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으로 읽는 미술 - 미학 강의 Α부터 Ω까지
오병남 외 지음 / 월간미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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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체의 예술표현론에 따르면 예술은 표현이고 표현은 곧 직관이다. 직관되기 이전의 것이란 정신에 의해 파악되기 전 단계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저 혼연하고 수동적인 인상일 뿐이다. 여기에 우리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명료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직관이므로, 그것을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 측면에서 부를 때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표현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p.33) 

콜링우드는 크로체보다 더 과격한(?) 입장으로 나아간다. 어떤 것이든 정서유발과 같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기술이나 기능이며 따라서 오락이나 주술은 될 수 있어도 예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상상력에 의한 자발적인 내적 이미지의 생성’ 그 자체다. 크로체나 콜링우드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로지 직관적인 영상이나 기호 혹은 형상에 가까운 그림 따위만 예술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웃음을 자아내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한갓 저열한 오락물이며, 환희와 외경심을 자아내는 파르마 대성당의 둥근 천장 벽화는 열혈 신도들에게 천상의 판타지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일 뿐이란 말인가? 오로지 태극 무늬나 에셔의 기하학적 그림들이나 주역 64괘의 규칙적인 배열 따위만이 예술이란 말인가? 저자는 이러한 직관론자들의 주장이 미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매우 ‘반(反)직관적인’ 결론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재치있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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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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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저자는 예배의 목적과 기능이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중심에서 피안을 발견한다고 하는 점, 즉 세속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교종에 가까운 입장이고 우파니샤드로 보면 라마누자에 가까운 입장인 듯하다. 

6장에서는 기존의 율법주의적 윤리관(=초자연주의적 윤리관, 예를 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등, 그리스도 교리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생활규범)의 허구를 지적하고 있다. 율법주의 윤리가 ①종교적 근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②예수의 교훈을 깊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도덕계율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비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랑’에 의거한 상황윤리를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 (...)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 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윤리’이다.”(p.151) 

7장 부분- 헉슬리를 중심으로 말하는 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는 ①진화론적 인본주의이며 ②계시가 없고 ③신이 곧 사랑이며(사랑이 곧 신이 아니라) ④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등을 특질로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p.167 하단~p.168 상단까지가 반박 부분인데 이해가 잘 안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구절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까뮈가 비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 즉 극도의 형이상학적인 우주 이해를 말하는 건가? 인본주의자인 헉슬리는 이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다.)  

한편, 초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 이해와 관해서 저자는, 영상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이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 영상들 자체가 아니면 실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 이것들은 우상이 된다고 경계한다. 상징이나 이미지, 영상들이 실재를 중개하는 대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게 될 때 위험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 3의 길(내재신성론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인 그 길)이 자칫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신화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그것이 결코 신화와 상징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신화나 초세계를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불신앙의 근거가 될 위험성을 가진 그러한 신화에 우리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p.172) 

저자는 우상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사색의 훈련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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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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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숭고하게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신 개념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인격신 개념은 전통적인 대중의 신학이 말하는 신이며, 유아적인 사고수준이 만들어낸 추상 개념일 뿐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듯, 정신이 성숙한 인류도 이제는 빅브라더로서의 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 저자는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기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파울 탈리히의 말을 인용하여 ‘신이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저 밖에 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이라고 하면서, '우리 삶의 깊이와 존재의 기반'이 곧 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유신론- 각종 존재들을 주재하고 만물의 운행에 개입하는 피안의 절대자로서의 신, 과학시대 이전의 신화적 개념, 이해 안 되는 자연 현상들을 얼렁뚱땅 이해하기 위해서 도입한 임기응변의 신, '이원론적 초자연주의' 
  • 반신론- 일부 실존주의자들의 견해, 포이에르바흐와 프로이트(신을 인간의 가장 심오하고 심층적이고 원숙한 정신영역의 '투사물' 내지는 '반영물'로 봄), 헉슬리("신이 저 밖에 참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하며, 신이라는 것은 진화의 과정 변두리에 생겨난 현상에 불과하다. 참된 종교는 자기 의식이라고 하는 더 높은 형태로 발전하는 진화의 과정과 자기 자신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신론이 동양사상의 범신론과는 함께 엮이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이 책에서는 반신론과 범신론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일원론적 자연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두 이론 모두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세계를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저자는 하나의 우상을 헐어버렸다는 점에서 초자연주의에 대한 자연주의의 비판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것들,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비감, 실존의 근원적 의미 파악 같은 것들'까지도 말살해버렸기 때문에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의 깊이, 영원의 번쩍임,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의 심판, 무조건적인 것과 신비스런 것과 황홀한 것에 대한 의식,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자연주의적 범주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p.70)" 따라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모두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초월적 신 존재를 부정하는 반신론자들의 도전에 맞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존속해야 할 어떤 이유와 가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나온 이론이 '신성내재론'(딱히 무슨 이론이라고 나오지 않아 자의로 명명함)이다. 저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 안에 있으며 삶의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다. 존재 전체의 궁극적 깊이,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이때의 신은, 실체로서의 존재 여부를 관건으로 하지 않는다. 이 때의 신은 그저 어떠한 '속성'이고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맑밥님이 말씀한 '종교성'이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아닐까 한다. 물론 더 자세한 것은 오쇼를 읽어봐야 알겠지만) 

신성내재론(?)의 신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약 정리하면 되려 왜곡만 시킬 것 같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신의 문제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깊이가 실재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환상이냐 하는 문제이지, 저 푸른 하늘 저쪽 아니면 다른 어디에 어떤 '존재'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 즉 우리에게서 궁극적 실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이 초월해 있다는 것은 신적인 대상들이 있는 어떤 '초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유한의 세계가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을 넘어선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초월해 있는 것이다. (...)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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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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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파괴의 메커니즘 소비사회는 ‘생산-소비’ 가 아니라 ‘생산-파괴’의 메커니즘이다. 체계는 생산성의 타산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를 기획한다. 파괴는 전략적 목적을 지니고 사회의 지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성장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한다 사회의 성장이 평등을 만들어내느냐 불평등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성장 자체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량으로서는 보다 많은 소득과 재화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지만(그래서 복지와 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착각되지만), 경제성장의 중심 자체에 확립되는 것은 ‘왜곡의 과정’이며, 성장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이 ‘왜곡비율’이다.  

