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권력은 신체를 하나의 거점, 작용점으로 삼기 위해, 공격하고-낙인찍고, 훈련시키고-의식을 강요하고-기호를 부여하는 식으로 신체를 제조한다.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탄생한 신체는 강제적 복종의 구조 속에 편입되어 ‘생산하는 신체’로서 활용된다. 이때 신체에 관여하는 권력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포를 주지 않으며, 치밀하게 계산되고, 기술적으로 조직화되는 어떤 것이다.

 

권력은 특정 영역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관계에 내재하는 힘이다.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권력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작용하고, 행사하고, 관철되고, 효과를 발생시키는 권력은, 명사형이기보다 동사형에 가깝다.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주기도 하는 효과”이다. 또한 권력의 관계들은 일방적이지도 획일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권력의 그물망은 다수의 대결점과 불안정성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불화와 갈등과 전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들이 ‘사건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놓이는 그물눈 전체에 어떤 효과가 발생해야 한다.

 

권력은 지식을 창출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과 지식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권력이 어떤 형태의 지식을 만들어 내고, 그 지식이 하나의 장치로서 권력의 여러 성과들을 뒷받침하고 강화해준다. 지식을 형성하는 가능성의 조건들이 권력관계 속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권력의 전략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 생성되고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정신(=근대의 지식, 근대적 담론, 인간과학과 휴머니즘)과 근대권력(=규율과 훈련과 감시의 체계)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권력의 관계와 작동을 해부하는데 있어서는 형벌체계를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벌체계야말로 권력의 전략과 효과, 권력의 신체 관리 기술을 가장 극명하고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2 오늘날의 형벌은 신체의 자유 제한, 권리 박탈, 의무의 강제 이행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회에서의 형벌은 신체 자체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게 형벌의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에는 군주와 그 권력의 물리적인 현존이 불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이며, 군주가 사실상 스스로 만든 법 위에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벌은 반드시 공포의 효과를 펼쳐보여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고통이 마구잡이식으로 자행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의 경중을 평가하고 계량하여 다양한 부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육체적 고통을 부과하는 형벌의 기술이 적용되었다. 강도에 따라 엄밀하게 수치화되고 물량화, 등급화되는 고통.

 

신체형은 권력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에 최대한 사법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화려하게 거행되어야 했다. 끔찍하고 두려우면서도 즐겁고 아찔한, 그러면서도 교훈을 주고, 복종을 유도하는 대중오락으로서의 신체형. 여기에는 “국왕이 자신의 인격에 가해진 공격에 대한 보복을 행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금지의 위반에 대한 처벌 + 권위를 경시한 행위에 대한 보복 + 권력의 본질적인 우월성에 대한 과시적 주장 + 상처받은 군주권의 회복. 신체형은 궁극적으로 “범죄자의 처형당하는 신체를 통해 군주의 격앙된 현존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그 목표이다. 신체형은 사법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통치자의 승리를 축하하는 ‘예식’으로서의 신체형.

 

신체형이라는 사법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증거, 증언에 의한 논증은 필수적이다. 설령 ‘증거’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더라도 권력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에 의거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는 진실의 생산 절차인 취조, 조사, 증언, 증거, 심문, 선서, 자백 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모든 절차가 범죄의 진실을 공명정대하게 생산해내는 법률적인 의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백’은 최고의 증거다. 자백은 권위가 부당함의 누명을 벗고 진정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진실이 완전히 힘을 발휘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백하는 범죄자는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이 진실 생산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형사상의 진실 생산 게임에서 한 배역을 떠맡는다. 그런 면에서 자백은 일종의 포기의 제스처이며, 화해이자 협조다.

 

자백은 양의성을 갖는다. 강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스스로 배역을 떠맡아 게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자백은 ‘증거’이면서 동시에 ‘증거로 만들기 위한 대상’(증거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포획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법권력의 행사에 필수적인 진실 생산 절차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폭력적 강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백이라는 증거를 수집을 해야 하는데, 자백을 위해서는 고문도 불가피하다. 사실 이 시대의 고문은 엄격하게 체계화되어있는 명백한 사법적 행위였다. 재판관은 용의자에게 고문을 부과함으로써 네가 이기거나 내가 이기거나 둘 중의 하나인 진실의 결투에 뛰어든다. 고문해도 자백하지 않으면 용의자가 이기는 것이 되어 재판관은 사퇴해야 되었다. 이런 규칙은 자백 이후의 처형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즉, 사형수와 사형 집행인의 관계 역시 결투 및 대결의 관계로써, 만약 사형 집행인이 기술상의 실수로 사형 집행에 실패하게 되면 그가 진 것이 된다. 사형수는 느닷없이 극적으로 사면되고.

