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번역 문제에 관해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고전이 된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에서처럼 심오한 언어철학에 관한 논의는 아니며, 또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이미 진부해진 문구를 되풀이하면서 번역의 어려움에 관한 개인적 소회를 털어놓자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몇 가지 중심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것이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는 점이다.

 

최근 들뢰즈나 네그리,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이들의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논문이 번역,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로서, 이들의 스피노자 연구는 이들 각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꼭 소개,연구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들의 저술이 주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번역,소개되다 보니까 번역의 질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번역에서도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물론 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을 번역한 사회과학자들의 개인적 역량을 폄훼하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만 그 분야의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하려고 할 때는 그 분야에 관한 좀더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처럼,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책들의 번역이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국역된 스피노자 관련 서적들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지만, 그 개념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걸맞게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용어들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다른 개념들의 번역 문제라든가, 국역본들의 번역의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자리에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피노자의 저서나 스피노자에 관한 저서를 번역할 때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번역할 때는 다음과 같은 원칙은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역사적,이론적 맥락을 고려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요 철학자들의 번역에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이는 좀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철학자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자신만의 고유한 용어 또는 개념들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려서부터 당대의 철학적, 지적 흐름과는 동떨어진 교육을 받았고 늦은 나이에야 거의 독학으로 당대의 선진 학문을 습득한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매우 독특한 글쓰기 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스타일이 없는 철학자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늦은 나이에 라틴어 문법을 익히고,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이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려다 보니―실제로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국어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신의 사상을 잘 표현했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매우 초보적이고 교과서적인 표현법만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들뢰즈가 잘 간파한 사실이지만, 겉보기에는 매우 건조한 수학적 논증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윤리학』의 경우에도 정의와 공리, 정리 등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합리적 논증의 글쓰기 외에도, [서문]과 주석, [부록] 등에서 나타나는 매우 격렬하고 풍자적인 논박의 글쓰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성교정론』과 『소론』,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및 『형이상학적 사유』, 『신학정치론』과 『윤리학』, 『정치론』 같은 스피노자의 저작들은 각 저작마다 상이한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의 저작 안에서도 부분별로 상이한 스타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글쓰기가 매우 의도적이고 고도로 계산된 것임을 잘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사용할 수 있는 언어나 어휘에 관해 매우 제한적인 선택의 여지밖에 없었지만, 이를 매우 적절하게, 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철학자였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많은 철학적 어휘들을 빌려오지만, 논증과정에서 이것들을 상이하게 활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제로는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전환시킨다. “실체”와 “속성”, “양태”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형상적formalis-표상적objectivus”이라는 개념쌍이나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 “원인 또는 이유causa sive ratio”라는 개념 등도 그 사례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그의 철학의 성격과도 매우 잘 들어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홉스처럼 창시적인 철학자, 곧 철학사에서 어떤 새로운 혁명적 단절을 이룩한 철학자로 볼 수는 없지만, 대신 그는 이 혁명 속에서 이 혁명을 개조하려는 철학자, 또는―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혁명 속에서 혁명을 수행하려고 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점은 데카르트나 홉스가 이룩한 혁명을 환영하고 여기에 동조하면서도[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들에 거스르는 중세 철학의 모습을 보려는 일부 해석가들의 관점은 지극히 부적절한 생각이다], 이들이 원래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데카르트나 홉스가 사용하는 어휘들과 동일하면서도 어떻게 의미가 달라지는지를 세심하게 따져봐야 하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그의 철학에서 어떤 독자적인 규정들을 부여받고 있는지 잘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여러 개념들은 그의 후배 철학자들에게 전승되면서 또한 새로운 굴절과 변화를 겪게 된다. 뒤에서 우리가 살펴볼 “adaequatio”나 “adaequatus” 같은 개념이 그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스콜라철학에서 매우 전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 개념에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지만, 다시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를 거치면서 스피노자가 부여한 것과는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 (아르노의 매개를 거쳐) 라이프니츠 및 로크에 이르는 adaequatio 개념의 의미 변용의 역사는 대륙 합리론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그리고 경험론과의 쟁점을 이해하는 데―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아직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라이프니츠 이후 adaequatio 개념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는 이유에 대한 해명은 근대 철학사를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 “규정” 개념이나 “자기원인” 개념이 헤겔에서는 매우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도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후의 이론적,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철학사 속에서 스피노자의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것임은 자명하다.

 

둘째는 스피노자 철학 체계 전체를 고려해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스피노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관해 언급했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지성교정론』에서부터 『윤리학』이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변화하지 않고 처음부터 똑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윤리학』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윤리학』으로 완성되거나 완결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각각의 저작들에 따라 상이한 의미로 쓰이는 때도 있고, 한 저작 내에서도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피노자의 사상 자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notio communis”―보통 “공통 개념”이나 “공통 관념”으로 번역되는―라는 개념은 스토아학파나 데카르트에서 나타나는 같은 단어들과 어떻게 다른지, 또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 개념의 의미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potentia”(많은 경우 “역능”으로 번역되는) 및 “potestas”(많은 경우 “권력”이나 “능력”으로 번역되는) 개념은 『지성교정론』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에서 사용될 때, 또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사용될 때 같은 의미를 갖는가 다른 의미를 갖는지, 또는 이 개념들은 『윤리학』 1부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 5부에서 사용될 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또는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religio”와 “pietas”는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동일한 의미인지 아닌지, 또 차이가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인지, 이런 점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마지막 세번째 원칙은 우리말로 된 번역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말 번역이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해서 굳이 원칙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이 세번째 원칙이 위의 두 가지 원칙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하여 우리말에 없는 용어들이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쉽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스피노자의 “potentia/puissance” 개념을 사람들은 자주 “역능”이라는 말로 옮기는데,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개념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제시해 주는지 여부―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제쳐두더라도,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이 단어를 우리말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affectus”를 “정동”으로 옮긴다든가 “appetitus”를 “욕동”으로 옮기는 것, “essentia singularis”를 “특이적 본질” 등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또 이를 옮겨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우리말에 없다면, 이는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새로운 용어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철학어휘들을 빌려 사용하면서 이 어휘들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굳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억지 단어들을 만들어내어―그런데 이것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 용어들이다―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스피노자 철학용어들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낸다면, 대중들에게 그의 철학을 널리 이해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이전의 철학 및 이후의 철학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도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쓰던 어휘들을 계속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는 이를 전혀 다른 용어로 번역한다면, 스피노자의 개념이 어떤 철학을 어떻게 변용시키고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 후대의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또 어떤 식으로 차용해서 어떤 식으로 변용시키는지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스피노자와 관련된 철학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면 말이다.

 

이런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두 가지 용어만 고찰해 보기로 하자. 내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singularis”라는 개념과, “adaequatio”나 “adaequatus”라는 개념이다[이외의 다른 개념들은 역주나 <용어해설>을 참고할 수 있으며, 스피노자의 인간학 및 정치철학과 관련된 개념들, 곧 “potentia” 및 “potestas”, “multitudo” 등과 관련된 문제는 발리바르의 『대중의 공포.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실린 <용어해설>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할 생각이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편지를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주로 “사물”이라는 의미의 res와 결합하여, 복수 형태인 “res singulares”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윤리학』에서 총 94번(2부에서만 57번) 사용되고 있으며,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 이론이나 유한양태 및 개체 일반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선 이 개념을 “특수한”이나 “특수한 사물들”과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번역은 『윤리학』에서 단 두 차례 사용되고 있는 “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res singulares”라는 스피노자의 고유 개념을 표현하는 데는 부적합하다[“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은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서 불과 4차례(『형이상학적 사유』에 1번, 『윤리학』에 2번, 『신학정치론』에 1번)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particularis”라는 단어는 『윤리학』에 한 차례, 그리고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는 불과 10번 등장할 뿐이다. 아울러 그 용례 역시 스피노자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표현하는 데는 쓰이지 않고, 데카르트 철학을 가리키거나 비전문적인 논의 맥락에서 등장할 뿐이다]. “특수한 사물들” 같은 표현은 보편, 특수, 개별이라는 스콜라철학적 분류법을 따르고 있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분류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res singulares” 같은 개념들은 이러한 분류법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뒤에서 그 이유를 살펴 보겠지만, 이 개념을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 국역본에서처럼 (일본식 용법을 따라) “개체”로 번역하거나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에서처럼 “개물”로 번역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번역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라는 들뢰즈 책의 국역본에서 이진경 교수와 권순모 씨는 스피노자 개념의 불어식 표현법인 “singularité”나 “essence singulière”라는 개념을 “특이성”과 “특이적 본질”로 번역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과 들뢰즈(가타리) 자신의 철학은―긴밀한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별개의 문제이니까, 여기서는 “특이성”이나 “특이적 본질”이라는 번역어에 관해서만 논의를 한정하면, 나로서는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 이 개념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특이성”이나 “특이적”이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사실 불어의 일상 어법에서 “singularité”나 “singulière”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하지만 많은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이 개념은 일상적인 어법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을 뿐더러,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의 의미와는 더 거리가 멀다[들뢰즈의 경우에는 수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사용하는 “singularity” 개념을 자신의 철학 안으로 적극 수용하는데, 국내 자연과학계에서는 이를 “특이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얼마간 애매성이 있긴 하지만, 들뢰즈 철학에서 “singularité”를 번역할 때는 “특이성”이라기보다는 “독특성”으로 이해해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에서 “독특한 사물들res singulares”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중세적인 “실체적 형상” 개념 및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근대적인 개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개체화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자연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corpora simplicissima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전통적인 원자 개념 또는 개체 개념과 동일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내포를 갖는다는 데 있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명칭 자체가 가리키듯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할이 불가능한 원자 또는 개체―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us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고려할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스피노자에게 이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재적인 것, 따라서 사고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에게 개체란 오히려 항상 복합적인 물체들이다. 여기서 아주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가장 단순하지만 비실재적이고, 반대로 복합 물체들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지만, 그것을 분할할 경우 그보다 더 하위의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분할-불가능한 것, 곧 개체들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부분과 전체 관계에 대해 기계론적인 합성 모델―본문에서 마슈레가 구축 개념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대신 동역학적이고 상대론적인(물리학적 의미에서)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결과다(『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의 자연학 소론과 편지 32 참조. 따라서 이를 좀더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이 물리학이 이룩한 혁신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해야 하지만, 이는 다른 논문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애매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을 일종의 위계적 체계,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서부터 하나의 개체로 표상되는 자연 전체에 이르기까지, 복잡성의 정도에 따라 순서적으로 배열되는 개체들의 체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장extensa을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는 특성(스피노자의 의미에서)에 따라 동역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 안에 내적 역동성을 부여하고, 개체들을 원초적 요소가 아닌 인과연관connexio의 (잠정적인) 결과들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위와 같은 결론,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존적인 사고상의 존재이며, 개체들은 항상 이미 복합적이라는 결론을 역설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계론적인 관점이나 목적론적인 관점으로밖에는 자연을 설명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한계―스피노자에게 이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데카르트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학적 관점을 철학적으로 좀더 정밀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독특성 개념이다.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독특한 사물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사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사물들을 독특한 사물들로 이해한다. 만약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동일한 활동에 협력하여 그것들 모두 하나의 동일한 결과의 원인이 될 때,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이런 한에서 동일한 하나의 독특한 사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의 이 정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1) 이 개념은 개념적인 또는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볼 때 유일한 것, 단독적인 것, 개체인 것은 원초적인 실재가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원인들, 따라서 어떤 규정된 관계들에서 파생된 결과라는 점을 지시한다. 곧 두번째 문장이 가리키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독특한 사물, “res singularis”란 다수의 개체들이 동역학적 인과관계 속에 개입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2) 더 나아가 이 정의는 인식론적(또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는 res singulares, 곧 독특한 사물들이나 개체들을 원초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것,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결과들만을 표상하고 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적 사유에 불과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이를 “개체”나 “개물”과 같이 번역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독특성 개념이 함축하는 비판적 효과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올바른 번역으로 볼 수 없다.

