 뒤편에 놓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본질까지 짐작하며 다른 언어로 성실히 열정적으로 옮겨 놓은 그가 어우러져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을 완성해 낸다.
내처 존 버거와 틸다 스윈튼이 함께 찍은 <사계>라는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게 되었다. <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 or John Berger>다. 배우 틸다 스윈튼을 포함한 네 명의 감독이 존 버거가 사는 프랑스령 알프스의 작은 마을 퀸시에 가서 찍은 다큐다. 이것은 존 버거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존 버거는 하나의 구심체로서 역할하며 더 크고 깊은 차원의 경지까지 이야기를 확대한다.
영화배우 틸타 스윈튼은 존 버거와 서른네 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생일이 같고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와 존 버거의 대화는 담백한 울림이 있다. 둘 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그 추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하지 못한 그 사라져 버린 숱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을 아쉬워할 뿐이다. 틸다 스윈튼의 아버지는 다리를 잃었다. 그는 한 다리로 네 남매를 키웠다. 담담하게 그러한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러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존 버거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는 흔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노인과 그 이야기에 심드렁한 젊은이의 풍경을 본다. 존 버거는 듣는 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고 고백했던 이야기처럼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다. 이 다큐는 존 버거의 것이라기보다는 존 버거와 함께 함으로써 나오는 생명의 순환,자연의 리듬, 노동, 죽음을 둘러싼 모두의 진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 듣고 말하는 이야기, 틸다 스윈튼의 쌍둥이 남매가 존 버거의 아들 이브와 함께 하는 장면 등은 서사는 억지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삶 그체에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 서사가 교차할 때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메시지가 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https://youtu.be/d8dUvpL726Y
"연대가 중요한 것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다."라는 존 버거의 이야기가 여기 이곳에 날아와 꽂힌다. 말하고 듣고 연대하는 지점은 언제나 영원히 중요하지만 힘든 여기일수록 더욱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