 

“고전주의 시대의 고문에 있어 우리는 시험의 방법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실을 결정지을 신체를 대상으로 한 시험이다. (...) 고통, 쌍방의 대결, 진실 (...) 이러한 3요소가 공동으로 용의자의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고문’에 의한 진실의 탐구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죄인의 고백을 공공연히 노정시키는 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전투이자 관례에 따라 진실을 ‘생산하여’ 적을 제압하는 한쪽의 승리이다. 자백시키기 위한 고문 속에는 조사의 요소도 있지만, 결투의 요소도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고문에는 이미 ‘신체형’으로서의 처벌적 요소가 이미 들어있었다. 재판도 안 한 상태에서, 진실이 아직 도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써 고문이라는 징벌이 적용되고 있는 것. 여기서 고문은 죄를 자백 받고 형벌을 내리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형벌이다. 이 이상한 고문의 역설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분적인 일부의 증거만을 가진 용의자 역시 징벌의 마땅한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혐의’가 이미 ‘죄’였고 처벌 대상인 것. “18세기에 사법상의 고문은 진실을 생산하는 의식이 처벌을 부과하는 의식과 병행해 나가는 그러한 기묘한 경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신체형에서 심문당하는 신체는 징벌의 적용 지점이자 진실 강요의 장소이다.” 

 

3 신체형은 신체 훼손과 죽음이 일상화되어 있던 사회에서, 노동력이 별다른 효용성이나 상품 가치를 갖지 않은 사회에서, 빈발하는 내란과 그에 대해 권력을 과시하려는 국왕이 존재하는 군주제 사회에서 가능했다. 이 시대의 권력은 “죄인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감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인 과시행위를 통해 더 고무되고 강화되는 권력, 스스로 무장된 권력임을 내세우면서 명령체계가 군대체제의 기능과 다를 바 없는 권력, 관계의 단절이 생기면 모욕감을 주고 보복심을 불러일으키는, (...) 독특한 과시행위의 화려함을 통해서 자신의 효력을 계속 쇄신시키기를 모색하는 권력, 과잉권력으로서의 자기의 실상을 의식행사를 통해 화려하게 과시함으로써 활력을 다시 얻는 권력”이다. (이 시기 권력의 방식은 뭔가 느슨하고, 덜 교묘하고, 허술하고, 부끄러움 없고, 단순하고, 노골적인 듯.)

 

그러나 19세기 초에 신체형의 거창한 구경거리는 점차 사라진다. 애초 권력의 과시를 위해 거행되던 행사에서 오히려 범죄자가 영웅시되고, 민중이 이상한 연대의식을 형성하면서 폭동과 난동이 일어나고, 처형장이 졸지에 카니발 같은 축제의 양상으로 변질되면서 권력자가 농락당하는 역설적 상황이 빈발했기 때문. 공개적인 처형의 점차적 소멸과 때를 맞추어 등장한 것이 범죄소설이다. 범죄는 이제 예술로 승화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납득할 수 있는 형식으로서 수용되었던 것이다. 범죄소설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처벌 그 자체보다, 죄의 자백이나 신체형의 집행 그 자체보다, 범행의 진실을 찾는 탐색, 수사, 범인-수사자의 지력 싸움으로 이동. 그에 따라 범죄자의 영웅시 풍조도 소멸.

 

4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생산력이 발달하고, 생활수준의 상승, 부와 재산의 다양화, 소유권의 위상이 높아지고, 유혈 범죄보다 소유권에 대한 분쟁과 비행이 증가하면서 치안의 필요성이 대두하는 등 이 모든 현상들이 권력의 전략의 변화를 야기함. 프랑스 혁명 이후 단행된 사법개혁들은 처벌에 대한 권력의 ‘경제학적 전략’을 보여준다. “범죄법의 개혁은 처벌권의 재조정을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조정은 처벌권을 보다 규칙적이고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지속적이게 하며 또한 그 영향력이 보다 세밀하게 구석구석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요컨대, 처벌권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을 절감하고 (...) 정치적 경비를 줄이고 (...) 처벌권의 모든 성과를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 형벌제도에 관한 새로운 법이론은 처벌권의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18세기 이전의 사회는 쓸데없이 중층적인 재판의 심급, 관습적인 위법행위와 그에 대한 불가피한 묵인, 처형장에서 죄인에게 가해지는 불필요한 잔혹성과 그에 따른 폭동 등 처벌의 전략과 기술면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낭비와 남용의 체제’였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 개혁가들은, 기존에 서로 견고한 짝패를 이루어 비효율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던 (1)군주의 초권력과 (2)위법행위를 일삼는 하층 권력, 이 둘 모두와 싸우면서 형벌체제를 효율성과 경제성의 체제로 개편한다. 혁명 이후 신체형이 소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체형이야말로 군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항상 발생하기 마련인 민중의 위법행위(처형장에서의 폭동)가 뚜렷이 결합되어있는 형상이었기 때문.

 

더불어 신체형의 소멸은 전사회적인 인도주의적 요청에 의해 가능했다. 사람들이 범죄자에게서도 ‘인간’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군주의 복수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제한되어야 할 인간은, 교정하고 변화시켜야 할 인간이며, 학문적으로 다루어야 할 인간이기도 했다. 사실상 형벌체계가 새롭게 강조하기 시작한 ‘인간성’이란, (1)군주의 초권력과 (2)위법행위를 일삼는 하층 권력 이 모두에 제한을 두기로 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새로운 처벌 제도에 부여된 도덕적 정당화의 형식임. 새로운 권력기술의 등장과 신체형의 소멸, 그리고 휴머니즘 담론의 대두- 권력과 지식의 상호 지지효과를 보여주는 일단. 프랑스 혁명 이후 실시된 행형 개혁을 계기로 권력의 작동은 한층 더 섬세하고 광범위해진다. 경제적 정치적 비용이 절감된 보다 효과적인 관리방식과 기술론이 정립됨에 따라 권력의 그물망도 촘촘하게 확산.

