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 121호가 출간되었습니다. 


이번 121호에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과학, 누구를 위한 어떤 과학인가>라는 주제 아래


4분의 관련 전문가 필자 선생님들의 주목할 만한 원고가 실렸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121호 "권두언"을 여기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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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권두언

 

전문가 중심주의를 넘어 시민참여의 과학으로


 

지난 824일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제1원전 내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함으로써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국내외의 뜨거운 논란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쟁점은 결코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일본이 다핵종저감설비APLS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처리한 후 희석하여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20214월 이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방류를 허용할 것이냐 아니면 반대할 것이냐 하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방류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은 대체적으로 도쿄전력의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처리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 방류된 처리수는 인간의 신체를 비롯한 생태계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의 안전성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이런 이유로 오염수 방류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윤석열 정부도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과학적인 괴담을 퍼뜨리는 무지몽매한 이들로 비난하면서 오염수 방류는 과학에 따라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요컨대 오염수 방류 결정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고, 그 결정을 찬성하는 이들(일본정부, IAEA, 한국정부 등)도 바로 과학의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의 비과학적인세력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연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과연 어떤 과학이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하는 문제다.


서양에서 과학은 고대 그리스 이래 참된 인식의 대명사처럼 간주되어 왔으며, 특히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과학은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의 권리를 부여받아왔다. 칸트 철학이 잘 보여주듯 근대 철학은 과학(칸트에게는 뉴턴)의 진리 인식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고, 갈릴레이, 뉴턴, 라부아지에,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근대 과학의 거장들은 진리의 순수한 사도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말만큼 진리 탐구의 결정체로서 과학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문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학제 연구로 발전해온 과학기술학(STS)이 잘 보여주었고, 국내에서도 김동광 선생이나 김명진 선생을 비롯한 훌륭한 연구자들의 노작()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듯이, (그 이전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20세기에,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냉전의 시대에 이러한 과학 및 과학자 상은 신화에 가깝다. 왜냐하면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서의 현대 과학 연구의 주요 행위자는 더 이상 개별 과학자가 아니라 정부, 기업, 대학이며, 오늘날의 과학 연구는 주로 거대 기업의 주도로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물론 헌신적이고 진실한 과학 연구자들의 존재와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로서의 과학연구를 대표하는 것이 원자폭탄 제조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나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 과정에서 탄생한 아폴로 계획 같은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역시 테크노사이언스로서 현대 과학 연구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규모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로 전개되는 과학 연구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나 위험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된 이유들이 존재하는데, 맨해튼 프로젝트나 아폴로 계획이 잘 보여주듯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막강한 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안보적인 동기가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더 노골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상업화에 따른 경제적 이익 추구(특허나 지적 재산권의 확보 등)도 본질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쪽이 한국원자력학회 및 그 구성원들이라는 사실은 원자력 연구가 대표적인 테크노사이언스 중 하나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기조와 달리 오염수 방류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심지어 홍보하고 있는 상황은,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이라는 경제적 동기를 넘어 한일 동맹의 추구라는 군사 안보적인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경제정치군사안보적인 동기들에서 자유로운 테크노사이언스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 및 그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방식은 자못 놀라운 것인데, 오염수 방류 결정이 초래할 보건적환경적 위험성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최고위 당국자가 그것을 비과학적인 괴담으로 몰아붙이면서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일체의 반대와 비판을 막무가내로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환경과 개발을 위한 유엔각료회의에서 제출된 리우선언이나 1998년 환경운동가들 및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윙스프레드(Wingspread) 선언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인간의 건강이나 환경에 위해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전주의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대중이 아닌 그 활동의 지지자들이 증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 정식화된 바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일본 내 피해 예상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국내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및 태평양 연안 도서국들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그 시민들과의 충분한 사전 협의와 최대한 신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었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는,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을 넘어, 무엇보다도 이 방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최대한 비판적이고 신중한 검증 및 대응 방식을 채택했어야 하지만, 속전속결로 일본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그 결정의 정당성을 스스로 홍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해된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실로 오염수 방류 결정을 둘러싼 그동안의 전개과정은 현재의 사태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냉전반공주의를 정당화하고 그 이념 아래 결속한 카르텔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려는 계산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해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정부도 자신의 비판 세력을 괴담을 유포하는 불순분자로 치부하고 있는데, 환경사학자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나 제이콥 햄블린의 󰡔저주받은 원자󰡕 같은 냉전 시대 핵개발 역사에 관한 비판적 저작들은 이러한 공통적인 태도가 사실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전개된 핵개발의 역사에서 좌우 양 진영을 막론하고 각 국의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과학자들이 일관되게 견지한 태도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한껏 내세우면서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한 도쿄 전력이나 IAEA의 보고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 연원을 따져보는 일이다. 그것은 이번 사태가 일회적이거나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인 게 아니라, 핵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온 보건적생태적 재앙의 한 단면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제정치군사안보 카르텔에 묶인 전문가 중심주의과학을 넘어 시민참여적 과학을 모색하는 길은 어떻게 가능한지 사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가습기 참사 이래로 오만한 과학의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괴담으로 묵살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왔다면 더 그럴 것이다. 이번 특집은 이런 의도 아래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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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집에는 네 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먼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냉전기 과학사 연구자인 우동현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핵개발의 역사를 핵폐기물 재난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9457월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수행된 이래 지구 각지에서는 2천회 이상의 핵실험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구를 상대로 한 핵전쟁이라고 할 만큼 인간의 건강 및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산출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고도의 과학을 필요로 하는 핵개발이 처음부터 국가안보와 결부되었으며, 정책결정자들과 과학 전문가들이 핵 관련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가 빼어나게 보여준 것처럼, 냉전 시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음에도 미국과 소련은 핵개발만이 아니라 핵폐기물 처리과정에서도 동일한 원칙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모방했다. ‘자연의 싱크대라는 논리 아래 그들은 핵폐기물을 자연에 무단 투기함으로써 처리 비용을 절감하려고 했고, 그대로 놔두면 자연이 방사능을 희석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선생은 더 나아가 핵개발과 핵폐기물 처리는 식민주의를 전제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라늄 채굴부터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이르기까지 핵 활동이 수행되는 구조를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다양한 착취 체계를 일컫는 핵 식민주의는 중심부의 이익 및 상호 경쟁을 위해 이루어지는 핵개발과 핵폐기물 처리의 비용과 피해를 뒤집어쓰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선생이 전해주는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이 위치한 함경북도 길주군 주민들 사이에 떠돈다는 귀신병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유럽과 달리 고리핵발전소 반경 30km 이내 34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수소폭발 당시 반경 30km 이내 거주하던 주민은 17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은 원자력 안전 시민감시를 위한 NGO 전문가로 활동해온 이정윤 선생이 집필해주었다.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해준 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가 과연 IAEA와 일본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 및 일부 과학자들이 강변하는 것처럼 과학적근거에 따라 작성되었는지 세심하게 따져보고 있다. 선생은 IAEA의 보고서가 사실 일본 자료를 아무런 독자적인 검증 과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며, 따라서 단지 과학이라는 형식에 맞춘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도쿄원전의 오염수 방류가 방사선 방호 및 안전성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는지 검토해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곧 폐로 원전에서의 오염수 배출에 관한 국제적인 안전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가운데 일본 국내 기준에 입각하여 방류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주변 당사국 및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과 절차가 제대로 마련되지도 않고 있다.