 

3) 이 정의는 또한 화용론적인 측면에서는 singularis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바로 이러한 사용을 통해 이 단어의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전제의 가상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라틴어에서 singularitas나 singularis는 말 그대로 하면 “홀로 있음”, “단독성”, “따로 떨어진”, “단 하나의” 등을 의미하며, 여성명사로 쓰인 singularis는 “과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의에서는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가 지닌 가상적 성격이 두 개의 문장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독특한 사물” 개념을 적절하게 번역하려면 이러한 효과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스피노자 철학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의 글쓰기의 고유성 역시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여기서 스피노자 철학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곧 이러한 내적 균열의 전략은 결국 계속해서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여기에 손상을 줄지는 몰라도 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전체적으로 데카르트와 홉스라는 근대 철학의 두 시조가 만들어놓은 이론적,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서 출발하여 이를 내재적으로 교정하고 개조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없었다면,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또는 적어도 그 합리적인 표현방식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이들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또한 스피노자가 비록 이들과는 매우 상이한 철학적 노선을 잠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직 그것을 현행적으로 전개하고 표출할 만한 개념적 장치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이론적 잠재력을 발굴해서 온전하게 전개시키려는 이론적 노력이 바로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발리바르나 네그리 등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 철학을, 그것의 고유한 한계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스피노자 철학은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파악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 철학을 독자적으로 전유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adaequatio 또는―이 명사는 스피노자 저작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adaequatus나 adaequate라는 개념을 살펴 보자. 강영계 교수가 번역한 『에티카』에서 이 개념은 “타당한”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는 “적실適實한”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은 후설의 현상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국내의 현상학자들은 이를 “충전성充全性”, “충전적充全的”이라고 옮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일본식 번역어로서[이를 우리말의 “충전充電”, 곧 “전기를 축적한다”는 단어나 “충전充塡”, 곧 “빈 곳이나 공간 따위를 메움”이라는 단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는 현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윤리학』 번역에서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상학의 경우라면 몰라도, 적어도 『윤리학』 번역에서 이런 식의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윤리학』 국역본에서 쓰이고 있는 “타당한”이라는 번역은 매우 특이해서, 역자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옮겼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실한”이라는 말은 얼마간 절충적인―내가 왜 절충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번역어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번역어는 『윤리학』 국역본의 “타당한”이라는 용어나 국내에서 일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이유는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adaequatus라는 개념이 거리를 두는 “대상과의 일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적합”이라는 말보다는 “內實”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적실”이라는 말이 스피노자의 adaequatus 개념을 표현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적합”보다는 “적실”이 더 적절한 표현일까? 여기에 관해 역자들은 아무런 해명이 없는데, 사실 이는 대부분의 번역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을 번역한 박기순 씨는 예외다.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번역어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는 “역주”나 <옮긴이 해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개념 번역에 관한 좋은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adaequatus나 adaequate는 “적합한”이나 “적합하게”로 번역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이 번역본에서도 줄곧 이 역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 역어가 적절한, 또는 적합한 번역어인가?

 

서양 철학사에서 adaequatus나 adaequatio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관한 전통적인 규정에서 유래한다[물론 관념과 대상, 언어와 실재 사이의 일치에서 진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오래된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adaequatio 또는 adaequatus라는 용어가 도입된 유래를 고려하고 있을 뿐이다]. 곧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De veritate q.1, a.1; De veritate: Premiere question disputée de la vérité, Vrin, 2002, p.54)로 규정하는데, 이 때의 adaequatio라는 단어는 ad-aequare,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나 이 책에서 마슈레는 마치 adaequatus가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개념인 것처럼, 또는 데카르트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또는 그런 인상을 주고 있지만), 사실은 데카르트에서도 이 개념은 매우 체계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 다만 데카르트에서는 이 개념이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핵심 저작들에는 나타나지 않고, 『“성찰” 반박에 대한 답변』이나 『뷔르만과의 대화Entretien avec Burman』 같은 곳들 또는 일부 편지들에서 드물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아퀴나스처럼 “동등하게 만들다”, 또는 “적합하다”는 의미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cognitio adaequata rei”은 대상이 되는 사물과 완전히 일치하는 인식, 곧 “알려진 사물 속에 실존하는 모든 특성들을 포괄”(『“성찰” 네번째 논박에 대한 답변』; AT판 7권, p.220)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경우에만 인식과 인식된 사물 사이에는 완전한 동등성adaequatio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근원적 양의성equivocité이라는 관점에서 이 개념에 고유한 신학적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결성completio과 완전성perfectio 개념의 구분이다. 곧 데카르트는 유한한 피조물에게 적합한 인식, 사물이 지닌 특성들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의미의 적합한 인식은 오직 신에게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적합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유한한 지성에게 참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참된 인식을 위해 꼭 적합한 인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은 얼마든지 완결된 인식, 곧 다른 관념들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AT판 7권 p.223 이하 참조).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적합한 인식을 여전히 사물과 관념, 사물과 표상을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만, 신과 피조물 사이에 적합한 인식과 완결된 인식, 또는 명석판명한 인식의 차이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지성교정론』 같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말년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곳은 『윤리학』 2부 정의 4이다. “나는 대상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내생적 특성 또는 특징을 갖고 있는 관념을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는 이 정의에 다음과 같은 “해명”을 덧붙이고 있다. “나는 외생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생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우선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과 “합치convenientia”라는 개념을, 각각 참된 관념의 내생적 특징과 외생적 특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적합한 관념은 대상과의 합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미 1부 공리 6에서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인 한에서 대상과의 합치라는 특성을 항상 이미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를 합치와 구분하여 말하려는 바는, 합치는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곧 스피노자의 적합성 개념의 핵심은 참된 관념을 참된 관념으로 만들어주는 내생적 특징, 또는 내재적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이를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데카르트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좀더 지적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먼저 스피노자가 adaequatus 개념과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이 개념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동등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적합한 인식, 곧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 역시 공유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22 이하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에 관한 논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데카르트가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을 설정하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는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무한자와 유한자, 실체와 양태 사이에 일의성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에 가깝게 말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무한 지성과 “동등하게 됨”으로써, 곧 적합한 원인causa adaequata(3부 정의 1)이 됨으로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 곧 능동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은 또한 그 나름대로의 난점을 지니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adaequatio 또는 adaequatus 개념은 원래 이 개념에 부여된 의미,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를 계속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사물과 표상, 또는 사물과 개념이 동등하게 되는지, 적합하게 되는지, 또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지에 관해서 그럴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철학사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러한 흐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특성을 적합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용어상의 통일성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두 개의 개념에 관해 얼마간 장황하게―또는 너무 간략하게―논의했지만, 우리가 이처럼 긴 지면을 할애해서 이 문제를 논의한 목적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폄훼하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스피노자라는―또는 다른 어떤 철학자나 이론가이든 간에―서양의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는 한 철학자, 하지만 국내에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못해온 철학자를 좀더 의미있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간략하게나마 점검해 보자는 데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외국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을 소개하고 전유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값진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덕분에 국내의 지적인 환경이 놀랄 만큼 풍요로워졌다. 이제 그 노력들을 스피노자를 비롯한 다른 사상가들을 수용하고 전유하는 데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사장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3년 전에 초역을 마쳤지만, 그 동안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다가 전응주 사장님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철학과 관련하여 상업성을 노린 졸속 출판과 엉터리 번역이 횡행하는 세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책을 엄선하고 정성스러운 편집을 고집하는 전사장님의 이해와 배려가 없었다면 이 책이 이처럼 빛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이북스 직원 여러분들, 특히 서영심 편집장님과 김현경 씨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처음 이제이북스에서는 원전을 일일이 대조해서 교정을 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으레 내세우는 말이거니 했지만, 실제로 교정을 보면서 이 말이 전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실감했다. 국내에 생소한 스피노자 철학의 원고를 붙들고 오래 고생했을 이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1999년 겨울에서 2000년 여름까지 이 책과 관련한 공부모임에 참석해서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번역과 관련해서도 매우 유용한 제안을 해준 김문수, 김은주, 박상욱, 안소현, 이찬웅, 조현수, 한형식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루한 번역과 힘에 부치는 공부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구입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책에 한 문장씩 서툴게 번역하던 게 1992년 여름이었고,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쁨이 결국 스피노자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기쁨을 많은 독자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큰 보람이 없겠다.

 

 

200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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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문제설정

 

 

이러한 지적,제도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의미를 좀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출간된 1979년의 프랑스는 매우 첨예한 갈등이 지배한 시기였다.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좌파 내부에서도 유로공산주의의 지지자들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구조주의 진영 내부에서 신철학파를 둘러싸고 푸코와 들뢰즈가 결별하고, 구조주의자들(특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격렬하게 제기되고, 다시 알튀세르에 대한 마오주의적 비판(바디우를 중심으로 한)이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등 여러 전선에 걸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슈레가 속해 있던 알튀세르의 노선 내부에서 보면 이 시기는 60년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가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는 시기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음을 선언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의 시도와 다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하려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막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마슈레와 발리바르는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이론적 정세에 대한 개입의 시도로 읽어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기본 화두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구분되는 유물변증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데 있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헤겔 자신에 의해 재구성된 스피노자의 모습을 검토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마슈레는 이처럼 헤겔의 재구성에 따라 제시된 이 세 가지 쟁점, 곧 기하학적 방법의 문제와 속성의 문제,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정식의 문제를 2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검토를 통해 마슈레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헤겔식의 변증법과 구분되는 새로운 변증법의 가능성이다. 곧 헤겔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궁극적인 잠재력을 끝까지 전개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비판은 헤겔 자신의 무의식적 가상에 따라 투사된 상상적인 스피노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헤겔은 스피노자라는 이 유령, “헤겔 자신의 체계를 의문시하는” 어떤 사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상에 의해 드러난 자신의 체계의 한계를 상상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상상적인 스피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 나타나는 위계적 종속관계에서 이러한 쟁점을 해명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다. 곧 헤겔에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의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 안에 통합된 모든 요소들은 종국적인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시간적,논리적 관계에 따라 위계화된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을 스피노자에 거꾸로 투사하여,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를 시초에 정립하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퇴락해가는 유출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헤겔이 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스피노자의 개념은 바로 속성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모순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곧 이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에 의해” 그처럼 지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속성이 실체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은, 지성이 그처럼 지각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절대자인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지성에 의해 조건화될 수 있는가? 헤겔은 바로 여기서 스피노자의 비일관성의 징표를 발견한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헤겔의 주장은 텍스트상의 전거도 희박할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독창적인 속성이론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슈레가 특히 강조하는 점이 속성들의―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외연적 무한의 중요성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왜 이 “무한하게 많음”이 중요할까?

 

  1) 이는, 헤겔이 해석하듯이 속성들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의 관계로 간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지성이 실체를 반성하는 추상적 형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속성들이 이렇게 이해되면, 절대적 실체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자신의 외재적 본질들로 분산되고 해체되어 버리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자의 통일성은 추상적이고 외양적인 통일성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지만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두 가지 대립물의 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이처럼 각각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음”은 『윤리학』 1부 정의 6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체의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실체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 만들며, 따라서 실체를 절대적 통일체로 만들어준다.