 

개혁가들에 의해 단행된 사법개혁에서 처벌의 목표는 더 이상 제압하는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이제 처벌은 미래의 범죄 재발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질서를 강화하고 무질서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를 노리는 처벌 기술이 모든 범죄에 적용됨. 이러한 처벌기술이란 구체적으로 (1)"범죄를 강행하기보다 형벌을 받지 않게 되는 편이 계산상으로 약간 나은 이익을 갖는 정도"로 형벌의 분량을 최적화시키기. (2)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그에 따른 고통을 받으리라는 관념, 즉 범죄에 상응하는 표상을 정신에 각인시키기. (3)형벌이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 즉 잠정적 범죄자들에게도 가시적 학습의 효과, 계도의 효과, 선전의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들기. (4)모든 범죄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처벌에 있어서 완벽한 확실성과 공정성을 보여주기. (5)범죄와 각각의 범죄에 대한 처벌은, 기본적으로는 린네의 식물분류표처럼 세밀한 표상체계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롭게 부상한 ‘휴머니즘’ 정신에 의거, 때때로 개인의 처지를 고려하여 형벌을 가중하기도 하고 경감하기도 한다.

 

6 혁명 이후 사회에서는 범죄와 범죄자 모두 과학적 '객관화'의 대상이 된다. 범죄자는 광인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탐구해야 할,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고, 범죄는 공통적인 규범에 따라 객관화시켜 처리할 수 있는 사건이 된다. 특히 범죄는 ‘인간에 대한 권력 행사의 일반적인 조제법’이라고 할 수 있는 범죄-처벌의 대응관계에 따른 일람표, 범죄-처벌의 기호 체계에 따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되고 처리되는데, 사람들의 머릿속에 범죄-처벌의 객관적인 표상체계가 각인된다는 것은 정신에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적 권력 효과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임. 아울러 범죄-처벌의 관계가 표상의 기호 체계가 되면서 범죄에 따른 처벌은 매뉴얼에 따른 보편적인 프로세스처럼 인식되고, 권력은 자신의 모습을 구태여 드러내고 과시할 필요가 없어진다. 낭비를 줄임.

 

7 과거 신체형 시대의 '감금'은 합법적 형벌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밖’에서 행사되는 자의적이고 임시적인 처리 방법의 하나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 권력의 중점적인 전략이 신체형이나 사법적 판단보다도, 범죄자를 '교정'하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이제 감금은 범죄를 '치료'하여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서 제도에 편입되어 행정적으로 엄격하게 관리되기 시작한다. 6에서 말했듯이 근대의 권력기술은 ‘처벌’ 자체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처벌 이후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교화 과정에서는 권력의 치밀한 작용이 가해진다. 죄인의 신체와 시간이 세심하게 장악되고, 모든 권위와 지식의 체계가 동원되어 죄인의 동작과 품행을 단속한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강제력에 의해 훈육, 훈련, 조립, 조련, 개조되는 신체. 죄인에게 감행되는 권력의 ‘정형수술’. 이 모든 교정술을 작동시키는 권력은 사회 자체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자율적인 지배의 성격을 갖는다.

 

8 ‘규율’(discipline)은 원래 종교계에 기원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욕적인 생활의 유지, 수련 및 구도 활동을 위해 고안된 종교적 계율이 아마도 규율의 시초였을 것.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규율은 점차 ‘신체와 시간에 관한 정치적 기술’의 한 요소로 편입되어 복종하는 신체를 생산해내는 데 적용된다. 고전주의 시기인 17~18세기를 거치면서 규율은 사회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제 규율은 학교, 기숙사, 군대, 병원, 공장 등의 다양한 권력 장치 속에서 인간의 신체에 행해지는 권력의 기술이 된다. “인간의 신체는 그 신체를 파헤치고 분해하며 재구성하는 권력 장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나의 ‘권력의 역학’이기도 한 ‘정치 해부학’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 규율은 (유용성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규율은 신체와 힘을 분리시킨다.”

 

규율은 폐쇄성을 갖는다. 자체적으로 닫혀있는 특정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규율. 뿐만 아니라 규율은 유연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특정 장소 안의 공간을 분할하고 재구성한다. 또 각각의 세분화된 공간에 개인을 배분, 배치하고, 개별화된 신체를 각각의 생산기관과 연결시킨다. 신체가 저마다 완전히 관리-파악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배치-연결되면, 개인 단위로 업무 능력, 신속성, 숙련도 등의 분석, 평가, 기록이 용이해진다.

 

규율사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서열’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척도가 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나이, 성적, 키에 따라서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공간이 편성된다. 이렇게 편성된 공간은 “개개인을 작은 단편으로 절단하고, 또한 조작 가능한 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자리를 지정하고, 그 가치를 명시하며 개개인의 복종뿐 아니라 시간과 동작에 대한 최상의 관리를 확보한다.” 서열화와 더불어 규율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일람표다. 분류, 통제, 관찰, 검열, 기록, 분석 등을 위한, 권력의 기술이자 지식의 방법으로서의 일람표.