또한 안전을 위한 리더십과 관리 측면에서도 오염수 배출 조건을 비롯한 주요 사항에 대해 독립적인 검증 체계를 마련해야 함에도 그것이 누락되어 있다. 아울러 방사선 방호가 최고 수준의 안전을 제공하도록 최적화되어야 하지만, 이것에 관한 독립 검증 과정이나 통제되지 않은 방사능 배출에 대한 평가도 빠져 있고, 방사선 확산 해석에서도 자의적인 기준 설정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과연 도쿄 전력의 방사선 방호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신뢰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및 미래 세대의 건강과 환경 보호 문제에서도 도쿄 전력의 주장을 검증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ALPS 시설 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예방 대책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있다. IAEA 보고서에는 장기적인 생태환경에 대한 검토가 빠져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IAEA 보고서는 도쿄 전력의 배출을 지원하는 보고서일 뿐 과학적이며 독립적임 검토 보고서로 볼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보고서를 과학적이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세 번째 글에서 인류학자인 오은정 선생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전개된 재난의 연대기를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상정외(), 전원완전상실이라는 키워드는 후쿠시마 원자력 폭발 사고가 원전 설계 당시의 가정을 초과하고 스리마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넘어서는 핵재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것을 오히려 도쿄전력의 경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만들어주었다. 피난과 살처분이라는 키워드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주민들 및 가축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희생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마음의 부흥, 후쿠시마 혁신 해안 같은 키워드들이다. 이런 끔찍한 핵재난을 겪었음에도 일본 정부는, 비판적인 학자들이 지적하듯 이것을 일본의 풍요로운 전후를 종결짓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경제부흥의 계기로 삼으려고 했으며,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는 주민들에게 마음의 부흥을 강권하면서 과도한 공포는 괴담일 뿐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선생은 이 기반 위에서 일본 정부가 동일본대지진으로 황폐화된 지역을 신산업단지로 조성하려는 후쿠시마 혁신 해안 프로젝트를 전개하면서, 참혹한 재난을 재난 극복의 서사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원전 사고로 인해 피해를 겪은 주민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거나 고향을 등져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됐다. 원전 사고가 초래한 느린 폭력은 후쿠시마 원전 주변의 주민들에게 비가시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테크노사이언스 카르텔은 새로운 경제 부흥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지적하듯 우리가 이것과 똑같은 연대기를 쓰게 될 날이 도래하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글에서 과학기술사회학자인 이영희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해앙 방류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 결정을 비판하는 이들의 반대를 괴담으로 치부하면서 과학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고 정당한 태도인가를 따져보고 있다.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을 과연 과학괴담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오염수 방류를 우려하는 것에는 상당한 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정윤 선생이 상세하게 해명한 바와 같이 도쿄 전력의 오염수 처리 과정을 신뢰하기 어려울뿐더러, ALPS로 거르지 못하는 삼중수소가 인간의 건강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이 제시한 자료에만 근거를 둔 IAEA의 안전성 검증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과학의 이름으로 이런 문제제기를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데, 선생은 이러한 과학과 괴담의 대립이 이미 광우병 사태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도 동일하게 제시된 바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위험평가와 관련된 판단의 권리를 독점적으로 귀속시키는 전문가주의로 인해 생겨난 결과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전문가주의에 맞서 선생은 핵폐기물 처리와 같이 사회적환경적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전주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원칙을 견지하는 것은 자연히 인식론적 불확실성과 관련된 문제에 폭넓은 이해 당사자들을 비롯한 시민의 참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관점과 연결된다. 선생은 그것만이, 테크노사이언스 카르텔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쉬운 오만의 과학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에 부응하는 겸허의 과학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이번 특집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오염수 방류에 대해 찬성해야 하는지 반대해야 하는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이 아니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 역사와 기저의 논리를 이해하는 일이며, 가능한 한도 내에서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 대비하는 일이다. 특집에 수록된 네 편의 빼어난 글들은 앞으로 이 문제에 관한 중요한 판단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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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꼭지에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세 편의 글을 수록했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최근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글들을 특집에 대한 보론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먼저 본지의 편집위원인 강성현 선생은 홍범도 장군 흉상 퇴출 논란의 배후에는 2004~2005년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뉴라이트의 역사전쟁이 존재하고 있음을 세심하게 밝히고 있다. 2005년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강조, 엘리트주의와 법치주의 중시, 반일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북한 인권과 민주화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역사전쟁을 개시한 바 있다. 그 핵심은 한국의 반일민족주의를 약화시키고 그 대신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사실은 냉전 반공주의) 중심의 중등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선생은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좌절되면서 와해된 것처럼 보였던 뉴라이트가 현 정부의 이념적 실세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면서 도처에서 4차 역사전쟁을 시도하고 있으며, 홍범도 장군 흉상 퇴출 논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인터넷 언론의 기사나 칼럼, 유튜브 강의, 전문가들을 배제한 자기들만의 유사-학술회의를 통해 세를 확장하고 있는 뉴라이트 운동은 일본과 미국(램지어)의 극우 역사 부정주의자들과 초국가주의적 네트워크를 결성한 데다가 권력을 등에 업은 채 본격적인 역사 날조와 왜곡을 일삼으면서 거침없는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역사전쟁이 교육 영역을 넘어 정치와 문화 전반의 사상전과 문화전쟁으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각별한 대응이 필요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두 번째 글에서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김종대 선생은 8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일 삼국 정상회담이 동북아 질서의 어떤 변화를 함축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선생에 따르면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동북아 질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직면한 미국이 한일 삼국의 경제안보 협력을 상시화제도화함으로써 기존의 양자 동맹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다자주의 집단 방위체제 구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것은 지정학의 범위를 넘어서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기존의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시도로 확장되고 있는데, 인플레감축법(IRA)이나 칩과 과학법 등은 이를 위한 법적 토대로 기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미국 바깥에 존재하는 세력(중국, 러시아)을 타자화하는 동아시아 질서를 지향하면서 중국을 주요 위협세력으로 설정하는 집단방위체제 구축의 시도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의제는 대만해협 분쟁에 대비한 한미일 삼국의 공동 비상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며, 한반도 위기시에 다국적군의 참여를 보장하는 유엔사 강화를 모색하고 더 나아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통합하는 극동군사령부창설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한일 간의 군사정보 공유에서 출발하는 한미일 삼국의 군사협력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불가피하게 북--러로 이어지는 반대 동맹의 구축을 촉발할 위험을 안고 있다. 선생은 이렇게 되면 지난 30년 간 북한을 관리해온 한국 외교의 기본틀이 붕괴되고 안보 비용이 급격히 증대할 위험이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 대만 문제 전문가인 장영희 선생은 2024년 초에 치러질 대만총통선거를 앞둔 대만의 여론 흐름과 중국-대만의 양안관계의 미래를 살펴보고 있다. 작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대만은 향후 발생할 또 다른 전쟁의 유력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면서 동아시아 정세의 긴장의 진원지가 되어 왔다. 선생은 대만 내부에서는, 한편으로 현재와 같은 준독립상태를 유지하면서 민주적 일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여론의 흐름이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대만해협에서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만을 보호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움직임이 공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 지속을 가장 중요한 정치외교적 의제로 삼으면서 동시에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양가적인 태도로 표현된다.


