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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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 대학원 동기들과 수업 후 까페에서 수다를 나누던 평화로운 순간, 과제는 많지만 다음 수업까지는 무려 일주일이나 남았다며 한가로이 커피를 홀짝이던 그 순간, 그 질문은 방심한 옆구리를 강타하듯 기습해 들어왔다. '도대체 새들은 어디서 죽는 거지?' 동기이기는 하나 나보다 아홉인가 열 살이 많은, 철학과 출신 문학도의 공허한 울림이었다. 그 날 우리는 시 수업을 들었고 누군가 새에 대한 시를 써와 그것을 함께 읽었다. 그 시에서 새들은 어찌 알고 그 투명한 유리창을 피해 허공을 나는가, 하는 식의 문장이 있었는데 새들은 투명 유리를 허공으로 착각하고 부딪쳐 죽는 경우가 오히려 많지 않은가요, 하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골방의 시와 광장의 현실 사이 괴리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정말로 그 둘 사이 분리는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게 민감한 문제였다). 시의 낭만성은, 비현실에서 기반한 것이 아닌 거야, 현실에 땅을 짚어야 낭만도 철저해진다. 뭐 그런 답을 내리려 애쓰면서. 그 테이블에 몇 명이 모여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그 질문 '새들은 어디서 죽는가'에 대해 우리는 약간의 공방을 벌였다. 나는 '공방'이라기보다는 '감탄' 쪽에 가까워, 어떻게 그런 질문을 생각하실 수가 있냐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누군가 로맹 가리를 언급하며 '거기서 죽잖아. 페루.' 라고 농을 쳤다. 웃을 수 없는 허무한 개그였고, 웃었다면 그것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 시간들은 벌서 7년 전의 일들이 되어버렸다. 7년이라니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질문만큼은 내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해가 지날 수록 선명해졌다. '새들은 어디서 죽지?' 종종 그 질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공원을 돌다가 한국전력이 세워놓은 커다란 철제 네모 박스 위에 얼어 죽은 비둘기가 반듯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그 질문에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지만, 그 날 비둘기의 모습을 떠올리면 새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죽을지 절대 모르리라, 그러니 그 질문에는 영원히 답할 수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새를 생각할 때마다,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으로 새들은 페루에 가다, 라는 제목의 책과 연이어 로맹가리를 떠올렸다. 


