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쌍기를 다시 보고 있다. 월광보합은 봤고, 선리기연 곧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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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2-22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토끼님 정말 책을 많이 읽으셔요!!!!

2015-02-2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리기연 나도 봐야겠다. 이 글 본 김에.^^

김토끼 2015-03-01 00:06   좋아요 0 | URL
저도 어서어서 ㅎㅎ
 


 



 

 

 











하루키와 황정은, 이건 분명 '네' 취향이다, 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말하자면 확실히 이 둘은 '좀 쉽게' 읽히는 문장과 고집스럽고 부드럽게 독자를 납득시키는 스타일, 때론 대중적이며, 문학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당하게 이건 '내 취향'이라고 말할만 한 작가들이다. 그리고 타인에게도 추천하기 좋고, 추천하면서도 이 작가들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의 퀄리티를 떠나 본격적으로 취향의 문제로 들어왔을 때도 이들은 결코 추천자를 민망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은 '보편적'이면서도 '선별적'인, 아이러니를 충족시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말이 많았다. 좋다 아니다(나쁘다 까지는 아니지만). 전작에 비해 좀 아니었지 싶어, 라는 둥. 하루키에 대해 순차적인 독서가 불가능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령 십 년 만에 <먼 북소리>를 다시 꺼내 읽고, <상실의 시대>는 이십 여 페이지를 훑어본 뒤 못 읽겠어 덮어버리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을 그나마 순서대로 읽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억에서 뒤죽박죽 섞여버린 채 이 세 작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뭐라 얘기하지도 못하고, 도서관에서 <더 스크랩> <무라카미 라디오>를 발견해 몇 번이고 대출해 읽었지만(정작 구매로 이어지지 않은, 그래서 절판되었을 때, 왜 안 샀지 하다가 재출간 된 책으로 일단 서가에 꽂아넣었던) 독자로서  <색채가 없는...>이 책은 그간의 독서에 비교하면 특별히 좋은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없었다. 하지만 <1Q84>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 등등 하루키 장편은 잘 읽지 않아서인지 '하루키의 장편'을 모처럼 읽었다는 마음, 드디어 하루키 월드에 입성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예순 다섯쯤 되었을 하루키를 생각하면, 그가 소설을 시작할 무렵 창조한 인물들: 무기력한 남성과 두 가지 인격으로 나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점, 스무 살 무렵의 일들, 그 즈음에서 나타나는 주인공(혹은 화자)의 변화에 대한 욕구(분열 욕구)가 연장선상에 놓여, 작품의 큰 틀을 구축한다는 점이 '한결'같다. 화자(남성)와 여성 등장인물의 관계 뿐아니라, 화자(남성)과 다른 남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삶의 형태를 관찰'하는 태도-그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남자에 대한 동경- 역시 반복되고 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세밀화를 그리던 남성은 역을 설계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된 격이고, 이번 소설에 등장한 '하이다'의 경우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단편 <예스터데이>에 출연한 '기타루'가 된 격이다(솔직히 말해 <여자없는 남자들>단편은 하나 읽었다). 화자 자체는 타인으로부터 신뢰받는 인물이지만 어쩐지 밋밋하고 재미없는 존재, 그러나 그의 주변에 갑자기 등장하여 삶에 밀착한 남자들은 그와 달리 유쾌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여성들의 두 인격만큼이나 남성들의 두 인격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느끼는 분열에 대한 욕구, 두 여자 사이에서 오고가는 기분을 짐작 못하는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루키는 두 인격을 창조하는 데 탁월하다. 이 '두 인격'을 탐미하는 것이 하루키의 책을 집어들게 하는 요소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보다 심층적인 독서경험을 원한다면 빨간 책방 39, 40회 참조)

 