선생에 따르면 이러한 쟁점은 총통 선거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4명의 주요 후보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식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준다. 집권 민진당의 후보가 중국이 제일 경원하는 친미적인 입장을 표방한다면, 야당인 국민당 후보는 대만의 통일파와 베이징이 제일 선호하는 후보이며, 나머지 두 명의 후보는 독자적인 당선보다는 후보 단일화를 통해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네 후보 모두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양가적 태도야말로 내년 총통 선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곧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비토되지 않을 수 있는 입장을 표방해야 최대의 득표를 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중국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지만 중국과 친한 후보여서는 안 되는 모순적 상황을 잘 헤쳐나가는 것이 네 명의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은 중국이 조급하게 통일전선전술의 분할 지배에 입각하여 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시도할 경우 대만의 민심은 더욱 중국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며, 이는 중국이 원하는 평화통일을 더욱 더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중국은 오히려 일국양제와 같은 중앙집권적 연방제 방식이 아니라 국가연합과 같은 유연한 통일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세 필자의 글은 급변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를 자주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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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는 올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중국의 위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한 백원담 󰡔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의 대담을 수록했다. 위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주목할 만한 평론을 해온 백원담 선생은 솜씨 좋게 위화 작품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면서 대담을 이끌어나가고, 위화 선생은 특유의 인간미와 유머감각을 곁들이면서 자신의 작품에 관해 흥미 있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대담 원청에서 살아가기 또는 글쓰기󰡔황해문화󰡕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창작 지면에도 풍성한 시와 소설 작품이 수록되었다. 진은영 시인이 한국과 호주 여성 시인 간 교류를 통한 소중한 작업의 결과물로서 시를 보내왔으며, 손유미, 이필, 정우신, 김원호 시인도 값진 작품을 전해주었다. 소설로는 조용호 작가의 등불이 수록되었다.