 

9 규율 및 훈련은 ‘신체’와 ‘시간’에 관한 권력의 정치적 관리 기술이다. (1)규율을 통해서 신체는 생산수단과 효과적으로 결합된 동작을 내면화하게 되고, 특정 작업을 영위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신체로 태어난다. 신체와 생산기계와의 유기적 접속. (2)규율은 신체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지배한다. 개체의 시간 관리 및 활용을 강화. 권력이 시간을 활용, 관리, 통제하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임에 따라 완성으로 향해가는 직선적 시간 개념, 진보의 개념이 출현. 시간성 속에서 단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생성-축적-성장-완성되어가는 개인, 역사, 사회에 관한 담론들. 복종의 새로운 기술에 호응하는 진보-진화의 개념. 권력과 지식의 상관적 운동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단.

 

10 규율은 신체를 배열-배치하고, 각각의 신체의 시간을 추출하여 축적하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각각의 힘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도록 유기적으로 조립, 조합하여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어내는 기술이기도 하다. 신체들 간의 위치, 간격, 질서, 일사불란한 움직임 등을 정교하게 프로그래밍하는 것, 그러한 힘의 조직, 조합에 의해 개별적 노동력들의 시너지 효과를 최대로 창출하는 효율적 생산 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규율의 관심사.

 

11 이러한 규율의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감시(예전의 권력은 드러내고 으스대는 권력이었지만, 이제는 베일에 싸인 은밀한 권력이 됨. 예전과 달리 이제 ‘다스리는 자’는 보이지 않고, ‘다스려지는 자’만 보인다. ‘감시’에 의해 끊임없이 드러나고, 추적되고, 포착되고, 관리되는 신체. 판옵티콘 사회.) 와 규범화(규범적 판단. 끊임없이 개별적 차이들을 찾아내어 미시적인 처벌을 가하고 규격화하는, 일종의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규범화), 시험(감시와 규범화 모두에 관련된 형식으로서 권력과 지식의 중첩을 보여준다. 시험은 객체화된 개인들의 자료를 축적하여 지식화한다. 근대의 인간과학은 인간의 활동을 객관화시켜 분석하고 체계화한다는 점에서 시험이라는 규율 권력의 기법이 학문적 결과물로 완성된 것. 시험을 통해서 신체는 상징계에 등록된다. 신체는 권력이 포획한 하나의 사례로서 분석되고 평가되고 측정되고 기술되는 자신, ‘객체화’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권력의 작동 속에서 규격화된 자신의 모습을 내면화하는 식으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권력에 예속된다.) 등의 새로운 권력의 기술, 새로운 권력의 행사 양식이 도입된다.

 

이로써 신체는 ‘개인화’된다. 개별적인 법적 주체의 계약에 의한 결합이라는, 루소를 위시하여 대두한 이 시기의 사회계약설은, 위와 같은 권력의 새로운 전략이 관철된 하나의 ‘효과’로서, 또는 효과를 생산해내는 ‘담론 장치’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권력과 지식의 유착을 보여주는 일단.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지식은 이러한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 담론을 낳고, 지식을 구축하고, 쾌락을 유도하고, 역학적 운동을 발생시키는 그 모든 적극적인 메커니즘으로서의 권력.

 

12 규율 방식의 발전은 인구 증가(=일탈자의 증가, 무질서의 증가)와 생산기구 증대의 상호관계를 조절해야 할 사회적 필요에서 기인한 것. 규율은 ‘선취-폭력’이라는 군주제 시절 권력의 낡고 비효율적인 원칙 대신 ‘부드러움-생산성-이익’의 원칙으로 적용되는 권력의 새로운 기술이다. 규율은 권력의 행사에 지출되는 비용을 보다 아끼고, 최소의 알뜰한 노력으로 권력의 효과가 최대한 파급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전처럼 화려하게 생색을 내면서 집단 다수 위에 군림하지 않고, 대신 조용히 그리고 샅샅이 신체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계획적이고 교묘하게 스며들어 빈틈없는 위계질서망을 확정하고(=권력의 미시물리학), 그렇게 집단의 이용효과를 증대시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발휘.

 

13 계몽주의 시대는 양면성을 가진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계약과 평등주의적인 법률, 합리적인 대의제도에 의해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면에는 신체의 복종을 요구하는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규율의 체계가 자리 잡고 있는 것. 명시적인 법률(거대 권력)의 이면에서 혹은 사이사이에서 그것의 외설적 보충물처럼 기능하고 있는 규율(미시 권력). “규율은 그 메커니즘에 있어 하나의 ‘대항적 법률’이다. 또한 근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법치주의가 권력 행사에 한계를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도처에 확산되어 있는 판옵티콘 감시체제는 법률의 경우와는 반대로 권력행사에서, 권력의 불균형을 지탱하고, 강화하고, 다양화시키며, 부과된 한계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거대하면서 동시에 미세한 장치를 작동시킨다.”

 

14 사회 안에서 감옥은 학교, 공장, 군대 등 규범화 권력을 행사하는 일련의 모든 장치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감옥이 다른 장치들과 다른 점은 규율의 강도가 좀 더 세다는 것 뿐. 한편, 감옥의 목표는 개심-개조-교화이기 때문에, 감옥은 판결을 수정하는 권리를 갖는다. 즉, 감옥 안에서 죄인의 변모의 정도에 따라 형기가 개별적으로 가중되거나 경감된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세의 정도에 따라 투약의 중단 혹은 지속을 결정하듯이.