한때, 정말 한때, 황정은 소설을 읽지 않으려 했다. 까닭은 여백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 여백보다 글자가 더 많잖아, 하더라도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한없이 텅 비어있는 작가 같았다. 당시 나는 빡빡한 소설이 좋았다. 천운영, 조경란, 하성란 같은 여성작가들. '삶이란 이런 것'하고 보란 듯이 보여주는 여성 작가들이 좋았고,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황정은 <파씨의 입문>을 읽고 난 뒤 스스로에게 욕이 나올 뻔 했다. '뒌장, 이걸 이제서야 보다니'(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같은 후회를 했다). <백의 그림자>도 안 읽고. 이 미천한 독서. 그나저나 이 단편집에서 <대니 드 비토>와 <낙하하다>는 꼭 봐야한다. 누군가가 아직 안 읽었다면 꼭 봐야 한다. 하지만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인 <파씨의 입문>은 심약한 분이라면 자제하시는 게. 끝에 다섯 장을 남겨두고 볼 수 없었다. <파씨의 입문>을 그렇게 끝내고 동시에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아는 이에게 빌렸다. 나도 말이지, 일단 계속해보겠다는 기분, 황정은 월드에도 입성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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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쯔 2015-01-0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하루키 책을 집어드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이로군요. 하루키 장편 중에서는 전 <해변의 카프카>를 가장 좋아해요. <1Q84>도 완성도가 높은 편이고 <댄스댄스댄스>는 이제 와서 보면 좀 옛날 책 같아요. ^^
저랑 황정은 입문기가 비슷하시네요!

김토끼 2015-01-05 09:52   좋아요 0 | URL
저는 셋 다 안 읽었습니다. 이제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당분간은 다른 작가들을 좀 읽어보고 시작하려고요. 해변의 카프카부터^^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알라딘이 막 생겨서 정말 신나게 드나들었어요. 요새는 방문이 좀 뜸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놀러갈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정말 많은 분들의 글을 읽고, 그 분들이 추천한 책을 사고 그랬는데 벌써 10년이라니 세월이 아득하네요. 20주년에도 30주년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늘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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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친구와 통화하면서 문득 이런 질문을 받았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하다가)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영어에 열심인 거야?"

순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지금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아마도 영어로 뭔가 읽거나 쓰거나 말할 때 느끼는 희열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 후 여러차례 그 질문을 떠올렸는데 딱 들어맞는 대답은 구하기 힘들었다.

 

막연히 그냥 외국어는 해야될 것 같아서, 라는 생각에 토익책을 붙들고 학원에 다닌 것이 약 3년 전이었다.

올 봄에도 영어회화학원 1년치를 쿨하게 끊었다.

매일은 못 가도 일주일에 최소 2번은 갔는데, 이번 달 들어 한 달 연기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격증 공부였지만 더 심리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학원에 가는 일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침반을 듣기 시작했는데 거의 매일 1:1 수업이다.

수강생이 나뿐이라 영어로 말할 기회가 많으니 좋겠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꼭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무지 외롭다. 선생님과 나의 관계가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 같은 관계가 아니므로 1:1 수업은 한없이 쳐진다.

한 명이라도 우연히 나오면 반가워서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싶어진다.

그제서야 학원이 오직 학업을 위해서만 가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점은 학생이나 선생이나 한 쪽이 엄청난 텐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니 선생 쪽이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육에도 스타일이 있는 것이고, 나도 고집스럽게 텐션 제로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지 않은가.

 

학원은 학원이고 다시 영어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보는데 역시 답이 없다가

오늘 산책하면서 팟캣으로 김남주 번역가가 라디오에 나온 것을 들으며 그 이유를 조금 알았다.

한 달 전에 그녀의 역자 후기를 모은 <나의 프랑스식 서재>를 샀던 기억과 함께

로맹 가리, 프랑수아즈 사강의 이름 옆에 나란했던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라디오 음성으로 전해오는 김남주 번역가의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쏙쏙 들어왔던 것은

나긋나긋한 톤도 그렇지만, 모국어로 말할 때의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언어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이성적인 언어라고 한다. 무슨 국제회의 같은 곳에서는

소통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한다. 사물도 성별을 구별하여 쓰니 더 할 말이 없다.

그런 프랑스어를 번역을 하는 사람이니 자신의 표현에 대해 정확해지려고 얼마나 노력해왔겠는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고 싱싱한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내가 꿈꿔오던 것이다.

그리고 외국어에 열심인 사람 중에는 모국어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내 주변에서도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언어 구사력이 더욱 정확하다고 할까.