󰡔황해문화󰡕가 자랑하는 문화비평은 이번 호에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지하고 유익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있다. 특히 이번 문화비평은 전체 특집 주제와 관련하여 생태와 평화, 그리고 음악을 특집 주제로 삼고 있으며, 서정민갑, 최경숙, 나도원 선생이 통찰력 있는 글을 싣고 있다. 보호출산제라고 불리는 익명출산제도와 관련된 나영 선생의 비판적 문제제기와 현 정부의 언론장악에 관한 김서중 선생의 매서운 비평, 인천상륙작전을 전승기념행사로 상품화하려는 인천시의 시도에 대한 이희환 선생의 시의적인 비평을 비롯한 다른 문화비평들도 꼭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서평지면에도 주목할 만한 저작들에 대한 값진 서평들이 수록되었다. 우선 테마서평에서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소장 김인덕 선생은 올해 100주년이 되는 1923년 관동대지진에 관한 두 편의 저작을 살펴보고 있다. 김응교 선생의 백 년 동안의 증언: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과 와타나베 노부유키 선생의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을 읽으면서 선생은 관동대지진의 현재성을 확인하고 있다. 서평에는 세 권의 책을 다루고 있다. 국문학자 정종현 선생은 김남일 작가의 노작인 󰡔한국근대문학기행󰡕 4부작에서 문학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사랑을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으며, 역사학자 이세영 선생은 재미 역사학자인 김수지 선생의 󰡔혁명과 일상󰡕을 김재웅 선생의 󰡔고백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값진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옥창준 선생은 제3세계에 관한 한국의 연구사를 배경으로 국제정치학자인 김태균 선생의 반둥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정치사회학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다.