 

  2) 또한 이러한 외연적 무한성은 우리가 실체에 대한 인식에서 수적 관점을 배제할 수 있게 해준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유일”하며 이 “유일성”은 실체의 한 특성을 이루지만, 이를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실체가 유일한 것은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체의 통일성이나 속성들의 상이성은 하나나 둘, 여럿 같은 숫자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파악하는 적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유출론적 “이행”의 관계도 “위계적 종속”의 관계도 아니며, 게루 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구축construction”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스피노자 자신이 강조하듯 “구성constitution”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구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슈레가 제시하는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동일성이라는 테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이 테제는 속성들의 “실재적 상이성”과 동시에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통일성”을 뜻하는데, 이러한 난해한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마슈레는 2부 정리 7의 이른바 “평행론” 정리, 곧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정리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우선 피해야 할 오해는 이 정리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평행성, 그리고 두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곧 관념들과 물체들 사이의 일치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리에서 “사물”은 관념들 및 물체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속성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실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 있다. 곧 각각의 속성은 그 자신의 형식/형상에 따라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을 표현하며, 이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속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속성들을 지성이 절대자를 반성하는 외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속성들은 두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속성들과 실체의 관계를 퇴락하는 이행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는 부정적인 매개의 운동을 통해서만 무한자의 구체적인 보편성과 유한자의 실재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4부에서는 “부정”과 “규정”의 관계가 논의되며, 여기에서 쟁점은 스피노자에서 유한자의 실재성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따라서 무한자의 구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천재적인 정식을 발견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스피노자가 모든 유한한 규정들을 지양의 운동으로 이끌어가는 부정적인 것의 실정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규정은 단지 부정에 불과할 뿐, 또다른 상위의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실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유한한 규정들, 곧 유한한 양태들은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못한 외양, 가상에 불과하며, 역으로 절대자는 이러한 유한한 규정들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용없는 절대자에 불과하게 된다. 요컨대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에는 아무런 실정적인 이행의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하고 있다. 첫번째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절대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서 무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헤겔이 생각하듯, 유출적인 퇴락의 중간 단계, 곧 유출적 이행의 매개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두번째 문제는 유한자, 유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헤겔이 생각하듯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외양, 가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유한양태는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또 그렇다면 유한양태는 어떻게 이러한 실재성을 얻게 되는가?

 

첫번째 문제는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된다. 1) 직접적 무한양태(사유의 경우는 “신의 관념”, 연장의 경우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속성과 양태를 매개해 주는 것인가? 하지만 이름이 가리키듯이, 그리고 스피노자 자신이 분명히 “신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 따라나오는 것”(『윤리학』 1부 정리 28의 주석)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직접적 무한양태는 매개로 간주될 수 없다. 이것들은 실체 또는 속성이 자기자신을 직접 표현하는 “방식modus”, 곧 양태이며, 이런 한에서 “일종의 무조건적인 것들”이다.

 

2) 그러나 그렇다면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은 일종의 매개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는가? 마슈레가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개적 무한양태는 사실 다수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소산적 자연으로서의 이 매개적 무한양태를 “하나의 개체” 내지는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마치 자연에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복합 물체들을 거쳐, 이 물체들의 총합으로서의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는 위계적 계열, 또는 합성의 질서/순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인상은 그릇된 것이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과관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겨나는 가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곧 위와 같이 스피노자의 자연을 개체들의 위계적 질서/순서로 제시하는 것은 자연의 인과관계를 기계론적인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은 사물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맞짝으로서 목적론적,섭리론적 관점을 불러오게 된다(『윤리학』 1부 부록). 따라서 이러한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이 아니라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파악해야 기계론적/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주 전체의 모습을 개체들의 위계적 총합으로서 표상하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바로 두번째 문제와 연결된다.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결국 독특한 사물들이 내재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하며, 이는 곧 유한양태들에게 고유한 실재성이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4부의 [독특한 본질들] 장은 이 책의 철학적 결론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 장은 스피노자 철학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이 장에서는 매우 밀도높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핵심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볼 수 있다. 마슈레는 바로 앞장인 [대립이 아닌 차이]의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 철학과 헤겔 철학에 나타나는 공통점, 곧 “모순은 주어/주체 속에서만, 그리고 주어/주체에 대해서만 파악되고 해소될 수 있다는 관념”을 도출해낸다. 양자에게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는 유한한 이성의 범위를 모순율의 한계로 제한시키는 반면, 헤겔은 모순율을 전도하여 이 유한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를 절대적 주체의 운동으로 변모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주어/주체 또는 개체를 실존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따라서 모순의 문제 역시 사물들의 실존의 영역, 곧 타동적 인과성의 영역에 위치시킨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 두 개의 상이한 질서, 상이한 세계―하나는 본질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재적 인과관계와 타동적 인과관계가 두 개의 인과관계가 아니듯이, 본질의 질서와 실존의 질서 역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질서가 아니며, 단 하나의 동일한 현실에 대한 상이한 표현들일 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가상적인 인식―현대적인 용어로 하면 이데올로기―역시 합리적인 인식 못지 않게 실재적인 하나의 인식이며, 따라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슈레의 도발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극단적으로는 이 인식의 종류들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참되다”(만약 우리가 진리와 적합성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고 긍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종류들은 자신들이 기능하는 체계 속에서는 똑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독특한 사물들은 본질의 수준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in se” 존재함을 의미한다.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은 외재적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내적 모순에 의해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certo et determinatio modo” 이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행위하는 신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은 그것들이 신의 역량을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바로 “그만큼quantum”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코나투스 개념, 곧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고 추구”(『윤리학』 3부 정리 6)한다는 개념의 의미이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각각의 사물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하고 있다(『윤리학』 3부 정리 7).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유한자의 고유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또는 독특한 사물들은 어떻게 독특한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는 모든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신의 활동, 신의 역량의 표현을 보기 때문에, 일종의 기회원인론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슈레에 따르면 이는 신과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외재적인 관계, 제약과 구속의 관계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하며, 신 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에 불과하다. 마슈레가 강조하듯이 신은 하나의 전체Tout가 아니며, 독특한 사물들은 개체들이 아니고[ 이 때문에 “res singulares”를 “개체들”이나 “개물들”로 번역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res singulares”의 번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뒤에 나오는 <번역에 관하여> 절을 보라], 속성들 또는 무한양태들은 이 양자의 매개가 아니다. 속성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실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듯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 역시 환원 불가능한―왜냐하면 모든 본질은 영원하기 때문에―본질을 보존하면서 실체의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와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모순들에 따른 매개의 관계로 보지 않고 직접적 동일성의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게는 주체의 변증법도 목적론적 변증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유물론적 변증법으로서의 “실체의 변증법”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궁극적인 평가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작업과 관련하여 간단히 몇 가지 함의만 지적해 두겠다.

 

 마슈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사실 알튀세르가 『자기비판의 요소들』[L.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8]에서 제시한 한 가지 자기비판과 관련이 있다. 알튀세르는 이 책에서 60년대 자신의 작업은 (형식주의적,조합적) 구조주의가 아니라 스피노자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은 마르크스가 유물변증법을 이론화하기 위해 헤겔을 우회해야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 다시 스피노자를 우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회는 모든 관념론의 핵심적인 개념쌍이 주체와 목적임을 밝혀줌으로써, 마르크스의 시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유보를 달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결여되어 있기”[같은 책, p. 188(강조는 알튀세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슈레의 이 책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자기비판에 대한 응답이자 내재적 교정의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처럼 스피노자주의를 변증법과 무관한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스피노자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다른, 유물변증법을 가공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의 이러한 답변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에서 전개되었던 구조 인과성 개념의 풍부한 함의들을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에 맞서)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일관된 노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은 알튀세르 자신도 『자기비판의 요소들』이 출간된 다음 해 발표한 강연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의 주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변증법 문제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좀 길지만 알튀세르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렇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강조는 알튀세르-인용자] 이유에서, 변증법에 선행하는 이유에서 ... 그러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모든 기원과 주체의 철학 ... 에 대한 헤겔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코기토와 감각론적-경험론적 주체와 초월론적 주체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따라서 지식의 이론이라는 사고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요컨대 주체에 관한 모든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그리고 만약 이 비판적인 주제들을 재편성해서 고려해 본다면, 마르크스가 헤겔과 가까운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공개적으로 물려받은 것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이미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에피쿠로스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유물론의 전제를 구성하는 이 심원한 친화성에 대해서는 경건한 침묵으로 지나치고 있다. ... 그리고 사람들은 마르크스-헤겔의 관계 전체가 단지 변증법에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의 자기의식에 기초해서 판단해서는 안되며 의식의 배후에서 이 의식을 산출하는 과정 전체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 마르크스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사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강조는 알튀세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리고 이 유물론이 변증법이 되기 위해서 변증법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를 아는 조건 아래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변증법에 관해 저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인용자] 마르크스의 침묵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변증법의 결론들로부터 그 유물론적 전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으며, 그 전제들에 기초하여 그것들이 야기시킨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범주들을 사고해야 했기 때문이다[『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46-147쪽; 위의 책, pp.210-211(별도의 표시가 없는 강조는 인용자의 강조다)].

 

매우 함축적이고 중요한 이 구절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좀더 체계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알튀세르가 변증법의 유물론적 전제―에피쿠로스에서부터 발원하는―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변증법을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기로 하자. 이는 달리 말하면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알튀세르는 모순의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유물론적 전제에서 파생된 한 가지 결과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이 책에서 마슈레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관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 유물변증법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모순 개념을 “역사화”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순 개념 자체를 새롭게 사고하는 것도, 최종심급 개념을 복잡화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순 개념을 제거하거나 말소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모순을 부차화하는 것, 그리고 모순을 하나의 계기로 포함하고 있는 관계의 이론을 사고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대한 실천적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바로 여기에 이 책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중요한 이론적 의의 중 하나가 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영향: “또는”에 대하여

 

 

언젠가 발리바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 책은 유럽의 철학계, 특히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 책은 당연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곧 기하학적 방법에 관한 문제나 실체와 속성의 관계 문제, 무한양태에 대한 해석의 문제 등과 같이 이 책이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서 이 책은 표준적인 하나의 입장을 제시해 주었으며, 이 때문에 이 책은 게루나 들뢰즈 등의 저서와 함께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권위있는 해설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아울러 마슈레의 이 책은 스피노자와 독일철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그 이후 스피노자와 독일관념론에 관한 여러 연구들을 낳는 산파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사실 빅토르 델보스나 마르샬 게루 등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저서들을 낸 적이 있지만[Victor Delbos,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Félix Alcan, 1893; Martial Gueroult, L'evolution et la structure de la doctrine de la science chez Fichte, Olms, 1982(19321) 참조], 그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오랫 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이 분야에서 다수의 주목할 만한 저작들이 출간되었으며, 이 저작들은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특히 Sylvain Zac, Spinoza en Allemagne. Mendelssohn, Lessing et Jacobi, Meridiens Klincksieck, 1989; Manfred Walther ed., Spinoza und der deutsche Idealismus, Konigshausen & Neumann, 1991; Gabriel Albiac, La synagogue vide: Les sources marranes du spinozisme, PUF, 1994; Jean-Marie Vaysse, Totalité et subjectivité. Spinoza dans l'idealisme allemand, Vrin, 1994 참조].

 

하지만 스피노자 연구에서 이 책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현재화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은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대결confrontation의 문제설정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헤겔이냐 스피노자냐』의 의미로 이해했다. 곧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양 근대철학의 두 대가 사이의 대결이며, 이 대결의 쟁점은 변증법, 다시 말해 관념변증법이냐 유물변증법이냐 사이의 쟁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논평을 했다.