로맹가리는 말하자면 '새'의 매개였다. 아니면 '새'가 로맹가리의 매개였다. 그러다가 <자기 앞의 생>을 읽은 이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매개가 되었고,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매개가 되었다. 로맹 가리에 대해서 부지런한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가 진 세버그라는 스물 다섯이나 어린 여배우와 결혼하고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며, 프랑스 외무부에서 공직을 수행했다는 것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제대로 연결되지 않을 때면 늘 그렇듯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 편하게 지나치는 습성을 발휘했다. 그는 새이면서, 에밀 아자르이고, 마성의 남자, 거짓말의 황제 그리고 공무원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리고 모든 연결의 부작용을 한 번에 관통하듯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내 삶의 의미>는 그가 죽기 몇 달 전 캐나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책표지를 철저히 살펴보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짧은 소설이라고 착각하고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건 그냥 로맹 가리 그 자체였고, 손쉽게 뒤표지를 돌려 읽어보니 그렇단다. 정말 이건 그냥 로맹가리의 이야기였다. 삶을 돌아보는 긴 유서와 같은 짧은 책. 단숨에 후루룩 읽어버리자 몇 십 년이 흘러 있었고, 로맹 가리는 죽었다고 한다. 이 문장들 안에서 반짝이는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가 싶게. 맹렬한 삶의 활력이 로맹 가리 언술에 남아 있었다.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요.(117)' 권총 자살이라는 비극 앞에서, 유서와 같은 문장 앞에서, 애도하는 기분으로 문장을 숙고해본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하여, 어머니의 꿈인 '프랑스'를 살아내려는 노력이 어쩌면 로맹 가리의 추구였을까. 아마도 로맹 가리의 뼛속에 각인된 어머니의 프랑스 동경과 숭배는 그가 영원히 떨쳐 낼 수 없는 허상이었을 테다. 하지만 어머니의 꿈인 '프랑스 대사' 자리를 코앞에 두고 포기한 것을 보면 마지막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허상이 '어머니의 프랑스'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존재' 혹은 '어머니라는 여성성'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는 '훗날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여성성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118)'이라는 소망을 남긴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삶에 철저히 부딪히며, 그 맹렬한 과정이 오히려 순응적으로 보일 정도로 열정이 끊이지 않는 이 삶을 살아낸 작가는 자전적 회고의 처음과 끝을 비슷한 말로 끝맺는다. '내 삶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하시는데, 난 내가 삶을 산 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군요.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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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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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영하 산문 삼부작. 이번 시리즈는, 아주 오랜만에 다음 책을 손꼽아 기다리게 했다. 그러니까 열 다섯 살 즈음일까. 만화책을 그만 봐야겠네, 결심한 무렵 이후 책이란 형태로 나오는 것을 기다려 본 적은 별로 없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서점에서 산 책에는 '다음'이 없었으니까. '다음'이란 순간을 '약속'해주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런 약속이 있더라도 기다리고 싶은 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 책은 모처럼 기다려졌다. 김영하니까. 다소 소름이 돋지만 김영하니까, 읽고 싶었다. 띠지의 얼굴은 10년 전 프로필 사진과 조금 달라져, 주름이 보이고 늙으셨군요, 생각하게 하지만. 상관없다. 세월이 흐르고 얼굴이 조금씩 변하더라도, 날 기다리게 하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건 분명하구나, 여전히. 그 '여전히'를 지켜주었다는 것이 일단 감사하다.

<보다>는 이북으로 읽고, <말하다>부터는 책을 샀다. 책장에 안 보는 책들이 쌓여 있어서 더 이상 아무 책도 사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보다>를 읽고, 마음 속 태그가 #이건 책으로 사야해,로 바뀌었다. 앞의 두 책은 대체로 잊어버렸지만, 결국 '소설'에 대한 말들이었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당연히 '소설'이겠지만, 소설가 이전에 생활인으로서-그런데 김영하에게 소설가와 분리된 생활인이 가능한가-도 소설은 상당히 중요하다. <읽다>는 그 정점.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나온건가 싶기도 하고. 마치 보르헤스의 <칠일밤>처럼 여섯 날로 나누어진 '읽음의 세계'. 쿤데라처럼 자신이 읽어온 계보, 소설 보편적 계보를 섞어 '길잡이' 역할을 하는 교과서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소설은 그렇지 않지만, 산문은 상당히 친절하다. 정말로 당신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느껴지면서, 내가 진짜 이런 거 잘 안 하는데 이렇게 알려줄게, 이건 이거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일단 발을 들여놓도록 해요, 나도 여기까지 밖에 해줄 수가 없지만,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읽다>를 읽다보면 작가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이야기의 혼돈 속에 있는 것 같다. 왜 소설을 읽는가. 여섯 날의 챕터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생각들, 그건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돈키호테, 보바리 부인, 죄와 벌, 소송, 이방인, 셜록 홈즈, 롤리타, 파리 대왕 등을 통해서 작가는 왜 이야기들 속으로 파고 드는지, 독자는 그것을 찾아 읽고 복잡한 마음을 끌어 안은 채 책의 우주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것에 대한 지난한 계보. '첫번째 강연에서 저는 해럴드 블룸의 말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어렵사리 지켜오던 자아의 일부가 분열됩니다. 그리고 재구축됩니다. 소설이라는 자연을 탐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마냥 재미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닐겁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138쪽.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을 읽으면 자아의 일부가 분열된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잠시 혼란 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죄와 벌>을 꾸역꾸역 읽어 치우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책장을 덮고, '이게 뭔가...' 전혀 개운하지 않았던 독서경험은 재구축의 시간이었을까. 그로 인해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바뀌고 있었을까.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고유한 헤멤,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104쪽. 나는 이 고유한 내면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읽었다. 어떤 날은 소설만이 치유인 것처럼 느껴져, 세상에 있을 법한 일들을 읽는 것이 가장 나약한 날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그것은 독서로 이루어진 내면의 '겹'들이, 힘든 날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빠르게 읽으려 하지 않았는데, 읽다보니 가속도가 붙어서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책을 모두 읽고 말았다. 차마 밑줄 긋지 못한 문장들도 있었다. 가령 176쪽.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가해자'의 입장에 둘 줄 모르는 인간이므로 나는,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면서 주저했다. 정말로 어떤 문장들은 무서워서 밑줄 긋지 못했다. 그동안 내 입을 떠나 떠돌던 말들을, '가해가 됐을지 모를 말들을' 주워담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뒷골을 때린 건 185쪽. '한때 누구나 고전이라고 생각했던 작품들, 예를 들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든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같은 작품이 최근에는 누락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 고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고전 목록이 변동되고 있다. 김영하가 지적한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열두 살에 동네 책방에서 고심하여 고른, 어린이 시절 나의 자부심이었던 <달과 6펜스>와 <좁은 문>이라니. 무슨 말인지 몰라도 눈으로 활자를 찍어가듯 읽었는데. 내가 그 뒤로 만화책으로 눈을 돌린 건, 다 예견되어 있던 거라고 위로하기로 했다. 그게 20세기 이후 시대상에는 맞지 않는 뭔가 있던 거라고. 