 

이 점은 확실히 근대 규율 사회에서 흥미롭게 관찰되는 특이적인 광경이다. 형기를 수정하는 척도가 범죄자의 법률 위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감옥에서의 품행과 태도를 근거로 한다는 것. 형벌의 실질적인 조정에 있어서 정작 사법상의 심급은 아무런 권한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 법률 위반행위가 아니라 위반 이후의 행위를 근거로 조정에 들어간다는 것.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라 교정담당관들의 판단이 형기의 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의학으로 빗대면, ‘진단’과 ‘치료’가 다른 심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물론 형벌체계에서 보다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영역은 '치료'의 영역이다. “법원의 평가는 ‘예단을 내리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자의 도덕성은 ‘시련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 흔히 병원이 병을 키운다고 하듯이, 다시 말해 병원이 치료의 영역에 인간을 점진적으로 예속시킴으로써 존속하듯이, 예전에는 질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병원 권력의 무한한 ‘의학에의 욕구’에 의해 의미부여를 거쳐 질병으로 새롭게 인식되듯이, 병원이 병을 척결하기 위해서 생겨난 게 아니라 사실은 병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구이듯이... 감옥도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다. 감옥 역시 위법행위를 도안하고, 범죄와 비행을 발명, 생산해낸다. 감옥 역시 병원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처벌에의 욕구’를 보여주지만, 비행과 범죄는 영원히 척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옥은 수감자의 본성을 폭력적으로 억누르고, 권력의 남용과 독단적 행정을 통해 분노와 불신의 감정을 조장하는 등 ‘교정’과는 동떨어진 관리 방식을 보여준다. 까닭은 교화의 실패야말로 감옥이 지속적으로 운용되기 위한, 지속적으로 처벌의 욕구를 펼쳐 보이기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감옥체계는 (...) 비행자들을 교정하기 위한 계획과 비행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는 기제를 똑같은 형상 속에 결합시킨다.” 행형의 목표가 영원히 달성되지 못함으로써 존속하게 되는 감옥체계.

 

사실상 징벌은 범법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범법행위들을 구분 짓고 배열하고 궁극적으로는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다. 형벌제도는 위법행위를 정비하고, 관리하고, 이용하는 권력의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유지되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형벌제도를 매개로 한 차별적 위법행위 관련 전체가 지배 기제들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젝 식으로 말하면, 감옥은 권력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은밀하게 존속해야 하는 외설적 보충물들을 위해 마련된 장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비행-처벌-감금-재생산된 비행의 악순환’은 어디에 활용되는가. 그러한 지속이 관철하려 하는 근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형벌제도가 사회에 발휘하는 생산 효과’는 무엇인가.

 

(1)형벌제도는 위법적인 실천 영역을 만들어낸다. 끊임없이 범죄자를 잡아가둠으로써 사실상 범죄를 용인하고, ‘금지된 실천’을 유지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는 비로소 위법적이지만 꼭 취해야 할 부정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윤락, 무기밀매, 마약밀매 등. (2)형벌제도는 또한 “권력의 행사로 인해 권력 주변에서 초래되는 위법행위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비행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권력의 관철을 위해서는 때로 불법도 불사해야 하므로 그때를 위해 형벌제도 필요. 예를 들어 철거 때 용역 깡패 동원하는 경우. (3)형벌제도는 범죄자를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범죄자를 다시 잡기 위해서, 전사회적 감시활동을 정당화시킨다. 비행자들을 통해 사회의 전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구성하게 되는 것. 감시는 감옥과 짝을 이루어서 가능. (4)범죄는 범죄가 저질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은폐한다. 범죄라는 반항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 원인인 상층계급의 비행(하층계급에 대한 착취와 강탈 등)을 은폐한다. 정작 부유층의 비행은 법률에 의해 용납된다.

 

비행자, 범죄, 경찰, 사법부, 재판관, 감옥, 교정, 교화 등 이 모든 언표들은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 '통제장치'의 구성요소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범죄자는 '단속'이라는 중계장치를 통해서 서로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상의 통속극'의 지속을 위해서, 치안이라고 하는 권력의 놀이의 지속을 위해서 경찰과 범죄자가 서로 협동하고 야합하며, 공조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 통제장치의 작동 속에서 ‘비행’은 마치 ‘자본’처럼 끝없이 창출되고, 창출된 비행은 다시 장치에 투입된다. 끝없는 생산운동, 장치의 끊임없는 운동을 위해서.          
  