 

***

 

20222월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난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날이 갈수록 극단적 폭력으로 얼룩진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마스가 잔인한 기습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을 살해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간 행위는 마땅히 테러리즘으로 비판받아야겠지만, 그 이후 전개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복수전은 참혹함의 극치라고 할 만큼 반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학살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유엔과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책임 있는 국가들(우리나라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다)은 한시라도 빨리 휴전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국내의 여러 단체와 개인들도 정파적 입장과 상관없이 잔인한 학살행위가 중단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처럼 극단적 폭력과 거기에 맞선 또 다른 극단적 대항폭력이 서로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전쟁의 연쇄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아래 깔려 있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위험의 외주화 속에서 기계에 끼어 숨져간 비정규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겹쳐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이번 호 특집과 연결된 김흥구 작가의 주목할 만한 포토 에세이에 실린 후쿠시마 원전 폭발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폐허가 된 마을과 공장, 대피소에 고단한 몸을 누인 주민들, 기름으로 뒤덮인 새의 모습, 주인 잃은 책가방 ...)을 보노라면, 강대국들의 치열한 핵개발 경쟁 속에서 지금까지 지구와 인간, 생명체들이 겪어온 참상이 전쟁의 폭력 및 위험노동의 비극과 무관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또한 후쿠시마의 사진들이, 국내 원전 및 그 주변 마을과 주민들의 사진들과 불길하게도 과거와 미래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환각일 뿐인가? 이것은 또 하나의 괴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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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이화철학향연에서 강연을 하나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 주제는 <스피노자, 들뢰즈, 마수미: "정동"이론 비판>입니다. 


강연 날짜는 11월 30일 목요일 저녁 7시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화에대 철학연구소에 연락헤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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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연구공간 수이재에서 12월 2일 토요일에 제25회 철학자 순례 학술모임을 개최합니다. 


이번 주제는 <평등과 공동체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입니다.


저도 이번 모임에서 강연을 하나 하게 됐습니다. 


온, 오프를 병행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문의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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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금요일에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주최로 <우리 시대의 '최종적 어휘' - 자유, 포스트>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립니다. 저는 "포스트: 하나의 포스트 담론에서 또 다른 포스트 담론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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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인 [역사에 관한 글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을 위한 해제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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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비-역사, 알튀세르의 비-현재성: [역사에 관한 글들] 한국어판 해제

 

 

- 알튀세르의 새 유고집이 나왔군. 읽어봤어?


- 방금 읽어봤지.


- 그래 어떤 거 같아?


- , 놀랐지. 아니 어쩌면 그렇게 놀랄 것도 없겠지. 왜냐하면 읽기 전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놀랍지만 놀랄 것도 없다 ... 어떤 점이 그렇지?


- 마치 이 책과 우리 시대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백 만 년 전의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게 놀라웠지. 이 유고집에 수록된 글들은 1963년에 쓴 글에서부터 1986년에 쓴 글까지 약 20여 년의 시간적 범위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 1970년대 초중반에 작성한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 실제 느낌은 수백 년은 된 것처럼 느껴져. 반면에 예컨대 발터 벤야민이 1921년에 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아니면 1940년에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같은 글들은, 알튀세르의 이 책보다 족히 50년 내지 30년 전에 쓴 것인데도 오늘날에도 생생한 현재성이 느껴지지. 그런 점이 놀라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그럴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야. 알튀세르의 다른 유고집, 예컨대 [검은 소]나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같은 것을 읽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이미 지나간 시대의 지나간 언어로 말하고 너무 낡은 이론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이지.


- 아 그렇군. 그건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겠지? 알튀세르는 말하자면,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철학자들(들뢰즈,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등)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니까 말이야.


알튀세르는 몽테스키외에 관한 훌륭한 작은 책을 썼고[Louis Althusser, Montesquieu, la politique et l’histoire, PUF, 1959; 루이 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라캉 정신분석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썼고[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1964),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IMEC/Stock, 1993; 프로이트와 라캉, 김동수 옮김, 󰡔아미엥에서의 주장󰡕, , 1991.], 피콜로 극단에 관한 비범한 비평을 했고[Louis Althusser, “Le “Piccolo”, Bertolazzi et Brecht: Notes sur un théâtre matérialiste”, Pour Marx, Éditions la Découverte, 1996;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루소에 관한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고[Louis Althusser, “Sur le Contrat Social (Les décalages)”, Cahiers pour l’analyse no. 8, 1967; 루소: 사회계약에 관하여, 󰡔마키아벨리의 고독󰡕, 앞의 책. 또한 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참조.],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창적인 유고를 남겼고[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1972), Tallandier, 2009], 더욱이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심지어 논문 한 편도 발표하지 않고서도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지만[특히 Juan Domingo Sánchez Estop, Althusser et Spinoza. Détours et retours, Éditions de l'Université de Bruxelles, 2022 참조.], 그 모든 게 결국 마르크스와 관련되어 있었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창성을 사고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거쳐 우회하려고 했고,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 특히 라캉 정신분석과의 이론적 동맹을 시도하려고 했고, 관념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사고해보기 위해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썼고, 구조적인 역사 개념과 다른(결국 거기에서는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기는 어려우니까), 말하자면 정세 또는 콩종크튀르conjonctures로서의 역사를 극한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마키아벨리를 끌어들인 거지.