 

헤겔 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에서는 마슈레의 말이 옳지만, 헤겔 철학은 스피노자 독해로 모두 환원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곧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헤겔 철학의 한계의 증상을 읽어내려는 마슈레의 시도는 성급한 과장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독해의 사례로는 André Doz, “Spinoza lecteur de Hegel?”,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1984/1; George L. Klein, “Pierre Macherey's Hegel or Spinoza”, in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The Proceedings of the Chicago Spinoza Conference(1986), ed. Edwin Curley and Pierre-Francois Moreau, E.J. Brill, 1990을 참조].

 

반면 헤겔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슈레의 시도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은 1981년에 출간된 『야만적 별종』에서 마슈레의 저작이 헤겔 철학의 한계를 잘 드러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서 유물변증법을 위한 새로운 이론적 자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일체의 매개, 따라서 일체의 변증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구성적 존재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야만적 별종』 이래 “반(反)근대성”의 문제설정 아래, 홉스-루소-헤겔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중심적 노선에 맞서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의 노선을 진정한 유물론의 노선, 대중의 정치학의 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동시대의 구조주의 사상가들 또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영역에서 역시 대결의 문제설정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들, 헤겔 독자들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독자들을 하나의 대결로 초대한 셈이며, 또 국내의 독자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대결에 초대장을 받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대결은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대결인가? 곧 이 대결은 헤겔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아니면 이전까지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스피노자의 극적인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또 아니면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를 결정짓기 위한 대결인가?

 

마슈레는 1990년에 붙인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 중 “ou”―곧 영어의 or나 독어의 oder―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곧 이는 한편으로 “...이냐aut ...이냐aut”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잘 알려진 스피노자의 표현이 가리키듯 “즉”, “다시 말해”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오해, 오독에 맞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헤겔철학을 재비판하려는 시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책은 헤겔과 스피노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 이 양자의 철학 안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읽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왜 이러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슈레가 말하는 대결은 외재적인 대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너무 비(非)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 반대로 마슈레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대결―하이데거라면 오히려 Auseinandersetzung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도 아니고, 헤겔 스피노자도 아니며, 헤겔 또는 스피노자, 곧 철학(함)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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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이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1938-)의 저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완역한 책이다. 이 책은 1979년 프랑수아 마스페로François Maspero 출판사에서 알튀세르가 감수하던 “이론Théorie” 총서의 한 권으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1990년 데쿠베르트Découverte 출판사에서 [재판 서문을 추가하여 제 2판이 나왔다.

 

피에르 마슈레는 현재 프랑스 릴 3대학Université de Lille 3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프랑스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62년 조르주 캉귈렘의 지도 아래 『스피노자에서 철학과 정치Philosophie et politique chez Spinoza』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에는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 등과 더불어 유명한 『자본을 읽자』를 저술,출간했다. 그리고 1966년에는 프랑수아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알튀세르가 시작한 “이론” 총서의 한 권으로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저서는 60-7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구미 좌파 이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후자의 저서는 루카치의 반영 개념과 대비되는 생산의 범주를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 때문에 마슈레는 특히 영미권에서는 문학이론가로서 더 명성이 높다].

 

70년대에는 몇 편의 논문 외에는 별다른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던 마슈레는 79년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스피노자 연구에 몰입한다. 그 결과 1992년에는 그 때까지 발표된 스피노자 관련 논문들을 모은 『스피노자와 함께Avec Spinoza』를 출간했으며,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5권짜리 주석서를 출간했다. 이 저작들, 특히 5권짜리 『윤리학』 주석서는 마슈레의 스피노자 연구를 집약하는 중요한 업적으로서, 스피노자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마슈레의 연구는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철학사 분야, 특히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문학이론 분야의 연구가 있는데, 위에서 말한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이외에도 1990년에는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저서를 출간해서 구미 문학이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문학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세번째 분야는 마슈레가 “프랑스식 철학Philosophie à la française”이라고 부르는,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 및 프랑스의 철학제도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처음으로 발표한 논문이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조르주 캉귈렘의 과학철학에 관한 논문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La philosophie de la science de Georges Canguilhem: Epistémologie et histoire des sciences”(avec présentation de Louis Althusser) La pensée 113, 1964], 그는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콩트에서 라캉, 푸코와 들뢰즈, 데리다에 이르는 프랑스의 철학자들 및 철학제도에 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이 분야의 논문들은 특히 Histoire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9 및 In a Materialist Way: Selected Essays by Pierre Macherey, Trans. Ted Stolze ed. Warren Montag, Verso, 1998에 수록되어 있다. 그 외 이 책들에 수록되지 않은 선별된 논문목록은 뒤의 [참고문헌]을 보라].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연구들도 주목할 만하지만[특히 마슈레의 푸코에 관한 연구들은 푸코 연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논문들이다], 특히 프랑스 철학제도에 관한 그의 연구들은 우리가 막연하게 단수로, 또는 정관사 la를 사용해서 부르는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française이라는 게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기울여 볼 만하다[이는 근대철학의 고유한 제도적 형태로서 민족철학 또는 국가철학(독일철학, 프랑스철학, 영미철학, 한국철학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 네번째 분야는 실천철학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특히 마슈레가 릴대학에서 지난 2000년부터 시작한 “넓은 의미의 철학La philosophie au sens large”이라는 이름의 연속강좌에서 잘 구현되고 있다. 마슈레가 말하는 실천철학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실천이라는 개념은 알튀세르가 제창했던 “이론적 실천” 개념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포함한 이론적 활동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하고, 생산production이나 작업opération―규정된 조건 속에서 규정된 결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으로 볼 것을 제창한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알튀세르 비판가들이 집요하게 주장하듯이 “현실적 실천”을 “이론적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지속되어온 이론theoria, 실천praxis, 생산/제작poiesis의 분류법 또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용어법에 따르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을 비판하기 위해서다[따라서 이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행위-제작-노동의 구분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곧 철학이나 이론적 활동은 아무런 규정 조건 없이 이루어지는 개인의 순수한 창의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제도적, 물질적 조건 속에서 수행되는 활동이며, 이러한 조건들은 이론적 활동의 성격 및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슈레는 이러한 조건이 생산양식에 의해 직접 규정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조건들은 이론적 활동에 내재적인―하지만 거의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이며, 이론적 활동에서 실제적인 결과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인―제약들 및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다[따라서 이는 데리다와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사라 코프만 등이 제창한 “효과적인 철학/효과 속의 철학philosophie en effet”이라는 문제설정―이는 이들이 처음에는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갈릴레 출판사에서 공동으로 펴내고 있는 <총서>의 명칭이기도 하다―과 매우 수렴적인 함의를 지닌다(물론 마슈레와 이들 사이에는 선호하는 철학자들이나 스타일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와 관련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마슈레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7장에서 그 자체로 순수하게 지성만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없는 저작의 사례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기하학 원론』이라는 책이 전승되어온 복합적인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저술된 고유한 스타일 및 이 책에 담겨있는 논증방식이 특정한 시대적 조건 및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 모든 학문적인 활동이 따라야 할 이상적 모범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해석(스피노자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서)의 문제는 『성서』와 같은 비순수한 저작들에서만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슈레가 보기에 이는 오히려 스피노자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론의 의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이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역자의 [스피노자와 성서해석의 문제](미발표 원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의미에서 마슈레가 말하는 실천철학, 또는 “넓은 의미의 철학”의 문제설정은 일차적으로 철학이라는 이론적 활동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실천철학의 관점은 또한 철학과 과학, 예술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얼마간 인위적인 경계들에 대한 비판도 함축한다. 사실 실천철학의 첫번째 의미를 고려한다면, 기존에 이러한 분야들 사이에서 설정되어온 경계들이 그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함을 쉽게 추론해낼 수 있다. 철학이 규정된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실제적인 결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고, 마슈레 자신의 실천철학은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통해 좀더 유효한 결과들을 산출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론적 활동의 무의식적, 물질적 조건이라는 관점에 따라 기존의 분류법들을 변화시키고 재편하려는 노력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넓은 의미의 철학” 강좌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되었고, 또 이러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실 프랑스처럼 상당히 오래전부터 경험과학들과 철학, 예술적 활동 사이에서 활발한 상호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져 온 나라에서 이는 매우 실질적인 철학적 질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마슈레의 작업이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또 각각의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의 작업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스피노자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이래 20여년간의 밀도있는 연구를 통해 마슈레는,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에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처음에 알튀세르가 감수하던 “이론” 총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혁신적인 철학운동인 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또 그 스스로 이 운동에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의 의의 및 마슈레의 스피노자 연구의 위상을 좀더 정확히 평가해 보기 위해서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철학적 흐름을 간단하게나마 조망해 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구조주의 운동과 스피노자 르네상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지적, 제도적 배경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을 꼽으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첫째는 구조주의 운동이다. 50년대 인류학과 기호학 및 정신분석학 같은 인문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구조주의는 1962년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가 발표된 이래, 1965년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의 출간, 1966년 푸코의 『말과 사물』 및 라캉의 『에크리』의 출간을 계기로 프랑스 철학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68 운동을 기점으로 구조주의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영미권에서 소위 후기 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로 알려진 데리다, 들뢰즈(․가타리), 리오타르 등의 작업 및 푸코의 계보학 연구가 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7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하고 “신철학자들nouveaux philosophes”이 등장하면서 구조주의 운동은 영향력이 감소되었지만,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을 주도한 흐름이 구조주의의 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자 마슈레의 절친한 동료인 발리바르는 이를 간명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구조주의는 지난 50년 간 프랑스 철학계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입니다.”[<구조주의와 현대 프랑스철학의 종말: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 『전통과 현대』 2001년 봄호, 207쪽. 계속해서 발리바르는 구조주의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력에 비하면 실제로 구조주의가 꽃을 핀 것은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했습니다. 구조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마자 대표적인 구조주의자로 간주되던 사상가들이 모두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실 구조주의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리고 세칭 구조주의자들도 명확한 공통의 문제의식[문제설정problématique?―인용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제 생각으로는 구조주의 사상의 가장 완벽한 발현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루이 알튀세르나 롤랑 바르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질 들뢰즈와 같은 맥락의 구조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지요. 따라서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딱히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구조주의자라고 불린 사상가들이 어떤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곳.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대담의 제목(편집자가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곧 이 대담의 제목은 말 그대로 이제 현대 프랑스 철학은 끝장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따라서 이는 프랑스 철학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환원시키고 싶어하는 일부 국내 지식인들의 희망사항에 은밀하게 공명한다), 이는 발리바르의 진의를 잘못 전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대담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랑스철학으로서의 프랑스 철학은 이제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 5-60년대의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언어학 등을 바탕으로 형성된 구조주의로 대표되는 전후의 프랑스철학은 이제 그 종말을 고하고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는 프랑스에서보다는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학생들이 저에게 논문지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216쪽(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발리바르의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프랑스철학으로서의 프랑스철학, 다시 말해 하나의 민족적인 철학형태로서의 프랑스철학 또는 구조주의는 종언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둘째, 이는 구조주의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거나 아무런 중요한 기여도 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조표시한 데서 분명히 드러나듯, 발리바르는 프랑스의 민족적인 철학운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는 프랑스의 영내를 벗어나 탈민족화되고 세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곧 이제 구조주의는 더 이상 프랑스 국적의 철학운동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또는 한국 등에서 독자적으로 수용 및 변용됨으로써 새로운 동력을 부여받고 있는 훨씬 광범위한 철학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마슈레 자신이 주장해온 철학적 입장과 동일한 관점이다]

 

둘째는 이 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지만, 얼마간 다른 맥락에서 파악되고 평가될 수 있는 현상으로서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를 꼽을 수 있다. 구조주의 운동보다 약간 늦게 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지난 30여년 동안 양과 질 모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스피노자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한 대담에서 이 상황을 극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마트롱: 정확한 의미에서 제 학위논문은 제가 알제리대학 철학과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50년대 말 내지는 60년대 초부터 구상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 상황은 전무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몇년 뒤 스피노자를 다루기로 한 세미나의 예비 모임에 알튀세르의 초청을 받아갔던 게 기억나는군요(그런데 이 세미나는 끝내 열리지 못했습니다).