'내가 읽은 것들이 작가로서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결정했다.'214쪽. 작가의 말. 문득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준. 그건 단순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거나, 미래에 내가 좋아할 책을 읽었거나.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이들을 나는 언제나 기다렸다/린다. 놓치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책을 읽는 까닭은, 그런 사람들을 자꾸 만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도 그런 심정으로 기다렸다. 이번 산문집 정말 즐거웠다. 2015년, 덕분에 한 발 나아갔다. 

1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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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존
조셉 고든-레빗, 줄리안 무어 외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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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조셉 고든 레빗과 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성장'이네 '변화'네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건 엄연히 따지면 '나의' 이야기이고, 내가 종종 훔쳐보는 '타인'의 이야기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없이 쏟아지는 '의식적으로 예쁜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정도면 나 잘 사는 거지(너희보다)? 라는 의식적 물음을 드러내지 않는 교묘한 '푸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성공적으로 보이는' 삶에 조금씩 질려가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나친 의미부여일지도 모르지만, 시종일관 단내인지 쉰내인지 모를 것을 풍기는 커플 돈 존과 바바라 사이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장면이란 그런 것이다. '내 성공적인, 이미지적인 삶에, 당신은 부합해야 한다'는 강요.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 대한 '강압'은 '이별'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하게도 헤어졌고, 영화를 보고나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바바라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레빗)은 적어도 그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갑갑함을 흐리게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갑자기 줄리언 무어가 두둥 나타나서 성적으로, 정신적으로 해갈해준다는 무리수인 듯 무리수 아닌 무리수 같은 설정이 있긴 하다. 


* 야할 거라는 기대로 영화를 보면 낭패다. 별로 야하지 않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어쩌면 조금 슬프면서 혼란스러울 수 있다.(마지막에 마음에 아련하게 저려 오는데, 해피엔딩인데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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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129쪽 진짜 찹쌀떡 인형이란 것이 있나 해서 찾아봤는데 인형 같은 미모 찹쌀떡 같은 피부 이런 아이들이 검색되어 나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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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리샴은 한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보니 공부삼아 원서로 읽었다. 일본 서점 들렀을 때 토익 점수별로 원서가 비치되어 있던데 이건 500~600정도. 음, 그렇지만 시험용 공부로 얻은 점수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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