- 그렇지.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빼면 남는 게 없지. 그런 만큼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할까?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나 양상이 있을 테니, 너무 경제주의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교조주의적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어보면, 역사란 무엇인지,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역사와 비역사의 구별 기준은 무엇인지에 관해 철학적 논의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게 결국 생산양식으로 귀착되거든. 이렇게 말하지. “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는 하나의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308~309) 또는 이렇게도 말하지.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으로부터의 [역사-인용자 추가], 그리고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에 의한 역사, 즉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312) 마치 사회구성체나 생산양식 말고는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 그럼 미시사나 여성사 같은 건 뭐지? 또는 이주사나 환경사는?


더 나쁜 건 끊임없이 생산양식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한다는 거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레닌의 [제국주의]에 기초하여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그리고 또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역사적 동력”(272)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1980년대라면 아마 여러 사람에게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난 거 아닌가? 말 그대로 지나간 역사, 돌아오지 않을 역사지. 물론 계급에 대해 계급투쟁이 선행한다는 주장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관점과 부합하는 그럴 듯한 얘기인데,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공산주의자 선언]“[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일 뿐이다라거나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같은 명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너무 낡아빠진 얘기 아니야? 이런 본질주의, 이런 환원주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읽어보는 듯해.


- 나도 한 마디 해보자면, 생산양식이나 계급투쟁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꼭 본질주의적이라거나 환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까 자네가 지적했듯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작업을 자신의 철학 전체의 내기로 삼았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지.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 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1972),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p. 182.]


이건 알튀세르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사실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라고 하기는 어려워.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를 내고서 교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온갖 비판과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더욱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기 위해 고안해낸 과잉결정이라든가 인식론적 절단, 아니면 이데올로기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호명 같은 개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바깥에서도 널리 활용되었잖아.


그럼에도 자네와 같은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을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 또는 환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외상(, trauma)이 깊다는 뜻이겠지.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생산양식이나 생산관계 또는 계급투쟁을 말하고, 사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 논하는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실제 그런 범주들이 먼 과거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범주들, 그리고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20세기 노동자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의 상처를 망각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또 그것은 그만큼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의 이 책이 낡은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깊은 신념을 바탕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썼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 왜냐하면 자네가 말한 대로 알튀세르가 다양한 이론적 원천을 활용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비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얘기지. 1960~70년대라면 알튀세르의 이론이 새롭고 의미가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야. 오늘날에는 알튀세르의 제자뻘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옛날 얘기로 간주되고 있잖아?


더욱이 알튀세르가 아무리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해도 그는 한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교조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해. 이 책에도 나오지만 알튀세르는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생산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생산양식은 단순히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는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역사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지. 말하자면 칸트의 초월론적인 것이 알튀세르에게는 생산양식에 해당되는 거야. 무엇이 역사적인 것이고 무엇이 역사적인 게 아닌지, 수많은 사건들 내지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게 바로 생산양식이라는 것이지. 이것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정교한 이야기이긴 해도 결국 교조주의적인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결국 인종적 관계도, 성적 관계도, 그리고 생태적 위기도 모두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최종 심급에서”. 하지만 최종 심급이 가능하다고,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 아닐까?


- 나는 자네들의 이야기에 각자 일리가 있다고 봐. 한편으로 보면 알튀세르는 확실히 생산양식을 일종의 초월론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초월론적인 기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주의 또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관념론 철학과 달리 마르크스는 초월론적인 기준을 초월론적 주체나 정신에서 찾지 않고, 물질적 토대인 생산양식에서 찾았다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철학자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또 이렇게 단일한 초월론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오늘날의 사유 흐름에 비춰보면 낡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오늘날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나 생산양식에 대해,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대신 푸코를 따라 규율권력이나 생명권력, 통치성에 대해 말하거나 아니면 신유물론자들처럼 사물 그 자체의 권력(power of the things)에 대해 말하지. 또는 젠더나 성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거나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느라 바쁘지. 아니면 적녹보 연대라든가 교차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말이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리고 그것이 산출한 거대한 외상과 더불어 세계는 변화하고 사회운동도 많이 바뀌었고 아울러 사상의 조류도 크게 변화한 거지. 우리나라만 해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후에 민중민주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대신 포스트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이 사상계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가역적인 현상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20세기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돌아오지 않을 역사가 되었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게 아닐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셈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에 따라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돌아오지 않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건재해 있고, 착취와 배제,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각종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는데 말이야. 진지한 이론가나 시민이라면, 또는 적어도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또 당연히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되고, 그것은 생산양식, 생산관계, 계급투쟁 같은 질문을 수반하게 되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어휘법은 오늘날의 사상 조류와 잘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질문이나 주제는,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도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내게도 발언의 기회를 줘. 나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한 마디 해볼게. 자네는 알튀세르와 오늘날의 사상의 차이를 어휘법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심층적일 수도 있을 듯해.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작업은 이른바 언어적 전회바깥에서 진행되었는데, 포스트 담론은 결국 언어적 전회 이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담론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유행한 것은 이 때문이지.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언어적 전회의 관점에서 보면, 실재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면 생산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테면 담론 양식일 거야.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담론 양식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 그럴 수도 없고.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에 놓이게 되면 담론은 대문자 주체가 되거나 실재 그 자체가 될 텐데, 언어적 전회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따라서 담론적인 것은 인식론적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 상위의 질서에 놓이되 그 자체가 초월론적인 것은 아닌 셈이야. 이런 측면에서 보면 데리다가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antal)이라고 부른 것은 언어적 전회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지.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적인 것은 단지 고전적인 초월론 철학에서처럼 가능성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경우 담론은 단순히 방법론적 용어 이상의 것이 되지.