 

로랑 보브: 그 때가 언제였지요?

 

마트롱: 정확히 몇년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는 『자본을 읽자』가 출간된 다음이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마슈레가 참석했고 바디우도 있었는데, 저는 이미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68년 5월 이전이기도 했지요.

 

보브: 그럼 65-66년경이었겠군요?

 

마트롱: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참고문헌으로 델보스Delbos와 다르봉Darbon의 책만 제시해 주었습니다. ... 게다가 제가 게루에게 참고문헌을 물어보러 갔을 때 그는 저에게 “참고문헌? 그런 건 없네! 델보스와 루이스 로빈슨만 빼놓고는 전부 멍청한 놈들 뿐이야!”라고 답변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는 사실상 68년 경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

 

보브: 선생님 책에 수록된 참고문헌과 오늘날 스피노자 연구를 시작하는 학생이 갖고 있는 참고문헌을 비교해 본다면, 자연히 ...

 

마트롱: 정말이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그러다가 68년에 게루보다 조금 앞서 베르나르 루세의 대작이 출간되었습니다.

 

보브: 그리고 들뢰즈의 책도요.

 

마트롱: 들뢰즈는 좀 늦게 나왔습니다. 게루 책은 68년 말에 나왔고, 들뢰즈는 69년 초에 나왔지요(이 책은 68년에 출간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69년 이전에는 서점에 배포되지 않았습니다).[“A propos de Spinoza: Entretien avec Alexandre Matheron” Multitudes n° 3, 2000, pp.169-171] 

 

사실 20세기 후반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매우 의미깊은 시기로 평가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스피노자 연구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소멸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프랑스 같은 경우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스피노자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지금도 많이 논의되는(그리고 국내외 도서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주요 저작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Victor Delbos,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Félix Alcan, 1893(1990년 소르본 대학 출판부PUPS에서 재간행); Le Spinozisme, Vrin, 1950(19151); Albert Rivaud, Les notions d'essence et d'existenc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Félix Alcan, 1906; Gabriel Huan, Le Dieu de Spinoza, Félix Alcan, 1914; Léon Brunschvicg, Spinoza et ses contemporains, PUF, 1923; Pierre Lachièze-Rey, Les origines cartésiennes du Dieu de Spinoza, Vrin, 1950(19371)], 역시 1930년대 이후 1950년대까지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60년대 말 이후에는 스피노자 연구에서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편의상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시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두번째 시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이며,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기가 세번째 시기가 된다.

 

첫번째 시기는 스피노자 연구가 오랜 공백기를 거쳐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는 무엇보다 마르샬 게루와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기념비적 업적을 통해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윤리학』 1, 2부에 대한 게루의 두 권짜리 주석서는 단지 프랑스만이 아니라 영미권을 비롯한 전세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필수적인 참고문헌으로 인정받고 있을 만큼 『윤리학』에 대한 치밀하고 체계적인 주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트롱은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방법을 스피노자 철학에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놀라운 엄밀성으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철학의 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업적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실뱅 자크, 베르나르 루세 등의 중요한 연구들이 배출되었으며, 이 저작들은 지금까지도 스피노자 연구의 핵심 참고문헌으로 남아있다[Sylvain Zac, L'idée de vi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PUF, 1963; Spinoza et l'interprétation de l'Ecriture, PUF, 1965; Philosophie, théologie et politique dans l'oeuvre de Spinoza, Vrin, 1979; Bernard Rousset, La perspective finale de l'“Ethique” et le problème de la cohérence du spinozisme, Vrin, 1968].

 

두번째 시기의 연구는 두 가지의 큰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연구가 조직화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1977년 스피노자 사망 300주년을 기념해서 실뱅 자크, 베르나르 루세, 알렉상드르 마트롱,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등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연구회Groupe de recherches spinoziste”와 “스피노자 친우회Association des Amis de Spinoza”가 결성되어 『스피노자 연구Cahiers Spinoza』를 창간했으며(1991년까지 6호 발간), 1978년부터 매년 철학 학술지 “Archives de philosophie”에 “스피노자 참고문헌 목록Bulletin de bibliographie spinoziste”을 발간하기 시작했다(2002년 현재까지 24호 발간). 그리고 1982년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에서 열린 스피노자 탄생 350주년 기념 국제 스피노자 학술회의를 계기로 1985년부터 국제 스피노자 학회지인 『스피노자 연구Studia Spinozana』가 출간되면서부터(현재 17호까지 발간) 스피노자 연구는 전세계적인 연결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다음 이 시기의 연구들은 매우 강한 실천지향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마슈레의 이 책을 비롯하여, 안토니오 네그리[네그리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지만, 1980년대 이후 계속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고, 또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다른 프랑스 연구자들과 한데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앙드레 토젤 등의 저작[André Tosel, Spinoza ou le crépuscule de la servitude, Aubier, 1984; Du matérialisme de Spinoza, Kimé, 1994]이 이 시기의 스피노자 연구를 대표하는데, 이 저작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추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세번째 시기는 철저한 문헌학적 연구와 학문적 주석의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마슈레 자신의 연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나 『스피노자와 함께』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현재의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지니는 함의에 관해 명시적인 관심을 표명했으나, 1994년부터 출간된 5권짜리 주석서에서는 『윤리학』의 문자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방법론적 원칙으로 천명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체의 2차 문헌을 배제한 채, 『윤리학』의 논증구조를 따라 하나하나의 단어들 및 문장들을 분석하고, 제시되는 주제들을 세밀히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스피노자 연구의 제3 세대의 작업 역시 현실적 준거를 배제한 가운데, 매우 엄밀한 문헌학적․논증적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 시기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스피노자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프랑수아 모로가 “외국의 젊은 스피노자 학도들은 엄밀함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온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을 만큼 수준높은 연구가 다수 배출되고 있다[대표적인 저작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Laurent Bové, La straté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ésistance chez Spinoza, Vrin, 1995; Chantal Jaquet, Sub specie aeternitatis: Étude des concepts de temps, durée et éternité chez Spinoza, Kimé, 1997; Henri Laux, Imagination et religion chez Spinoza: La potentia dans l'histoire, Vrin, 1993; Christian Lazzeri, Droit, pouvoir et liberté. Spinoza critique de Hobbes, PUF, 1998; Charles Ramond, Quantité et qualité chez Spinoza, PUF, 1995; Spinoza et la pensée moderne, Harmattan, 1998; François Zourabichvili, Spinoza: Une physique de la pensée, Paris: PUF, 2002; Le conservatisme paradoxal de Spinoza. Enfance et royauté, Paris: PUF, 2002].

 