체계는 성장을 활용한다 체계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양면적인 것(부와 빈곤, 충족과 불만족, 진보와 공해)을 동시에 산출해내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다. 양극은 항상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체계는 불균형과 구조적 궁핍에 의해 생존한다. 성장이 불평등에 의존하므로, 체계에게는 '성장'이야말로 최적의 생존 수단이다. 성장은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주의적 원칙'을 증명하는 듯 보이면서도(사실, 실제로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일종의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면에서는 '특권 및 지배질서 유지' 기능을 수행하여 체계의 양면성을 강화시킨다.  

소비 과정 소비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1)코드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2)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 (2)의 경우에는 재화가 ‘차이표시기호’로 작용한다. 하나의 차이표시기호는 다른 기호들을 무한하게 지시하므로 (2)의 소비는 자가증식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때 언제나 혁신은 정상(최상류층)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전의 차이표시기호가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회적 거리를 복원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류는 언제나 하류와 차이를 두기 위해 새로운 욕구를 생산해내고, 이러한 욕구가 도미노처럼 상부에서 하부로 끊임없이 '대류'한다.  

체계의 요소로서의 욕구 소비사회의 욕구는 향유나 만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욕구는 '체계의 요소'로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개인과 사물의 관계'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산업사회에서 노동력이 노동자-노동산물의 관계와 무관하고, 교환가치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교환과 무관한 것처럼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는 '욕구'가 그렇다. 욕구는 체계 유지와 존속을 위한 조직적인 요소이다. 욕구는 재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나 위세, 명예 등 상징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사물은 더 이상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관련이 없다. 사물은 이제 전혀 다른 것에 대응한다.  

욕구의 정신분석학적 접근 욕구는 사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는 하나의 팔루스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를 거닐고, 미끄러지고, 전이된다. “어느 한 기표로부터 다른 기표로의 이러한 도주는 결핍에 근거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표층적 현실에 불과하며, 또한 바로 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는 사물 및 욕구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표출되는 것이다.“ 

사회 통제 수단으로서의 소비 소비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며, 강제이고, 도덕이며, 제도이고, 사회화의 양식이다. 소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치체계이며, 체계라고 하는 용어가 집단통합 및 사회통제의 기능으로서 포함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비를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이것은 사실 '19세기에 행해진 농촌인구의 산업노동에의 대대적인 훈련'의 20세기에서의 등가물이며 그 연장이다. 19세기의 체계가 노동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체계는 소비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화하고 통제한다. 소비는 새로운 양식의 ‘사회적 노동’이며, 체계는 힘센 노동자, 즉 욕망에 가득찬 소비자를 필요로 한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는 소비자들을 어느 한 코드에 집단적으로 배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효과가 결코 어떤 사회적인 위력이 되지는 않는다. 소비는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이고 그 구조는 대단히 유동적이고 폐쇄적이다. 따라서 소비사회는 구체적인 부정(否定)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집단적인 연대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소비의 대상(재화)은 지위의 계층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19세기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로 작동하는 체계이고 상호간에 유비가 가능할지라도 소비사회에서는 계급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선전과 개성 선전은 ‘차이를 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의미작용을 갖는다. 선전이 만들어내는 ‘개성화의 차이’는 개인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게 아니라 무한 척도 위에 서열화시킨다. 사람들은 선전을 통해 추상적인 어떤 모델이나 특정 양식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다. 실제적인 개성, 차이, 특이성은 포기된다. 코드(차별적인 몇가지의 도식, 예를 들면 의류패션에서 무슨무슨 '룩')에의 복종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가치들이 유동적인 서열로 통합된다. 개성은 더 이상 개인의 내부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개성은 유명인사나 패션잡지, 디자이너들이 독점적으로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함으로써(소비함으로써) 개성을 획득한다. 

여성적 모델과 남성적 모델 남녀 모델은 대립적 이미지를 지니며, 양자의 차이가 소비의 질서를 유지한다. 남성적 모델은 명예와 용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까다롭게 따져서 과감하게 선택한다. 여성적 모델은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모델은 직접적인 경쟁에 들어가지 않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 선택을 당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적 모델이 소비의 모든 영역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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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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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알차다. 사이즈도 큼직하고, 색채도 선명하고, 부분확대 사진도 많고.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중세 시대 그림들이다. 중세 그림은 바로크 회화처럼 순간적인 압도감을 주지는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그리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투박한 형식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재능처럼 느껴진다. 중세의 그림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중세가 꼭 암흑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광기가 단지 교정해야 할 장애가 아닌 예지적 영감으로 추앙받던 세상, 밤하늘에 천사가 떠다니고 괴물과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던 세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했을까. 이 책을 펼쳐놓고 중세인들이 느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면, 첨단 과학의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메마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너무나 많이 파헤친 나머지 앙상해져 버린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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