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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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철학이란 '우리라는 특정한 공동체에서는 지금 당장 수용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제안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철학은 '지금-여기now-here'를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또한 동시에 '아직 없는nowhere' 세계를 상상하는 학문이기에 참된 철학이란 니체의 말처럼 항상 반시대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가족, 국가, 자본주의 등을 하나하나 낯설게 (그래서 불온하고 발칙하게) 고찰한다. 이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악으로 여겨졌던 국가가 기본적으로는 '지속적인 강탈을 위해 재분배를 작동시키는 폭력적인 기구'일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의 신선한 깨달음을 끊임없이 얻게 되는데 그로인한 즐거움이 바로 이 책의 묘미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 '사랑'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는 '둘이 하나를 지향하는 변증법적 노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둘 사이의 긴장된 관계성'을 그 본질로 정의내린다.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두 개체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 것. 그의 사유에 따르면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고독이 불가피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주체가 사랑하는 타자 속에서 일종의 무한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 사랑 속에서 경험하는 무한성 앞에서 유한한 우리는 항상 고독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치 기도하는 자가 자신의 침묵 속에서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p.133) 바디우는 이때의 고독을 '방법론적 고독'이라 일컬으며 칸트의 방법론적 회의가 사유의 주체를 정립시켰듯이 방법론적 고독은 사랑의 주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어 하늘바람의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던 칼릴 지브란의 시구절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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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6-21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하는 친구들이 조울증 걸린 사람처럼 허구헌날 자랑하다 앓는소리 하다 자랑하다 앓는소리하다를 반복하는게 괜한일이 아니었군요!-_-;;;; (이거야 말로 엉뚱한 소리겠죠?^^;;;;;)

수양 2009-06-2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솔로님도 어서 솔로 탈출하셔서 사랑의 주체가 되어 자랑하다 앓길 반복하길 바랍니다 하하
 
위험사회 (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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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가족, 사회, 계급, 관계 맺기 방식, 생애주기, 성(gender), 과학, 노동,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미래 사회의 변화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업사회 이후에 도래할 새로운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울리히 벡은 고전적 산업사회에서 부 생산의 논리가 위험 생산의 논리를 지배했었다면, 다가올 위험사회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고 말한다.  

위험의 개념과 특징 및 그 파급 효과ㅣ 위험사회에서의 ‘위험’의 개념이란, 대단히 스케일이 커서 일반 대중의 인지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한 베일 속의 정체 모를 어떤 것(?)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고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초국가적이고 초계급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종류의 위험으로는 방사선 누출이라든지 지구 온난화 현상, 전문직 근로자의 스트레스성 정신질환, 노동시장이 저고용 체계로 전환되면서 고용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위험 같은 게 있다. (그 외 수만가지)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이 사회 정치적 논쟁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미래사회에는 위험이라는 개념, 즉 위험의 분배나 위험으로부터의 안전 등이 사회의 화두가 된다. 위험 사회에서는 위험을 진단, 판단, 논증할 수 있는 소수 전문가 그룹이 권력을 갖게 된다. 또한 위험이 피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위험의 조작, 은폐, 왜곡이 가능하며 대중은 이러한 위험요소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그런가 하면 위험은 하나의 시장기회이기도 하다. 위험으로 인해 득을 보는 자와 손실을 입는 자가 생긴다. 기타 등등 위험이 야기하는 여러가지 변화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다는 못 쓰겠다.  

성찰적 근대화ㅣ 한편, 산업사회가 근대화의 시절이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성찰적 근대화가 일어난다. 말이 성찰적 근대화지 뭐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급진화된 근대화, 즉 근대화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과학 분야에 있어서의 성찰적 근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은 이제 진리의 권좌에서 물러나고 운명론, 점성술, 종교 등의 새로운 진리의 연금술사들이 대두한다. (지식원천의 다원화, 분화, 극복잡성) 그리하여 고정적이고 정확하고 확실한 계산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중구난방식의 평가가 무성해지면서 (계산가능성의 감소, 평가가능성의 증대) 더 이상 과학적 처리결과가 하향식의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의 성찰적 근대화ㅣ 이 책에서 특히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의 성찰적 근대화 부분이 인상적이다. 울리히 벡은 사람들의 개인주의 경향을 노동시장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미래사회에는 개인주의가 지금보다 훨씬 심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가족이나 이웃 등의 전통적인 지원망이 소실되고, 개인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노동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개인의 자급자족력이 떨어지고, 반면에 시장종속성, 제도 종속성, 사회 의존성 등은 심화된다. 자급자족력이 떨어지는 모래알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각종 인프라가 다양하게 구축되고 제도도 더욱 복잡해진다. 그럴수록 개인은 점점 더 강력하게 사회망에 종속된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미래에는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도 지극히 제도 의존적인 통제 사회가 가능하게 된다. 

