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읽다 말다 결국 못 읽고 말았다. 우연히 다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어릴 때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의 참상 아래 가족들의 생존기가 이제 한 문장, 한 문장 다 절절하게 와닿았다. 차마 읽는 즐거움을 논하기도 미안할 만한 그 버석거리는 이념 밑에 놓인 사는 문제들의 묘사가 형형하다. 우리 말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노련한 손맛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맞춤한 시간의 골이 있는 듯하다. 너무 이르면 안 만나느니 못하다.

 

 

 

 

 

 

 

 

 

 

 

 

 

 

 

 

거꾸로 다시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는 중이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자연과 어우러진 찬란한 작가의 유년시절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이게 과연 어떤 느낌인지 나는 영 알 길이 없다.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 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 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 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 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 자주색 점이 박힌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뒷 이야기를 미리 알고 읽는 과거의 아름다운 찰나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아련하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우등생에 의젓한 박완서의 오빠는 후에 전쟁 중 부상을 겪고 힘겹게 투병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 놓은 채 무력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늦게서야 태어난 첫 사촌 여동생 명서의 구슬 같은 모습에 어른들이 흥겨워하는 모습도 후에 명서의 죽음으로 갑절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그 당시로서도 남다른 학구열로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엄마를 따라 서울로 왔다 방학 때면 안식처로 자리했던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은 분단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 될 것이다.

 

가끔 예전의 사진들 속 모습을 보면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 시간의 구획에 갖혀 지냈던 모습들에 아연해지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생로병사를 떠안고 흐르는 시간의 무게 아래 묻히지 않을 것이 없다. 이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살아서 자신의 유년과 청년기를 회고했던 작가 또한 이미 고인이 된 터이다. 화자는 떠났다.

 

너무 예쁜 벚꽃이 이제는 자주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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