나에게 왜 영어 공부하느냐 물었던 친구도 꽤 예리하고 적절하게 말하는 편이다.

더 살아있는 언어, 적확하고 발랄한 언어로 말하고 싶은 의지가 해도 해도 늘지 않는 외국어를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 며칠 말한대로 자격증 공부한다고 컴퓨터 용어만 봤더니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

얼른 끝내고 내가 사랑하는/할 것들에 시간을 쏟고 싶다. 물론 그 중에는 영어도 포함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아마 계속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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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철학책을 읽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문학'적 성장을 위해 철학을 부러 찾아다니는데, 나는 저항적으로 철학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니면 그런 시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어, 싫어, 하면서 피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도피. 그러나 이유있는 도피일 수 있다. 대학원에서 주구장창 읽어야 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들, 시험 준비하면서 읽은 문예사조, 미술사조, 스터디하면서 읽은 벤야민, 바르트, 푸코 등등 실은 주구장창 읽었다면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났을지모르지만 게을러 터져서 수업 전 날, 세미나 전 날 슥- 훑어보고 공부한 척 했었으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그래도 가끔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여길만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기도 했으니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들만 골라 다시 읽고 밑줄을 쳐둬야지. 밑줄을 안 쳤더니 어딜 보고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줄 읽고 열 줄 쓰려 했던 그 욕심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또 하나 나는 두꺼운 책은 읽지 않는다. 정확히 읽을 수 없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책 읽는데, 두꺼운 책은 아무리 보석 같아도, 문자그대로 무겁기만 하다. 무거운 보석은 목에 걸 수가 없으니까. 결국 얇디 얇은 책으로 눈길이 간다. 그래서 서울 올라갔다가, 혼자 쓸쓸히 내려오는 길에 구입한 '피로사회'는 부피와 무게와 디자인과 뭐랄까 그 책을 만든 출판사까지도 마음에 들어버렸다. 조그만 가방에 지갑, 핸드폰, 책만 넣고 왔다갔다하는 일주일 사이에 읽었다. 그 시기에 정말 피곤해서, 나는 왜 이렇게 맨날 피곤한거지, 비타민을 먹어도, 홍삼을 먹어도 몸이 노곤노곤하네, 아무 것도 못하겠다,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런 상태였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에서 '피로사회'를 읽는데, 신기하게도 '당신이 피로한 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입니다'하고 말하는데, 그 말 만큼은 전혀 피로하게 들리지 않았다. 


긍정성의 과잉이 당신을 지치게 한다.


맞다.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 가해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성과사회인 현대사회는 당신에게 말한다. 물론 나에게도 말한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멈추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다의 노예가 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잘못된 시스템이야, 하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계속한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불안한 이 긍정성으로 계속한다. 나 역시 할 수 있다의 노예. 할 수 없다, 그만 하자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그만'이라는 그 말은 그 다음에 무엇을 상상해야 할 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만'일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그랬다. 인간은 '중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건 배울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인가 시작하면 이내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리니까.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중단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중단을 외치는 '분노'(분노는 중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감정적 시발점이다) 대신, 중단하고 싶다는 그 간당간당한 마음, 짜증과 신경질만 남아있다. 그래서 매일 부모님을 붙들고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아니면 너무 친한 친구, 내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데 어려움 없이 자란 친구, 그런 친구한테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징징거리는 그 모습'은 귀여운 것도, 연약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폭력적이고 간사한 것인데, 이것도 계속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징징거리기'도 계속 되는걸까. 그럼 나는 할 수 없다고 믿을까. 난 할 수 없어, 안 할 거야, 못하니까, 이런 좌절로 가는 게 맞는 건가.


물론 극단적으로 대척점으로 가는 건 이상하다.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꼬장이다. 그러니까 해야 될 것은 '과'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어, 나 완전 할 수 있어. 이런 마인드를 매일매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론 피로하지,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늘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댈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잘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겠지, 이런 것이라도 마인드 컨트롤 해야겠다. 자신을 과다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밀어넣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학대의 수준이라면) 그러니까 쉴 때는 좀 쉬자. 의도하지 않게 철학책을 읽어버렸는데, 이건 정말 나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었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얇았으니까.(지하철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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