초월론에서 유사초월론으로의 전환은 사실 보편의 다수성과도 관련되어 있어. 보편이 단일한 것이라면 단일한 초월론적 토대(말하자면 생산양식 같은 것)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하겠지만, 다수의 보편이 문제가 된다면 과잉결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과소결정(sousdétermination)을 함께 말해야 하지. 과소결정은 바로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언어적 전회 바깥에 있었지만, 사실 그 나름의 방식대로 언어적 전회와 비견될 만한 문제설정의 전환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과잉결정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어느 시점 이후부터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함께 말하거든. 그리고 그 시점은 아마도 68의 실패 이후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하면 초기에는 어떻게 하면 혁명이 일어나는지, 혁명의 가능 조건에 관해 과잉결정 개념으로 답변하려고 했다면, 68 이후에는 어떤 조건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는지 그 불가능성의 조건을 함께 사고하려고 했으니까.


아울러 이와 더불어 알튀세르는 나름의 방식대로 다수의 보편을 사고해보려고 한 게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이 존재하는 듯해. 한편으로 알튀세르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을 반()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다수의 보편을 사고하려고 하지. 그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토픽이야.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론에 토픽의 형태를 부여한 것인데, 마르크스에게 토픽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물의 비유로 나타나지. 토픽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다수의 보편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구별”(128)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 법적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같은 곳)을 각각 독자적인 층위 내지 어떤 통일체에 내부적인 효력의 정도들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


하지만 다수의 보편에 대한 사고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우발성의 유물론이야. 이 책에서는 발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점이 잘 드러나지. 알튀세르는 공접합”(conjunction)이라는 범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한 고전적인 생산양식 이론과 비교해볼 때, 공접합 개념을 중심으로 한 우발성의 유물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돼. 하나는 생산양식의 요소들을 비동시대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거지(93쪽 이하). 이 경우에만 맹아라는 형태로 출현하는 목적론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게 가능해지거든. 다른 하나는 요소 A와 요소 B의 관계를 선형적 인과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구조적 효과에 따른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이야. 이 개념 덕분에 생산양식 내에서 상이한 요소들의 인과적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에게 구조적 통일성 내지 제약을 부여할 수 있게 되지


더욱이 알튀세르는 제한된 지대 내지 시퀀스에서 선형적 인과성의 효력을 긍정하고 있기도 하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서, 초월론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불분명하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과소결정 개념의 토대 위에서 급진적으로 탈구축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보편의 다수성을 사고할 수 있거든. 요컨대 생산관계와 인종관계, 젠더관계 또는 생태적 관계를,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의 배타적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것이지. 우발성의 유물론은 그런 사고의 싹을 함축하기는 하는데, 역으로 보면 그것은 구조적 인과성 전체의 효력을 실추시킬 위험도 지니고 있지.


그런데 이것은 알튀세르의 결함은 아니야. 우발성과 구조적 인과성을 함께 사유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거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철학적 과제인데 말이야.


-나는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어. 내게는 알튀세르가 철저하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사유하려고 한 것이 인상적이더군. 아까 자네는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오늘날 생생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 벤야민도 철저하게 패배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있지. 그가 메시아적인 것 또는 약한 메시아적 힘”(역사의 개념에 대하여2번째 테제)이라고 부른 것은 과거에 패배한 사람들이 남긴 구원이라는 항목을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색인(heimlichen Index)에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의 결을 거슬러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에 입각해서 역사를 읽어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아.


