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찾아갔던 계룡산 마음수련원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버리라고 했다. 나를 버리라는 게 그 단체가 가르치는 명상법의 핵심이었다. 나를 버리고, 버리고 있는 나도 버리고, 심지어는 나를 죽여버려라. 그래서 거기서 수련하는 원생들은 밤마다 다함께 복창했다. "죽어라! 죽어라! 다 죽어라!" 누가 봤으면 밀교 집단의 섬뜩한 주문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개체로서의, 현상으로서의 나를 초월하기 위한 우스꽝스럽고도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라고 했던 자가, 그러니까 그런 획기적인 명상법을 창시했던 자가, 정작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후에는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엄청난 '나'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하라지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했던 것과 놀라울 만큼 흡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개념어와 전달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이고 논리적이라면, 마하라지는 은유적이고 시적이다. 글이라는 것이 본래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거라면, 각각의 방식 모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볼 때 저마다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실체’라든가 마하라지가 말하는 ‘절대’에 대해 단지 그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없는 경이와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일시적이고 간접적으로 우주의 본성을 가늠해보는 이런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내 수준에서는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다 할지라도 결코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도취된, 잠시 고양된 마음 상태일 뿐이다. 너무나 사소한, 개체의 한 현상이다. 

독서라는 활동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일인데, 과연 그런 것이 개념으로 이해될 만한 영역인가. 진정한 인식은 오로지 지난한 명상 수행을 통한 직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굉장히 내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 만큼은 글을 읽고 머리를 굴려서 이해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도 고객님을 사랑한다. 간이랑 쓸개도 내어준 지 오래다. 바로 그 이유로 어제는 고객님의 아들과 선도 아니고 소개팅도 아닌 이상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시대가 고객님을 사랑하는 시대라지만 고객님의 아들까지 사랑할 수는 없지 않나. 야근하는 기분으로 조신하게 앉아있는 내내 이제는 내가 별 걸 다하는구나 싶었다. 정자세가 아니라 거나한 자세로 술을 한 잔 더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귀가하는 길에 동생을 불러내었다. 
 
술을 먹으면 왜 느닷없이 옛날 생각이 날까.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봄소풍을 가서 쌍절곤을 뺏긴 적이 있다. 엄마가 소풍간다고 특별히 준 용돈을 전부 털어서 산 쌍절곤이었는데 어느 심술궂은 놈이 동생을 협박해서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십 년도 지난 그 일이 어제 갑자기 떠올랐다. 야 그때 너한테서 쌍절곤 뺏어간 놈... 아 그 나쁜 새끼... 나 그때... 진짜 화났었다... 쌍절곤 뺏어간 놈... 아... 씨... 그 씨발롬... 야 그때 내가 그 놈 데려오라고 했었잖아... 내가 패준다고... 근데 지금 생각해도 또 화가 나... 왜 남의 쌍절곤을 뺏어가냐고...     

술을 먹으면 느닷없이 시도 생각난다. 야... 너 찬기파랑가 알지... 그게 그런 내용 아니냐... 같은 가지에 나서도 가을바람 불면 여기 저기 다른 곳에 떨어진다고... 한 가지에 나도 가는 곳이 다 다르다고... 야 그러니까... 너나 나나 그렇다는 거 아녀... 그게 왜 이렇게 슬프냐... 그런데 오늘 아침에 술 깨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이없게도 그건 찬기파랑가가 아니라 제망매가였다. 어차피 동생은 술주정인 줄 알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가노라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질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제주도 여행을 떠올려 보면 비행기 타본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본 나로서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풍경이 실로 오금이 저리는 비현실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착륙하는 순간까지 창유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신문물에 전율하던 구한말 개화파들의 심정도 이보다 더 강렬하지는 못했으리라.

기내에서 이토록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승객은 (내가 봐도) 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손에 땀을 쥐며 노심초사하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을 보거나 심지어는 아예 창을 닫아놓고 잠을 자고 있더라. 우주의 신비가 목전에서 펼쳐지는데 저토록 태연하다니 저들은 대체 비행기를 얼마나 밥 먹듯이 탄 사람들이란 말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에도 비행기는 창공을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아니, 우아하다 못해 그것은 심지어 약간은 게으른 편이었다. 창밖으로는 그 어떤 물체도 휙휙 지나가지 않았다. 몽글몽글한 구름 덩어리들과 장난감 같은 도시들, 주름진 산맥까지도 비행기 못지않게 우아해서 그저 서서히 자리를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내도 별 움직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천 미터 상공에서 시속 몇 백 킬로로 날고 있는 물체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치고는 다들 너무나 태평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정체된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벌써 제주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비행기를 타는 동안 나는 잠시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가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인간보다 더 장수하는 것들, 이를테면 나무나 암석의 시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간접 체험한 기분이었달까. 허풍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간접 체험을 통해 나는 작게는 하루살이의 시간과 크게는 성운의 시간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신이라고 말하는 무시간성의 존재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도무지 비행기 따위에는 견줄 수도 없이, 지극히 빠르고 또한 지극히 느릴 그 존재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만물의 부단한 생멸이 어떻게 그려질까?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나는 기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과도하게 흥분한 승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얼마나 정적인 상태로 있었는지. 얼마나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아, 이 글을 쓰고 있으려니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 돌 속에서 흐르는 것만 같던 그 오묘한 시간을 또 다시 느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문숙의 자연 치유 - 진정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자연건강식과 치유식, 요가, 명상
문숙 지음 / 이미지박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권장하는 글이 지나치게 화려한 편집 디자인을 거치는 바람에 다소 부조리한 책이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감동을 주는 글이다. 산문이나 수필이 글쓴이의 삶을 얼마나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장르의 글 역시도 삶에 대한 일종의 훼이크 같은 거 아닐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글은 많은 경우 삶을 윤색하거나 아니면 결정적인 곳에서 기만하고 심지어는 배반한다. 장르가 어찌 되었든 글은 그저 그 자체로 독자적일 뿐이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생각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선 그래도 글에서 풍기는 향 만큼은 예외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담백하고 소박한 식사, 명상과 산책 정도는 하와이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활동이겠다. 건어물녀 생활을 이제 그만 청산하고자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강한 의욕을 심어주는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optrash 2010-09-2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지 않았지만, 자기 삶을 전시하는 글의 가장 윤리적인 방식은 위악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수양 2010-09-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잘 모르겠지만 다만 위악적인 글이 흔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