하지만 이러한 최근의 연구 경향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가 실천적 지향을 포기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2000년 창간된 좌파 학술지인 『대중들Multitudes』에 여러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젊은 연구자들 역시 대부분 좌파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2002년 여름에 유명한 스리지Cerisy 성에서 열린 “오늘날의 스피노자Spinoza aujourd'hui”라는 학술회의는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그동안 축적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스피노자 철학이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함의들을 검토하기 시작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가 보여주는 엄밀성은 일종의 방법적 엄밀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대략적인 경향을 살펴보는 데 얼마간 유용한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60년대 말 이후 3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의 특징을 도식적으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좌파적인 성향을 띠고 있고 60년대 구조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연구자들 각자의 지적 배경이라든가 관심사, 스타일 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동안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매우 풍요로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이탈리아와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쨌든 스피노자 연구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구조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주제적인 연관성이라는 측면이다. 앞의 대담에서 발리바르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구조주의는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된 운동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형식주의적,“조합적” 구조주의와 라캉의 RSI식 구조주의,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들뢰즈의 베르그송식 구조주의 등은 스타일이나 방법론, 이론적 원천 등에서 매우 상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얼마간 공통적인 한 가지 문제설정을 지적한다면,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각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근대철학에 지배적이었던 “구성적 주체”, 곧 인식과 행위의 기초 내지는 기준으로서의 주체 대신 “구성된 주체”, 곧 지배구조의 상상적 효과로서의 주체라는 관점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스피노자 철학과 구조주의의 주제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자기자신을 “국가 속의 국가”(『윤리학』 3부 [서문])로 간주하는 인간의 가상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실천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주체(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상적 효과로 파악함으로써, 구조주의 및 스피노자 철학은 강한 정치적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자의 또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게루를 제외한다면, 1세대에서 3세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실천적,정치적 함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특히 스피노자 연구의 2세대는 마르크스주의와 스피노자주의 사이의 연관성의 문제를 자신들의 핵심 주제로 삼아 연구했다. 따라서 마슈레가 한 논문에서 18세기의 유물론적 스피노자주의, 19세기의 범신론적 스피노자주의와 대비하여 20세기(후반)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적 연관성 이외에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측면은 철학제도의 측면이다. 철학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구조주의 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반(反)제도적이거나 탈제도적이라기보다는) 비(非)제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운동의 비제도적 성격은 특히 후기 구조주의자들로 불리는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 같은 사람들이 잘 보여준다. 사실 이들 모두는 60-70년대 프랑스의 철학적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이면서도, 프랑스 대학제도의 중심부에 자리잡지 못하고 고등사범학교나 벵센 대학, 또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같은 대학제도의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더 나아가―이것이 좀더 중요한 측면이지만―이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철학적 활동이 정치적․학문적 제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자신들의 이론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제도화의 논리에 저항하고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담론의 질서 및 계보학에 관한 푸코의 연구나 들뢰즈(가타리)의 “소수화되기devenir-minoritaire” 개념, 데리다의 기록(écriture 또는 archive) 개념이나 되풀이 (불)가능성itérabilité 개념 및 교육제도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은 모두 (후기) 구조주의의 비제도적 지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반면 스피노자 연구는 제도 내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며, 또 바로 그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프랑스 철학 특유의 제도적 조건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계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중철학과 제도철학 사이의 경계가 매우 엄격해서,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60-70년대 구조주의 운동의 주역들이 외국 학계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활발한 연구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프랑스 제도권 철학에서는 거의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대신 제도권 철학에서는 서양의 철학사, 특히 17세기 대륙철학 및 멘 드 비랑에서 베르그송에 이르는 프랑스의 유심론 철학, 그리고 20세기의 현상학 등이 주로 연구되고 있다[최근 구조주의 철학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을 대학의 정식 학위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일부 철학자들―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이브 뒤루, 베르트랑 오질비 등―이 “구조주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한다”는 자조섞인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도적 경직성을 겨냥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제도적 상황에서 60년 대 말 이후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주의 운동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구조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초 중 하나를 제시해 주었으며, 이 운동의 철학적 쟁점들을 좀더 분명히 전개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조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설정 중 하나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들 수 있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가장 명료하게 제시해 준 사람은 바로 스피노자다. 하지만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이를 수용한 것은 아니며, 또 이를 수용한다고 해도 반드시 스피노자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라캉 같은 사람은 1933년의 학위 논문 이래 스피노자 철학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 중 하나로 간주해 왔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스피노자 철학 대신 칸트, 그리고―마르샬 게루 등의 철학사 연구에 따라 재해석된―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이론적으로 더 선호하게 된다. 반면 알튀세르와 들뢰즈는 훨씬 더 일관되게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자신들의 철학적 작업의 기초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푸코 같은 경우는 부분적으로 스피노자의 작업을 수용하지만, 이는 늘 암묵적이고 모호한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푸코 철학의 스피노자적 측면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Pour une histoire naturelle des normes” in collectif, Michel Foucault philosophe, Seuil, 1988 및 Olivier Remaud, “La question du pouvoir: Foucault et Spinoza” Filozofski Vestnik, Vol. XVIII, no. 2/1997 참조]. 이런 의미에서 60년대 이후의 스피노자 연구는 구조주의의 쟁점 및 갈등을 부각시키는 하나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 연구의 활성화는 프랑스 철학의 민족적 지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데카르트가 곧 프랑스인가?Descartes, est-ce la France?⌋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마슈레도 지적하고 있듯이 프랑스의 철학제도는―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데카르트를 정점으로 한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 대학제도의 중심에 위치한 소르본 대학(파리 4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은 데카르트 전공 교수가 맡고, 그는 또 데카르트학회 회장을 맡으며, 다시 데카르트학회 회장은 프랑스 철학회장을 맡는다는 프랑스 철학계의 암묵적 규칙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60년대 후반 이후 프랑스 철학계에서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는 예외적이고 주목할 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 연구를 주도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좌파 성향의 철학자들이라는 점은 스피노자 연구의 이런 측면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실 80년대 프랑스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는 후설과 하이데거였으며, 90년대 이후에는 분석철학이 도입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후설/하이데거나 분석철학과는 달리 스피노자 연구는 이론적,실천적인 측면에서 매우 강한 좌파적 성향을 띤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알튀세르와 푸코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지적했다시피[L. Althusser, “Conjoncture philosophique et recherche théorique marxiste”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2,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M. Foucault, “Georges Canguilhem: Science et la vie” in Daniel Defert ed. Dits et ecrits, vol.4, Gallimard, 1994 참조],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은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 및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이래 베르그송까지 지속되어온 유심론적,종교적 성향의 철학과, 20세기 초에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사르르트와 메를로-퐁티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관념론적 철학, 그리고 오귀스트 콩트에서 시작해서 20세기 중반의 바슐라르와 캉귈렘, 알튀세르,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개념적,과학적 흐름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 연구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 속에서 세번째 흐름의 입장의 편에 서서, 제일 국수주의적인 편에 속하는 유심론 철학의 입장 및 코기토적 주체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비판적,관념론적 입장에 맞선 싸움을 뒷받침해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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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뢰즈와 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는 두 개의 구분되는 고유명사이자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된 머리 둘 달린 <괴물>(이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서)이면서, 또한 수없이 많은 흐름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익명의 뿌리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그들이 이러한 통일성으로서의 다양성, 다원성으로서의 일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철학사에서 공동의 저술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6), 『공산당 선언』(1848) 등을 공동으로 저술했으며, 그 외에도 그들의 작업은 늘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에 조금 앞서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제자들이자 동료들인 발리바르, 마슈레, 랑시에르, 에스타블레와 함께 공동으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1965)를 발표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은 두 개의 분리된 인격체, 두 명의 독립적인 사상가가 결합해서 그들이 각자 이전에 추구해 왔던 사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2.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또한 그 자체로도 매우 새롭고 매우 강력하다. 매우 새롭다는 것은 이들의 사상이 플라톤 이래 서양 사상의 주요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노선을 제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이러한 노선이 플라톤주의 철학 또는 초월성의 철학과 지배권력 사이의 본질적 연관성을 드러내 주고, 이를 넘어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일차적으로 존재행동학(onto-éthologie)의 관점에 따라 파악될 수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 및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 『천개의 고원』(1980) 등에서 체계화된 존재행동학의 요소들은 존재의 일의성 또는 <고른 판>과 역량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 및 일반행동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부터 말년의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일의성은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열쇠어로 남아있다. 존재의 일의성(univocité)이란 일차적으로는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왜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할까? 이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온 일체의 초월성의 담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존재의 일의성을 확인하고 체계화하는 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존재의 일의성의 핵심은 단순히 존재의 하나의 의미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론으로서의 일원론에 있다. 곧 존재와 존재자들,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나 간극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존재의 근원적인 다양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들에게 스피노자(또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스피노자(또는 라이프니츠)는 <긍정적 무한>의 철학자다. 곧 그는 무한을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무한의 내재적 인식가능성을 긍정하면서, 다양한 무한들, 따라서 환원 불가능한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소통, 관계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의 핵심 문제로 삼았다. 이 때 각각의 무한들은 정의상 자율성과 동등성을 함축하기(이것이 소위 <평행론>의 존재론적 함의다) 때문에, 무한들의 소통, 관계는 항상 이미 타율성과 종속관계를 함축하는 초월적 질서인 <신학적 구도>가 아니라, <내재적 평면> 또는 <고른 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존재론의 영역에서 초월적 구도, 수직적 위계관계를 배제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내재적 평면 위에서 충분한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일의성은 항상 이미 역량(potentia/puissance)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론을 함축하며, 이를 요구한다.

역량의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두 가지 전통에 대한 비판적 대결을 함축한다. 이 두 가지 전통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론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서로 비판적인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들은 존재자들의 생성, 즉 개체화의 문제를 내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공통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곧 이 두 전통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요소들(이것이 형상이든 원자이든)의 관점에서 생성의 문제를 다룰 뿐, 요소들 자체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는 이들이 존재자들의 내재적 역량을 단순한 가능태(le possible), 곧 그 자체로는 비실재적이며, 초월적인 외부의 원리의 작용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허구화된 힘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송을 따라 이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역량은 그 자체가 실재적인 힘이며, 역량의 내재성 덕분에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관계설정을 위해 초월적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량의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비실재적인 무에서 실재적인 현실의 창조라는 점에서 이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이 아니라 잠재성에서 현행적인 것들(actualités)로의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역량의 존재론의 논리적 귀결은 주체와 객체, 사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 실격되고 그 대신 기술적 존재자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의 활동의 문제를 다루는 행동학(éthologie)의 문제가 실천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에톨로지는 원래는 동물들의 행태를 다루는 생물학의 하위분과중 하나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는 일의성과 역량의 존재론을 완성하는 철학 체계의 한 부분으로 격상된다. 이런 행동학의 문제설정에 따르면 유와 종의 분류법 대신 역량의 관점에서 존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분류의 핵심 기준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예를 들면 짐을 끄는 말은 경주용 말보다는 짐을 끄는 소와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행동학에서는 목적론적으로 위계화되고 질서지어진 기관과 기능보다는 정서/변용(affection)과 배치가 실천철학의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런 존재행동학의 체계가 다루려고 하는 실천적 문제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에서 각자 제기했던 질문이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만큼,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 대중들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들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perversion)이다.”(『안티 오이디푸스』) 왜 대중들은 자신의 지배를 욕망할까?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는 대중들의 본질을 이루는 대중들의 역량이 바로 대중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과 대중의 역량의 분리를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미시 파시즘의 체계다.

이들의 미시 파시즘 이론을 이해하려면 우선 푸코의 규율권력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17세기 이래 서양 사회의 지배 권력의 작동방식을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에 따라 이론화했다(특히 『감시와 처벌』 및 『성의 역사 1권』 참조). 곧 푸코는 프랑스 혁명 이래 근대 정치사상이 유포시킨 사회계약론과 주권적 주체의 관점과는 달리,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부정하고 금지하고 억압하는 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롭다고 가정되어 있고 또 스스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지배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푸코는 이를 규율권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규율권력은 통제권력으로 바뀐다. 통제권력은 규율권력보다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며, 규율권력에서는 여전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데 반해, 통제권력에서는 이 양자가 단일한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곧 규율권력에서는 예속적 주체가 자신의 인성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지배장치에 따라 규율되고 감시되지만, 통제권력에서는 이러한 통일성이 해체되고 지배장치 자체가 예속적 주체의 구성요소에 포함된다. 따라서 통제권력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우리가 이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들 및 능력들 자체를 통제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미시 파시즘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미시 파시즘을 변혁하는 일인데, 미시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우리 각자의 근본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이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재적 해체/변혁과 맞물려 있는 문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 생성/되기의 문제가 핵심적인 윤리적-정치적 과제로 부각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에게 다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ajorité)이나 소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inorité)이 아니라, 소수화되기(devenir-minoritaire)가 중요한 과제라면, 이는 이 후자의 생성/되기가 피지배집단 내에서도 배제된 타자의 타자(여성 흑인 노예들, 이주노동자들, 동성애자들 ...), 또는 오히려 이들을 타자의 타자로 만드는 메커니즘을 변혁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과 집단의 상호구성적 관계, 즉 배치(agencement)를 이론적 문제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며, 이를 수행적 형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

                                                                   4.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지자들이 결국 여전히 답변해야 할 문제는 실천의 문제인 것 같다. 리좀, 배치물, 지층, 성층작용, 판, 절편, 도주선과 단절선, 파괴의 선, 추상적 기계, 도표, 전쟁기계 등과 같이 이들의 저서에 담긴 현란한 개념들과 정신분석, 기호학, 마르크스주의, 문학 등은 물론이거니와 현대 수학 및 물리학, 화학, 결정학, 분자생물학, 동물행동학, 정신의학, 경제학, 음악 등을 넘나들면서 현란하고 난삽한 논의를 전개하는 이들의 작업에 얼이 빠지고 현기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슬그머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법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모든 논의들이 여기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들의 논의가 노동자들의 분신, 이주노동자들의 자살, 노숙자들의 추위와 굶주림에 대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이는 분명 호의적인 질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인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사상을 세우면서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들과 다르지 않을 질문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상을 공감하고 따르는 이들 역시 품어야 하고 또 나름대로 답변해야 할 질문들이다. 아마 그때 비로소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개의 분리된 고유명사이기를 그치고,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익명의 뿌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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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 예정인 책의 일부로 들어갈 원고입니다. 아직 최종 교열이 끝나지 않은 원고이므로, 무단 복제나 인용을 불허합니다. 내용에 관해 지적할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데까르뜨 정념론의 구조

근대 합리론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념의 문제 역시 데까르뜨가 논의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데까르뜨는 최후의 저작인 『정념론』(Passions de l'âme)(1649)에서 스꼴라철학의 정념론과 상이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정념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룸으로써 이후 합리론에서 논의되는 정념론의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데까르뜨 정념론의 핵심 문제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1-1)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 시초관념들

먼저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문제가 있다. 데까르뜨는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 영혼과 물체, 사유와 연장의 엄격한 이원론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영혼과 물체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전혀 상이한 속성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관계 및 상호작용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과 같은 정념들은 외부 물체의 운동이 우리 신체에 미친 영향에 따라 생겨난 정기들(esprits animaux)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에 전달되어 일어난 영혼 내의 결과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정념론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차원에서 배제된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까르뜨는 정념이라는 현상에 직면하여 이론적 모순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원론적 틀에서 정념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초관념들(notions primitives)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된다(엘리자베쓰에게 보내는 1643년 5월 21일, 6월 28일 편지). 이 이론에 따르면 시초관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거를 이루는 원천과 같은 것으로, 모든 학문은 이 관념들을 잘 구분하고 이것들을 각각의 영역에 잘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데까르뜨는 세 가지 시초관념을 제시한다. 먼저 사유가 있다. 이는 영혼과 신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이상학이 확실하고 안전한 토대를 갖는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 다음 연장은 모든 물체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학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마지막 시초관념은 인간, 즉 “영혼과 신체의 연합”(union)으로서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사유라는 첫 번째 시초관념이 감각과 상상에서 분리된 순수 지성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연장이라는 두 번째 시초관념은 상상의 도움을 받는 지성의 활동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자신의 명석함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천학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즉 이는 우리에게 유용하고 해로운 것을 식별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잘 보존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데까르뜨의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함축된 이원론적 관점은 정념에 관한 연구에서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원론적 관점에서 정념의 문제를 사고할 때 제기되는 내적 모순의 문제 역시 제기되지 않는다. 즉 정념의 문제에서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라는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실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데까르뜨의 철학체계는 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으로 사고된 인간과 외부의 대상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곧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실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탐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정념의 정의