16 “감옥에서 인간과학이 유래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러 인간과학이 형성될 수 있고 인식구조에서 모든 대변동 효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과학이 특수하고 새로운 권력 양태, 이를테면 신체에 관한 어떤 정책, 다시 말해서 축적된 사람들을 순종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어떤 방법에 의해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인하여, 권력관계 안으로 지식의 명확한 관계를 끌어넣는 일이 필요했고, 예속화와 객관화를 교차시키기 위한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개인화에 따른 새로운 절차들이 구성될 수 있었다. 감옥의 구조는 인간과학의 등장을 역사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그 권력-지식의 한 골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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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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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하는 인간'마저 대상화하여 재사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마치 서구 문명사가 수행하는 인류적 차원의 위빠사나 명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땅에 발 딛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푸코는 상아탑에 갇힌 명상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비폭력-아나키스트였다. 자유와 주체의 가능성들을 옥죄는 모든 규범과 권력에 대해 푸코는 단체를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하면서 ‘행동’으로 저항했다. 그는 여러 정치적 현장에서 사르트르와 함께 있었고, 때로는 체포되기도 했으며, 자유의 나라 미국에 가서는 각종 마약을 섭렵하고 SM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가 결코 냉소적 회의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평생에 걸쳐 자유를 통제하는 모든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불복종함으로써 오늘의 세계와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그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2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 미세한 진동, 기능장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푸코의 고백처럼, 그에게 ‘텍스트 밖에서의 삶’과 ‘텍스트’는 상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푸코를 냉소적 회의주의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피상적 독법이 낳은 속단일 것이다. 섣부른 낙인찍기일 것이다.        
   
3

<광기의 역사>가 세상에 나왔을 무렵 데리다는 “선생님의 주제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뭐랄까 이성예찬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면서 푸코-데리다 논쟁의 포문을 연다. 요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주체를 세우기 위해 꿈과 오류는 회의의 대상으로 고려했지만 광기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그럼으로서 광기는 철저히 논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푸코의 해석이 “순진한” 독법이라는 것. 데리다는 “한 텍스트를 하나의 ‘역사적 구조’ 안에, 다시 말해서 ‘역사의 전체적 기획’ 안에 집어넣으려는 이러한 독서방법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그 자체가 ‘합리주의와 양식에 대한’ 폭력”이라고, “구조주의적 전체주의는 여기서 고전주의 시대의 폭력적 감금과 비슷한 감금을 코기토에 대해서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일갈한다. 일견 사소하고 지엽적인 태클 같지만, 푸코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을 구성하는 상징적인 언표임을 감안할 때 이는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푸코가 최초로 보인 반응은 사뭇 감동적이다. 그는 데리다가 “아주 철저하게 핵심을 짚고, 정확하게 문제를 부각시켜 나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사유를 내게 열어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잠시 관대한 호인의 면모를 보여주던 푸코는 이내 변심하여 데리다가 고작 세 페이지 가지고 자신의 철학적 기획 전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한다. 그리고 정작 포커스를 두어야 할 지점은 담론적 실천이 수행되는 변형의 장 속에 코기토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인데, 들뢰즈가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적 흔적으로 환원해버림으로써 담론적 실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렸다고 힐난한다. 비단 데리다가 맞더라도 담론적 실천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건들이지 철학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

 

4

“<지식의 고고학>에서 (...) 견해와 과학적 인식 사이에서 아주 특별한 층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앎의 층위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이 앎은 이론적 텍스트나 경험의 도구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천과 제도 안에서 실체화된다. 그러나 이 앎은 이 모든 실천이나 제도의 단순한 결과나 반쯤 의식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앎은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나타낸다. (...) 앎의 발전과 변화는 인과성의 복합적인 관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어떤 에피스테메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앎들이 제도적 실천의 단순한 결과도 아니고 의식적인 표현도 아니라면, 고유의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와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권력의 장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속성 역시 에피스테메에서의 앎들의 속성과 마찬가지 아닐까.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도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메커니즘 속에서 자기 고유의 규칙을 정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푸코가 어떤 인터뷰에서 “자유가 없다면 권력 관계도 없다”고 했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권력은 상호작용이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개체도 비록 권력의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응당 자유로워야 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개인’을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양태’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타동적지만, 그래서 ‘부자유’하지만, 동시에 양태는 ‘자유롭게’ 변용된다. 실체의 속성을 분유하면서 무한하게 변용되는 것이다. 푸코의 개인들 역시 권력의 속성을 분유하며 자유로이 변용됨으로써 진리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라면,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앎이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듯이, 우리도 우리 고유의 변용의 규칙들을 옹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들이 돋아나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해낼 여력은 못 되고, 아직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푸코와 스피노자의 교직이 가능하리라는 예감이 든다는 것, 그리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내가 느꼈던 기분이 숨막힘과 답답함이 아니라, 충만과 기쁨이었다는 사실이다.               
   
5

성의 역사는 원래 4편까지 기획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 다음에 기독교 초기의 성 담론을 분석한 <육욕의 고백>이 있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현재 출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푸코는 자신이 작성한 ‘안내문’에서, <성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그러나 19세기 초 이전에는 없었던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이 서구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오랜 침묵 끝에 말년의 푸코가 돌연 현세를 초탈하여 고대로 떠나버린 듯이 비치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의 불시의 죽음에서 기인한 착각일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근대 사회의 욕망하는 개인들을 해부하기 위해 그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시대로 잡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욕망하는 개인’의 고고학-계보학적 탐사를 (비로소 막)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섹슈얼리티’는 ‘광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거시적인 조망, 총체적인 가늠을 위한 하나의 특징적인 지표이자 샘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푸코는 거시적으로 무엇을 조망하려 했을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쩌면 푸코는 주체에게 있어 ‘내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안에 생겨나는 마음들’에 대해서, 그걸 모조리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번뇌 집착 망상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가의 명상 수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보려 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 안의 욕망의 발생과 형성과 작동의 양상들을, ‘외적 영역’에서 권력의 역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듯이 철저히 해부해 보려고 시도했던 게 아닐까.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철학은 <성의 역사>를 기점으로(정확히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뉘었을 지도 모르겠다. 
        