이제 미래사회의 인간은 무성해진 제도와 갖가지 복잡한 사회 시스템들을 직접 취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생존을 위해 사회제도들을 능란하게 운용할 줄 아는 것이 미래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위난이 자연재해처럼 외부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다면, 미래에는 개인의 판단 실수, 계산 착오가 돌이킬 수 없는 위난을 야기한다. 복잡한 선택 항목 없이 그저 조상의 라이프스타일을 답습하면 되었던 과거의 표준적인 생애에서 이제는 자기선택적인 생애로 변화한다. 즉, 생애주기가 다원화된다. 그래서 미래의 인간은 주체적이고 자발적이고 독자적으로 자기의 생애를 형성해 나간다. 개인의 생애가 ‘성찰적 근대화 과정’을 겪는 것이다.  

이러한 책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성찰적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미래사회의 인간이라면, 복잡한 사회 시스템과 제도들을 기본적으로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말하자면 미래사회의 호모 사피엔스란- 보험제도, 은행대출서비스, 주식투자, 각종 부동산 관련제도 기타 등등에 관해 해박한 사유가 가능한 자를 일컫는 셈이다. 아, 나는 보험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말만 나와도 서서히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하는데. 미래 사회는 나 같은 몽상가들에게는 한없이 냉혹한 사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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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1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사진에 대해선 다들 한마디씩 하는듯.. 새판이 나와도 똑같더군요-_-;;;;;

수양 2009-05-18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스처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싶기도 하구;;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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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반부에 저자가 종교를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과거에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이란, 인간이 이원론적이고 창조론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성향을 말하는데,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특질을 낳았고, 종교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오늘날 전세계적 광신 현상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물(내지는 부작용)'의 개념은 나방 이야기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나방은 광원을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이용한다. 즉 나방의 비행로는 빛을 기점으로 한 나선 궤도이다. 만약 광원이 달빛이라면 나방은 직선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달빛이 아닌 인공조명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로등 주위를 미친듯이 맴돌고 있는 나방, 그것은 일종의 '불운한 부작용'이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자면 에러가 난 것이다.  

종교 활동(정확히는 광신 현상)을 가로등을 맴도는 나방에 비유한 저자의 탁견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시대의 맹목적인 종교 활동은 오늘날의 자본 사회 시스템과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체나 휴식의 시간이 부재하고 항상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소진시키기를 부추기는 자본 사회의 속성이 광신을 부채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 우리를 현혹하는 가로등, 느닷없이 출현하여 인류를 에러 상태로 몰고 가는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혹 자본 사회 시스템은 아닐까...  

2.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러한 성향들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본능이 종교라는 제도로서 현현하는 것인지도. 뭐랄까, 진화생물학적 자기인식은 너무나 정직해서 차라리 앙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인간만이 가진 형이상학적 욕망, 꿈과 이상과 낭만과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이 과학이라면, 애석하게도 나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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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1
발리 뒤 지음, 남도현 옮김 / 개마고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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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반에 대한 배경지식이 희박한 독자들을 향해 현대 철학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이나마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는 저자의 태도가 너무나 곡진하게 와닿는다. 지금까지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으로 이것 저것 읽어본, 대중을 위한 철학 개론서 중에서는 가장 자상한 것 같다. 혹자는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된 나머지 철학의 복잡한 개념들이 도식화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데, 도식화된 기본 개념조차 깔려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이 위험스러울만치 단순한 이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시작하기 마련이고, 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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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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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포는 생각의 결과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란 언제나 옛것이기 때문에 공포도 언제나 옛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새롭다는 걸 알면, 그건 이미 옛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것의 되풀이일 뿐이다. (...) 당신이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대할 때 거기엔 아무런 공포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2. 물론 생각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나날의 삶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거나 직업을 수행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생각은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 기억은 체험, 지식, 전통, 시간을 통해 쌓여온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대응하며 이 대응이 바로 생각이다. (...) 생각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항상 무엇으로 점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점유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공포를 보는 것을 두려워 한다.  

3. 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나의 말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를 통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공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가? 당신은 하나의 공포를 다른 형태들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욕망에는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만 있을 뿐이다.

4. 당신은 아무런 결론 없이, 당신이 공포에 관해 축적해 온 지식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이지 공포가 아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처음으로 과거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당신의 마음이 문제와 불안에 관해 속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지껄이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듯이,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에만 당신은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공포를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리고 공포의 반대인 용기를 끌어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것을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공포의 다른 형태들이 아닌 공포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를 지각할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공포의 세부사항들만을 보거나 당신의 공포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만 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중심 문제, 즉 '공포와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문제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 그래서 만일 당신이 공포를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산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공포와 너무도 완벽하게 살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하게 된다. "공포와 함께 사는 그 실체는 누구인가? 공포를 관찰하고, 공포의 주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포의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관찰자는 자신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죽은 실체, 정적인 존재인가? 그리고 공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 죽은 자인가? 관찰자는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인가?"  

5. 관찰할 때 당신은 관찰자가 아무런 타당성도 알맹이도 없는 관념과 기억의 뭉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며, 한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추상으로써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ㅡ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ㅡ을 안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라고 말하는 관찰자는 공포인 관찰물과 사실상 무엇이 다른가? 관찰자가 공포이며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고 또 관찰자와 관찰물 사이에 있는 시공의 간격이 사라진다. 당신이 공포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ㅡ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때ㅡ당신은 공포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P.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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