그러나 데까르뜨의 정념론이 실천적 유용성을 목표로 하기는 하지만, 이는 그가 정념에 대한 탐구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념론의 실천적 유용성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념론을 새로운 학문적 토대 위에서 개혁하는 것이며, 이는 정념에 대한 데까르뜨의 정의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데까르뜨는 먼저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정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열등한 부분과 우월한 부분, 감각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 사이의 싸움터가 아니라 하나의 불가분한 실체다. 이는 불가분적인 영혼과 가분적인 물체를 엄격히 구분하고, 기능(faculté)의 구분 이외에 일체의 영혼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비롯하는 결과다. 따라서 그에게는 전통적인 영혼 내의 갈등이라는 문제 역시 영혼과 신체 사이의 갈등의 문제, 또는 신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정념과 영혼의 활동을 나타내는 의지 사이의 갈등의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게 표상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정신에게 표상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표상의 하나인 정념의 종별성은 사물, 대상에 대한 인지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있지 않고,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데까르뜨는 정념을 “지각(perceptions) 또는 감각내용(sentiments) 또는 영혼의 동요(émotions)”(『정념론』 27절)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념이 지각이라는 것은 영혼의 활동인 의지와 구분하여 정념이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념이 감각내용이라는 것은 지성의 지각과 달리 정념은 혼잡하고 모호한 지각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동요라는 것은 인지적인 표상과 달리 정념의 특성은 영혼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념은 표상, 즉 사유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영혼 안에 존재하지만, 정념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과 정기들의 운동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념이 발생하는 최초의 원인은 외부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자극에 따라 발생한 신경기관 내의 정기들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glande pinéale)을 자극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 송과선을 통해 영혼 내에서 정념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기들의 운동은 정념 발생의 마지막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과는 상이한 본성을 지닌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사유의 양태들이라는 데서 정념(passion), 즉 수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따라서 데까르뜨에서 정념들은 외부 대상 내지는 인간 자신의 신체의 운동을 원인으로 갖고 있지만, 영혼에 속하는 사유양태들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정념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데까르뜨가 정념발생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데까르뜨가 전통적인 정념론의 문제점을 정념의 성격과 원인의 혼동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꼴라철학에 이르는 정념론은 정념의 원인을 영혼 자체에서 찾고 이에 따라 정념을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데까르뜨에 따르면 이는 정념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나 정념의 유용성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데서 장애가 될 뿐이다.

1-3) 정념의 분류와 열거

데까르뜨의 방법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 정념의 분류와 열거는 정념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하는 데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데까르뜨의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의 이념은 모든 학문대상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영역에서 확실성을 수립하는 절차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처럼 정념론에서도 이 보편적인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정념의 분류나 열거로 표현된다.

데까르뜨의 방법은 우선 가장 단순한 것, 가장 기초적인 것을 찾고 이로부터 복잡한 것, 파생적인 것을 연역하도록 요구한다. 정념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여섯가지 기초정념들, 즉 놀람, 사랑과 미움,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제시된다. 이 여섯가지 정념들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기초정념들로 환원되거나 포섭되지 않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자신의 하위 정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섯 가지 정념들 사이에 위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분류하고 제시하는 순서는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제시되는 정념은 놀람이고, 그 다음 사랑과 미움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욕망과 기쁨, 슬픔이 제시된다. 이러한 순서는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고 있다. 정념을 열거하는 첫 번째 기준은 새로움 또는 단순성이다. 여기에서 새로움이란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항상 영혼을 놀랍게 만든다. 영혼의 변화가 모든 정념의 공통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미의 놀람은 정념의 가장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것은 아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반대항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이 첫 번째 기준에 따르면 최초의 기초정념은 놀람(admiration)이다.

두 번째 기준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이다. 여기서 이로움과 해로움은 대상 자체의 객관적인 성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별된다. 우리에게 부합하는 것으로 표상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해로운 것은 그것을 미워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기준에 따른 기초정념은 사랑과 미움이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정념은 놀람에 비해서는 복잡하지만, 아직 시간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욕망과 기쁨, 슬픔에 비해서는 단순하며, 따라서 두 번째 순서에 위치하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기준은 시간이다. 이는 욕망과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기초정념을 분류한다. 데까르뜨는 과거 및 현재보다는 미래가 정념에 고유한 시간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서 미래와 관계하고 있는 욕망을 맨 앞에 위치시키고 있다. 욕망 다음에는 현재와 관련을 맺고 있는 기쁨과 슬픔이 따라나온다. 데까르뜨는 이 여섯가지의 기초정념들을 기준으로 다른 여러 정념들을 설명하고 있다(69절 이하). 당대의 정념 분류법의 표준을 제시해주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류기준은 욕구하게 하는 것(concupiscibilis)과 성마르게 하는 것(irascibilis)의 두 가지 종으로 정념을 분류하고, 이 두가지 종들에 각각 6개와 5개의 하위정념을 귀속시켜 총 11개의 정념을 기본정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분류법과 비교해 본다면 데까르뜨의 정념론은 두 가지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의 정념론은 욕구와 성마름이라는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한 전통적인 종적 구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정념들 사이에 일체의 파생관계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1-4) 정념의 기능

데까르뜨 정념론의 또다른 독창성은 정념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정념은 배제되거나 될 수 있는 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데까르뜨는 정념을 영혼과 신체의 연합체인 인간의 고유성에서 비롯하는 자연적 조건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정념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까르뜨 정념론의 두 가지 중요한 구분을 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먼저 정념과 의지의 구분이 있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정념과 의지는 각각 영혼의 수동과 능동을 나타낸다. 즉 정념이 자신과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신체의 운동이 영혼에 산출한 결과로서 신체의 운동에 대한 영혼의 수동성을 나타낸다면, 의지는 영혼의 고유한 힘, 능동성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 구분이 갖는 첫번째 의미는 영혼에게는 정념을 발생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외부대상이 위협을 할 때 정기들의 운동에 따라 영혼에는 두려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해로운 대상이 표상될 때 미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는 신체가 영혼에 직접 작용할 수 없듯이, 영혼 역시 신체에 직접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이는 영혼의 활동이 신체에 속하는 정기의 운동에 의해 결정거나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영혼은 정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면 영혼은 신체의 운동과 정념의 발생 사이의 습관적 인과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힘이 곧 의지의 능동성이다. 데까르뜨에게 의지의 능동성은 영혼이 신체의 직접적 요구를 표현하는 정념들의 힘에 좌우되지 않고, 삶을 잘 보존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행위들을 수행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능력의 요체는 신체의 직접적 요구와 정념 사이의 자연적 인과관계를 변화시켜 정념이 의지의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데 있다.

또다른 중요한 구분은 정념과 내적 동요(émotions intérieures) 사이의 구분이다. 데까르뜨는 전통적인 영혼의 분할론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영혼이 겪는 두 가지 동요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외부 물체의 작용에 의해 야기된 외적 동요, 즉 정념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 자신의 힘에 의해 생겨난 내적 동요다(『정념론』 147-148항). 내적 동요는 정념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감정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외부 대상이 아니라 영혼 자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영혼이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개념적 장치가 된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영혼이 자신의 정념들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영혼의 반성이다.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정념으로서의 기쁨, 즉 슬픔을 맞짝으로 갖고 있는 기쁨이 아니라, 정념들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내적 평정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기쁨, 즉 지적 기쁨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기쁨은 영혼이 정념들에 좌우되지 않고 정념들을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다. 데까르뜨가 “다른 모든 미덕의 열쇠”(『정념론』 161항)로 간주한 관대함(générosité)이 미덕이면서 동시에 감정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내적 동요 덕분이다.

2. 기회원인론과 정념의 일반화: 말브랑슈의 정념론

말브랑슈의 정념론은 『진리탐구』(1675)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정념론은 데까르뜨의 이원론적 관점을 좀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밀고나가면서 이를 기독교적 관점과 화해시키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즉 말브랑슈는 데까르뜨가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통해 정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을 비판하면서 기회원인론의 관점에서 정념을 일반화하고 원죄론의 관점에서 정념의 유용성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2-1) 기회원인론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의 부정

말브랑슈 정념론의 이론적 기초는 기회원인론에 있다. 앞서 본 것처럼 데까르뜨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시초관념 이외에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 위에서 자신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세번째 시초관념이야말로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의 주요한 비판대상이며, 이 비판이 그의 정념론의 기초를 이룬다. 말브랑슈가 세번째 시초관념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두 실체인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 따라서 정신과 물체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점이다.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충실히 따르려는 말브랑슈에게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적 후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념이라는 현상이 어떤 식으로든 영혼과 신체의 연관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말브랑슈는 이원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이 연관성을 해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된다.

말브랑슈의 해결책의 요체는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통해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을 과감하게 탈실재화하는 길을 제시한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인과적 힘은 신에게만 존재할 뿐이며, 일체의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일으킬 만한 힘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 물체의 인과 작용에 의해 우리의 신체가 변용되고 이것이 다시 정기들의 운동을 통해 송과선에 전달되고, 그 결과 영혼 안에 어떤 정념이 발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외양에 불과하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는 사실은 각각의 경우마다 작용하고 있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비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비가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신의 의지의 연속적인 활동의 표현일 뿐이다(『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7권 13장).

둘째, 말브랑슈는 신과 정신의 연합, 신체와 정신의 연합으로 연합 개념을 이중화한다. 이 두 가지 연합 중 사유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신과 정신 사이의 연합만이 실재적 연합이며, 이 연합은 수동적인 정신에 대한 능동적인 신의 활동을 사고하기 위한 범형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신에 대한 정신의 이러한 원초적인 수동성은 뒤에서 볼 것처럼 말브랑슈에서 정념 개념이 일반화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이처럼 신과 정신 사이에는 무매개적인 연합관계, 또는 오히려 의존관계가 존재한다. 반면 데까르뜨가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고 부른 것은 항상 이미 신과 정신의 연합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더 나아가 정신과 신체/물체가 전혀 상이한 이질적 실체인 데다가 정신에 비해 신체/물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훨씬 낮기 때문에,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연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은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적이게 되는 만큼 전능한 신의 의지의 작용력은 더욱 더 강화된다.

이 두 가지 논변의 결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데까르뜨의 세번째 시초관념은 실재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되며, 정념의 본성에 대한 이해 역시 광범위하게 변모된다.

2-2) 정념의 재분류와 일반화

기회원인론이 낳은 주요 결과 중 하나는 정념의 재분류다. 말브랑슈는 형식적으로는 데까르뜨의 정념의 분류와 순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그는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놀람을 첫번째 정념으로, 사랑과 혐오(aversion)를 그 다음에 오는 정념의 쌍으로 제시하고, 마지막에 기쁨과 슬픔, 욕망의 정념들을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런 외양과는 달리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의 정념 이해와 분류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신체의 운동의 결과로 영혼이 겪게 되는 표상이라는 데까르뜨의 정의와는 달리 “정기들의 외재적 운동의 기회에 영혼이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동요들”(『진리 탐구』 5권 1장)로 규정된다. 즉 기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한자들에게 일체의 인과적 작용력을 박탈하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정념은 외부 물체에 의해 신체가 변형되는 순간에 신에 의해 영혼 안에 생산된 심리 현상으로 규정된다. 이 정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데까르뜨의 정념론에 대한 세 가지의 변형을 함축한다.