6

푸코의 장례식에서 들뢰즈가 낭송했다던 <쾌락의 활용> 서문이 나에게는 새롭게 변주되어 읽힌다. 현재의 나를 배반하고 전복하기 위한 책 읽기, 파괴되기 위한 책 읽기, 길을 잃기 위한 책 읽기, 방황하기 위한 책읽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 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심각한 문화 충격을 받았음을 시인해야겠다. 바타이유, 사르트르, 알튀세, 라캉, 레비스트로스, 보부아르, 블랑쇼, 바르트,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브로델, 메를로-퐁티, 부르디외 등 이름만으로도 압도감을 주는 지성들이 푸코와 함께 우정어린 논쟁을 하고 사상적 영향을 나누고 정치적 상황에 맞서 의기투합하기도 하면서 프랑스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더불어 대학에서 푸코가 강의했던 주제가 죽은 위인의 철학도 물 건너온 철학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독창적 이론이었다는 사실은 사유의 변방국에 사는 독자에게는 부러움을 넘어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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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질서 - 개정판
미셀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중원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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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푸코는 이 강연에서 자신이 어떤 메타철학적 밑그림 위에서 어떤 방법론에 기대어 책들을 써나가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강연의 전반부는 담론이 어떤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가, 담론의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담론 형성의 외부적인 과정들
(1)금지(금기, 터부, 억압): 예를 들어 성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보여주는 금기들. 금기는 그것을 둘러싼 욕구와 권력의 관계를 드러낸다.

(2)분할 및 배척(배제, 침묵): 예를 들어 이성과 광기의 분할. 
(3)진위대립(진리에의 의지): 담론의 내부가 아닌 다른 인식론적 층위에서 본다면 언제나 진리에의 의지를 지배하는 배제의 체계가 존재한다. 특정 사회, 특정 시대에 진리의 의지를 지배하는 배제의 체계는 자의적이고, 제도적이고, 폭력적이고, 구성적이고, 수정 가능하고, 강제적이다.

 

담론 형성의 내부적인 과정들(일단 외부적인 과정들을 거쳐서 걸러진 사물들은 이제 분류되고 정돈되고 분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류되고 정돈되는가?)
(1)주석: 끊임없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말해지는 것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고, 그를 반복하고 또 변이시키는 주된 이야기들, 사람들이 일정한 상황들에 따라 말하는 담론들의 의례화된 집합들, 텍스트들, 언어 표현들”. '이야기'라는 실천들의 놀이. 말해지는 것들의 내용 자체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새로운 것은 말해진 것 안이 아니라 그의 재귀라는 사건 안에 존재한다.”
(2)저자의 원리: 어떤 일차적인 텍스트가 있고 그에 따라 갖가지 주석들이 증식하는 경우. 여기서 ‘저자’라는 것은 텍스트를 썼다는 뜻에서의 저자가 아니라, “담론의 분류의 원리로서, 그들의 의미 작용들의 통일성과 시원의 원리로서, 그들의 정합성의 핵으로서” 이해되는 저자.(예를 들어 성경이나 푸코 등을 저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학문의 영역에서 주로 저자의 원리가 적용되지만 어디서나 항상적으로 작용하는 원리는 아니다. 저자로서의 유효성이나 의미를 보유하지 않은 채 익명으로 돌아다니는 담론들도 존재한다.
(3)과목들(수학이나 물리학 등의 고도 과학과 일상적 담화 사이에 존재하는, 과학을 지향하고 있는 담론들. 일종의 지식. 앎의 층위. ex. 정신병리학, 식물학, 범죄심리학 등등): 한 명제가 하나의 과목에 속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유형의 이론적 지평 위에서 새겨질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하나의 명제가 한 과목에 속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복잡하고 무거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틀리다 또는 맞다고 말해질 수 있기 이전에 ‘맞는 것’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멘델은 진리를 말했지만, 그는 그의 시대의 생물학적인 담론의 '맞는 것 안에' 있지 않았다. 멘델이 맞는 것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층위의 전적인 변화, 대상들의 전혀 새로운 평면의 전개가 필요했다. 결국, 우리가 진(眞)안에 있게 되는 것은 담론적 공안(police, 내치)의 규칙들에 복종할 때뿐이다.

 

이렇게 한 시대의 담론은, 금지와 분할과 배척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의 의지를 지배하는 특정한 분할의 유형에 의해, 한 저자의 다산성 속에서, 주석들의 다수성 속에서, 과목들의 전개 속에서 생성되고 구축된다.

 

주체의 희박화(차이성의 희박화?)
담론의 장 안에서 주체는 길러진다. 규칙을 습득하고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익히고, 그렇게 길러짐으로써 담론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고 구속된다. 여기서 푸코가 들고 있는 일화: 17세기에 일본의 쇼군은 유럽인들의 우월성이 수학 때문이라는 풍문을 듣고 영국 선원을 억류해서 그에게 수학을 배웠는데, 정작 수학이 일본 사회에 정착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영국 선원에게 수학이란 학문 기관에 들어가 따로 공부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조선소에서 근무하면서 생활의 필요에 의해 저절로 익히게 된 실용 기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애초에 담론의 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즉, 수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영국 선원을 억류해서 일부러 번거롭게 배워본들 그 지식이 유통조차 되지 않는 것.