예컨대 알튀세르는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는 명제를 모든 형태들 밑에 있는 - 역사의 광대한 장을 열어젖”(136)힌 것으로 해석하지. 이것은 참으로 알튀세르다운, 이단적인 해석이지. 그에 따르면 역사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 곧 역사적 사실, 역사적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사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서구 전통 속에서 쓰인 공식적인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고 현상이야. 이것은 이를테면 역사의 좋은 측면이지. 반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의 나쁜 측면을 이러한 지배계급의 공식적인 역사 밑에서 사라진 역사, 또는 공식 역사에 의해 역사가 아닌 것으로 배제된 만큼 -역사라고 재해석하지. 따라서 마르크스가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고 말함으로써 보여준 것은 착취당하고, 압제에 신음하며, 모든 노역과 학살을 위해 과세를 부과당하고 징집되었던 대중들의 생성”, -역사가 되는 거야. 어때? 벤야민 생각과 놀랄 만큼 가까운 발상이 아닌가?


- 자네 얘기를 들으니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어. 말하자면 세 가지 유사초월론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지.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은 칸트 또는 후설적인 것이지. 원래 데리다의 철학적 원천이기도 하고. 반면 패배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으려는 벤야민의 유사초월론은 라이프니츠적인 거야. 벤야민은 지금-시간”(Jetzt-Zeit)라는 것을, 공허한 동질적 시간과 대비되는 일종의 역사의 모나드로 이해하니까 말이야. 반면 알튀세르가 과소결정 개념이나 우발성 개념을 통해, 또는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패배하거나 소멸된 것들의 비-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시사하는 것은 스피노자에 기반을 둔 유사초월론이 아닐까 싶어.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지!


- 그런데 지금까지 듣고 있자니 자네들은 아무도 문학사에 관한 대화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군. 마치 그 글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하긴 문학사는 역사라고 하기도 뭐하고 철학이라고 하기는 더 그러니,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역사에 관해 쓴 글모음에서 제대로 주목받기는 처음부터 어렵겠지. 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지만 놀라운 통찰력을 품고 있는 글이 피콜로 극단이듯이, 알튀세르의 이 책에서도 이 글이 다른 글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나는 알튀세르가 문학사의 병리학에 관해 말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 “전 세계 모든 문학의 사산아들”(58)에 관한 문학사라니! 이런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알튀세르는 이러한 문학사가 진정한 의미의 문학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사는 항상 세 가지 요소를 품고 있는데, 첫 번째가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되었던 것의 역사라면 두 번째는 문학으로 생산되고 성공했던 것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서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의 역사가 바로 그것들이지(61). 참 놀라운 생각 아닌가? 자네가 방금 전에 언급한 비-역사와도 관련되는 것이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과소결정 개념은 결국 이런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 그건 알튀세르 제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가 문학의 재생산에 관해 말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마슈레가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가?](1990) 이후로 문학 생산의 이론보다는 문학 재생산의 이론에 더 관심을 기울였지. 그리고 그건 결국 문학의 역할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공백, 빈 틈, 균열을 발견하는 것에서 찾지. 알튀세르의 생각과 아주 가까워 보여.


- 그런데 오늘날은 문학의 종언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사실 문학사는 비-문학의 역사가 된 건가? 아니면 문학의 비-역사가? 하하.


- 정리하자면, 이 책은 결국 알튀세르의 비-역사 또는 비-현재성의 증거가 되겠군.


- 사실 오늘날은 역사라고 하는 것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게 된 시대인 만큼, -역사, -현재성이라는 게 나쁘지 않겠군.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때맞지 않음, 시대에 거스름(contretemps)으로서의 비-역사인 셈이지.


- 그럼 자네가 아까 알튀세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 낡았다고 하는 것은 칭찬이겠네?


- 이봐,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지 말라고. 그건 따져봐야 아는 거라고.


-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하고 말하고 있는 거지? 자네는 누구고 자네는 또 누구인가? 우리는 과연 몇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거지?


- 그게 뭐가 중요하지? 자네는 자네가 누구인지, 자네가 몇인지 아나?


- 하긴 역사가 시작되면 모든 게 빗나가고 꼬이는 법이지. 그래서 특히 역사가들이 민족에 집착하는 건지도 모르지. 마치 그게 역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 그건 또 다른 초월론적인 것이겠지? 그들이 이 책에서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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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11-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오월의봄 근간이라고 하여 찾아봤는데 아직 출간이 되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23-11-16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 이제 막 출간됐습니다.^^

추풍오장원 2023-11-2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린트해 놓고 꼼꼼히 읽었습니다. 책 구입 전에 읽기를 잘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곰씹어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balmas 2023-11-22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2024-02-07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24-02-0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선생님 감사해요.^^ 오랜만에 댓글 주셔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