먼저 이는 정념들을 신의 원초적 사랑의 양상들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외부 대상이 우리의 지성이나 감각에 나타나고 이것이 정념을 촉발할 때, 우리의 의지는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면 이를 추구하고, 나쁜 것으로 보이면 이를 회피한다. 그런데 말브랑슈에 따르면 의지에 의한 이러한 추구와 회피의 작용은 실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표현에 불과하다. 즉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의지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회피하는 것은 신이 설정한 선 일반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이끌림의 표현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말브랑슈는 의지를 “우리를 비규정적이고 일반적인 선으로 향하게 하는 자연적 운동 또는 인상”(『진리 탐구』 1권 1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정념 이해는 사랑을 모든 정념의 원형으로 제시하게 된다. 즉 놀람은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첫번째 순서에 놓이지만, 말브랑슈에게 이는 “불완전한” 정념으로 간주된다. 놀람은 선에 대한 관념이나 감각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놀람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진리 탐구』 5권 7장). 그리고 데까르뜨에서 사랑과 미움에 해당하는 정념인 사랑과 혐오는 사실은 사랑의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혐오는 사랑의 부정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쁨과 욕망, 슬픔이라는 나머지 정념들 역시 말브랑슈에 따르면 각각 “기쁨의 사랑, 욕망의 사랑, 슬픔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슬픔은 우리가 추구하는 선이 우리에게 금지된 상태를 표현하며, 따라서 슬픔은 이러한 금지를 벗어나 선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의지, 즉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기회원인론은 데까르뜨가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의지를 근원적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곧 정념의 일반화를 가리킨다. 데까르뜨는 영혼의 상이한 능력을 구분하면서 의지에 능동성을 부여하고 지성에게는 수동성을 부여했다. 반면 말브랑슈에게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인간의 의지는 능동성을 결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식과 의지 모두는 인간 영혼 안에서 각자가 맡고 있는 기능에 따라 분화되기 이전에 신의 능동적인 작용의 수용이라는 공통적인 특성에 따라 규정된다. 따라서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매우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아르노와의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말브랑슈가 관념을 자체적인 인과적 작용성을 보유한 신의 본질의 일부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2-3) 정념의 기능

말브랑슈에게 정념의 기능, 정념의 유용성의 문제는 그의 종교철학, 특히 원죄론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말브랑슈도 정념의 자연적 유용성을 긍정한다. 즉 인간이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 정념은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정념은 우리의 신체를 보존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정념이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지니고 이를 신이 설정한 질서를 추구하는 데 잘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원죄 때문에 신체에 대한 이러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신체의 감각적 욕구에 좌우되어 선 일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욕구(concupiscence)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욕구는 “원죄에 의해 생겨난 자연의 무질서”(『진리 탐구에 대한 8번째 해명』)로서, 모든 인간은 원죄 때문에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이에 따라 욕구의 운동에 좌우된다. 아담도 역시 그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였으나, 원죄를 범하기 전에는 감각적 자극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영혼이 원하는 방향대로, 즉 신이 설정한 질서에 따라 신체를 잘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모든 악덕은 원죄 이후에 생겨난 이러한 신체의 반역에서 비롯하며, 반대로 미덕은 오직 신이 설정한 질서를 잘 따르는 데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덕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질서가 요구하는 행동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이 아니라, “질서를 잘 따르려고 의지하는” 것이다. 즉 의지적 노력이야말로 미덕을 특징짓는 핵심적 요소다.

하지만 원죄에 의해 사람들이 욕구에 따르게 되었다면 어떻게 미덕을 지니는 것이 가능한가? 말브랑슈에게 이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원죄 이후의 인간에게 습관 개념과 욕구의 개념이 일종의 악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신체와 정신 모두가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습관에 따라 작용하고, 원죄 이후 이 습관은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형성되어 왔다면, 어떻게 이 악덕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말브랑슈는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원죄를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항상 자신 안에 또한 질서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이 유덕한 활동의 능력을 교육을 통해 잘 길러낸다면 욕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질서에 대한 사랑의 습관을 기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희망어린 답변이다.

3. 정념에서 정서로: 스피노자의 정서론

우리가 본 것처럼 데까르뜨와 말브랑슈는 심신이원론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정신과 신체가 자율적인 질서에 따라 존재하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코나투스론을 통해 이를 일원론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는 정서의 문제를 코나투스라는 존재론적 기초 위에서 다루고 있으며, 둘째, 정서의 문제를 역량의 증대와 감소 및 수동성과 능동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의하고 있다.

3-1) 정서론의 존재론적 기초: 코나투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코나투스(conatus) 이론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를 자신의 현행적 본질로 갖는다. 인간의 경우 이는 충동(appetitus), 또는 충동에 의식이 결합된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를 유한 양태의 현행적 본질로, 그리고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정의하는 것은 정서론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코나투스론은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와 달리 일원론적 관점에서 정념 또는 정서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존재론적 기반을 제시해준다. 데까르뜨는 정념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이원론적 관점 대신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그는 신체의 작용과 영혼의 작용을 매개해주는 송과선이라는 신비스러운 가설을 도입함으로써 후배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통일성을 함축하는 코나투스 개념에 근거하여 데까르뜨의 문제설정을 변화시키고 있다. 즉 코나투스는 정신과 신체 중 어느 한 쪽의 존재 및 활동 역량이 아니라 이 양자를 통해 동시에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동일한 역량이다. 그리고 이처럼 유한자가 지니고 있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의 증대와 감소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정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에게는 데까르뜨 및 기회원인론자들을 포함한 당대의 데까르뜨주의자들의 정념론의 근본 문제였던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이라는 문제가 더 이상 하나의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에게는 정서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문제가 근본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영혼에 신체가 작용한 결과의 표현, 곧 ‘영혼의 수동’의 문제로 제시되었다. 이는 곧 영혼과 신체, 정념과 의지의 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윤리학』 2부 정리 7)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와 연장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적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양자는 동일한 존재론적 통일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는 데까르뜨와 달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과 비례한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정서론에서는 영혼에 대한 신체의 작용, 즉 정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과 신체를 통해 동시에 표현되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을 증대하고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정서는 수동성만을 함축하지 않으며 능동성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역량(potentia)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유한자들에게 능동성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자들은 신의 본질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유한자들은 실체와 같이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능동화의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정념들의 능동화는 적합한 인식, 즉 이성의 활동을 요구하며, 역으로 적합한 인식의 두 가지 유형으로서 제 2종의 인식과 제 3종의 인식은 정서들의 능동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의 또다른 특징은 정서와 이성의 지속적인 결합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3-2) 정서의 정의와 분류

스피노자에게 정서(affectus)는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하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들(affectio)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으로 정의된다(『윤리학』 3부 정의 3). 이 정의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에서 동원되고 있는 스피노자 철학의 다른 두 가지 주요 개념, 즉 관념 및 변용과 정서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정서는 관념의 한 종류이지만, 인지적 기능에 따라 정의되는 일반적 관념과 달리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 그리고 변용은 외부 물체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미쳐 생겨난 신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나 감소, 그리고 더 나아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과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정서 개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역량의 증감 및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데까르뜨나 말브랑슈가 정념으로 간주한 것, 즉 놀람,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 등이 스피노자에게는 정서의 한 부분, 즉 수동적인 정서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또는 이 각각의 정서들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분화 과정 속에서 사고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브랑슈가 기회원인론을 통해 유한자들의 역량을 최소화한 데 비해,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정서를 역량의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점도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그 결과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서는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사고하기 위한 필수적인 범주로 제시된다.

스피노자는 정서 분류에서도 데까르뜨 및 말브랑슈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데까르뜨가 여섯가지의 기초정념을 제시한 데 비해(이는 말브랑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기초정서를 제시한다. 이중 첫 번째는 욕망이며, 그 다음은 좀더 작은 완전성에서 좀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기쁨의 정서와 좀더 큰 완전성에서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슬픔의 정서가 있다. 이 세 가지 중 욕망이 첫번째 순서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코나투스, 인간의 현행적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정서 분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데까르뜨에게는 최초의 기초 정념으로 제시된 놀람이 아예 정서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보기에 놀람은 어떤 적극적인 원인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역량의 증대나 감소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놀람은 우리를 놀라게 한 외부 대상에 우리의 주의를 고착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에 따라 사물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을 낳는다는 점에서 수동성의 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까르뜨가 두번째로 위치시킨 사랑과 미움을 주요 정서들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는 사랑과 미움이 각각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이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의 변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랑(적어도 그 일부)과 미움은 기쁨과 슬픔을 제공해 주는 원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기억이나 유사성 등의 표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쁨과 슬픔의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3-3) 수동성과 능동성

스피노자 정서론의 독창성 중 하나는 능동적 정서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메커니즘을 설명한 데 있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자연주의적 관점, 즉 어떤 정서는 그와 대립적이면서 그보다 더 강력한 정서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윤리학』 4부 정리 7). 따라서 『윤리학』의 목표인 윤리적 해방(이는 『윤리학』 4부의 제목이 [인간의 예속에 관하여]이며, 5부의 제목은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인 데서 잘 드러난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서에서 생겨나는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스피노자 정서론에서 이는 능동적 정서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능동을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날 때, 즉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만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따라나올 때 우리는 능동적”(『윤리학』 3부 정의 2)이라고 정의한다. 반대로 수동은 “우리가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올 때 우리가 수동적”(같은 곳)이라고 정의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건의 적합한 원인인지 아니면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인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가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부적합한 제 1종의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은 공통 개념의 형성에 의존한다. “부분과 전체에 공통적인”, 따라서 항상 참된 공통 개념은 보편적 인식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특한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서의 문제에서도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내재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해줄 일종의 보편적 매개를 요구한다.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이 바로 이러한 매개의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랑 자체는 외부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정서다. 더 나아가 보통의 사랑은 쉽게 반대의 것, 즉 미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상과 예속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을 향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지속적인 정서일 뿐 아니라, 이것의 반대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 역량의 증대라는 사랑의 정서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서다. 따라서 신을 향한 사랑은 수동적인 정서로서의 보통의 사랑이 능동적인 사랑, 즉 신의 지적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로 간주될 수 있다.

3-4) 신의 지적 사랑

사람들은 보통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번역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 신의 지적 사랑은 보통의 사랑처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외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3부 정리 13의 주석)이라는 사랑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사랑은 상상적이며, 따라서 지적 사랑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아울러 바로 이 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사랑과도 구분된다. 곧 신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상상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지만, 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대립하는 정서로 전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최대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에 비해 신의 지적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이 때문에 항상 능동적이다.

둘째,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좀더 근원적인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두 측면을 이룬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의 신은 인간들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5부 정리 36의 주석) 이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의 1, 정리 11)이라는 정의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잘못은 세번째 측면에 있다. 스피노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제 3종의 인식,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5부 정리 36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인간정신의 본질에 따라 설명될/펼쳐질 수 있는 한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스피노자가 바로 덧붙이듯이 이는 “곧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 정신의 신을 향한 사랑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보편화의 운동이며, 반대로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은 개별적인 영혼의 지적 사랑으로 표현되는 개별화의 운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영혼의 지적 사랑이 가장 보편적인 신의 사랑, 곧 능동화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보편적인 인식을 목표로 하는 두번째 종류의 인식을 넘어서, 합리적 인식과 능동적 정서가 결합되는 세번째 종류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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