 

분할과 배제, 금지와 분배를 거쳐 형성된 담론의 질서 위에서 사법, 의료, 교육 등의 제도가 구축된다. 사법, 의료, 교육의 모든 체계들은 담론들이 점유하는 지식들, 권력들과 더불어 그들의 전유를 유지하고 수정하는 각각의 정치적인 수단이다. 사법, 의료, 교육 등의 체계를 통해 주체는 사회적 주체로서 만들어지고(희박화:특정 언표적 장 속에서의 주체의 자리잡음, 일군에 속한 개인으로 만들어지기), 말하는 주체의 자격을 얻게 되며, 특정 모습을 띤 주체로 고착화된다. 담론에 예속되는 주체.

 

초험적 주체들의 철학들
철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담론을 전유하고 강화하는 수단이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그 전개의 원리로서 내재적인 합리성을 제시하고, 진리 자체를 원하고, 사유의 힘을 통해서만 진리를 약속하는 인식의 윤리학을 갱신함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부단한 과정을 통해서 제한들과 배제들의 놀이에 응답한다.

 

철학적 주체는 기호와 문자들을 배열함으로써 이미 발견되어 있는 의미를 ‘재포착’해서 명제화시킨다. 이 과정은 담론의 심급을 거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담론의 현실성을 생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렇게 철학적 인식과 경험들은 이미 말해지고 있었던 것들, 이미 취해진 담론을 가시화한다. "사실상 이 로고스는 이미 취해진 담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푸코는 다음의 세 가지 작업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우리의 진리에의 의지를 문제 삼는 것: ‘진리에의 의지’가 배제의 다른 체계들처럼 제도적 토대 위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로 삼으려 하는지 그 의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2)담론에 그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시켜주는 것: 푸코는 기존에 통용되던 담론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즉, 담론은 사건과 행위와 실천까지도 담지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실천은 금지하고 배제시키면서 특정한 방식의 실천은 강제하는, 그런 실제적인 영향력, 힘, 실증적인 효과를 낳는 사건.
(3)시니피앙의 지고함을 제거하는 것: 담론을 단순히 라캉 식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을 분절하여 표상하게 해주는 표상체계’로 국한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사건과 실증적인 효과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언어, 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함으로써 푸코는 기호로 이루어진 고요한 표상 모델로부터 벗어나 전략, 투쟁, 세력 관계가 드러나는 역동적인 권력 모델로 나아간다.

 

고고학과 계보학
푸코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분석들이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두 집합들에 따라 배열된다고 말한다. 이 두 작업들은 대상이나 영역의 차이에 따른 방법론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 따른 방법론이며, 이 두 작업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각각의 방법이 상호 교환 가능하며 상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1)고고학은 “그들이 어떤 요구들에 답하기 위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들이[인식의 가능 조건들이, 담론들이] 어떻게 수정되고 위치 이동되는가, 그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제약들을 행하는가, 그들이 어느 정도로 전복되는가”를 분석한다. 인식의 가능 조건들의 구성과 배치의 변화. ex)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지식의 역사, 임상의학의 역사
(2)계보학은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을 다룬다. “담론의 계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들 각자의 특이한 규범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출현, 성장, 변이의 조건들은 무엇이었는가”를 분석한다. ex) 감시와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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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 진정한 휴머니즘을 향한 푸코의 사유와 실천의 여정 철학 스케치 2
디디에 오타비아니 지음, 심세광 옮김, 이자벨 브와노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푸코의 정신을 계승한 것 같은 삽화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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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철학사
F. C. 코플스턴 지음, 김보현 옮김 / 철학과현실사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헤라클레이토스는 흔히 '만물은 유전한다'는 명제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코플스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에 대한 주장은 그의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측면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양성이나 변화'에 대해 말했다기보다, '다양성과 변화 속에서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는 단일성'에 대해서 말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본질로 '불'을 꼽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은 탈레스의 '물'이나 아낙시메네스의 '공기'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불은 만물의 본질을 이루는 '물질적 원소'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불이 이질적인 물체를 태우고 그것을 그 자신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듯이, 유전하는 세계 역시 존재자들의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을 '연료'로 삼아 지속된다고 본 것이다. 그의 '불'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정도에 따라 타올랐다가 정도에 따라 소멸하는[잦아드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갈등과 긴장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전쟁이 만인에 공통이며, 투쟁이 정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물은 투쟁을 통하여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 시대의 호전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생각해 보면, 그는 대립과 긴장, 갈등을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전하는 세계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다양성으로서, '한데 어우러짐'으로서 보았던 것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만물의 대립과 갈등은 일자의 존재에 필수적이며, 대립하는 만물은 또한 상호 불가분성을 갖는다. 마치 사물이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반대로 돌아온다는 주역의 가르침처럼 그도 "선과 악은 하나"라고 말하고, "상향의 길과 하향의 길은 같다"고 말한다. 일자 속에서 모든 차이와 긴장들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로서 역동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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