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인 [역사에 관한 글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을 위한 해제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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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비-역사, 알튀세르의 비-현재성: [역사에 관한 글들] 한국어판 해제

 

 

- 알튀세르의 새 유고집이 나왔군. 읽어봤어?


- 방금 읽어봤지.


- 그래 어떤 거 같아?


- , 놀랐지. 아니 어쩌면 그렇게 놀랄 것도 없겠지. 왜냐하면 읽기 전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놀랍지만 놀랄 것도 없다 ... 어떤 점이 그렇지?


- 마치 이 책과 우리 시대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백 만 년 전의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게 놀라웠지. 이 유고집에 수록된 글들은 1963년에 쓴 글에서부터 1986년에 쓴 글까지 약 20여 년의 시간적 범위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 1970년대 초중반에 작성한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 실제 느낌은 수백 년은 된 것처럼 느껴져. 반면에 예컨대 발터 벤야민이 1921년에 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아니면 1940년에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같은 글들은, 알튀세르의 이 책보다 족히 50년 내지 30년 전에 쓴 것인데도 오늘날에도 생생한 현재성이 느껴지지. 그런 점이 놀라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그럴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야. 알튀세르의 다른 유고집, 예컨대 [검은 소]나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같은 것을 읽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이미 지나간 시대의 지나간 언어로 말하고 너무 낡은 이론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이지.


- 아 그렇군. 그건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겠지? 알튀세르는 말하자면,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철학자들(들뢰즈,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등)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니까 말이야.


알튀세르는 몽테스키외에 관한 훌륭한 작은 책을 썼고[Louis Althusser, Montesquieu, la politique et l’histoire, PUF, 1959; 루이 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라캉 정신분석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썼고[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1964),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IMEC/Stock, 1993; 프로이트와 라캉, 김동수 옮김, 󰡔아미엥에서의 주장󰡕, , 1991.], 피콜로 극단에 관한 비범한 비평을 했고[Louis Althusser, “Le “Piccolo”, Bertolazzi et Brecht: Notes sur un théâtre matérialiste”, Pour Marx, Éditions la Découverte, 1996;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루소에 관한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고[Louis Althusser, “Sur le Contrat Social (Les décalages)”, Cahiers pour l’analyse no. 8, 1967; 루소: 사회계약에 관하여, 󰡔마키아벨리의 고독󰡕, 앞의 책. 또한 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참조.],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창적인 유고를 남겼고[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1972), Tallandier, 2009], 더욱이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심지어 논문 한 편도 발표하지 않고서도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지만[특히 Juan Domingo Sánchez Estop, Althusser et Spinoza. Détours et retours, Éditions de l'Université de Bruxelles, 2022 참조.], 그 모든 게 결국 마르크스와 관련되어 있었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창성을 사고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거쳐 우회하려고 했고,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 특히 라캉 정신분석과의 이론적 동맹을 시도하려고 했고, 관념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사고해보기 위해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썼고, 구조적인 역사 개념과 다른(결국 거기에서는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기는 어려우니까), 말하자면 정세 또는 콩종크튀르conjonctures로서의 역사를 극한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마키아벨리를 끌어들인 거지.


- 그렇지.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빼면 남는 게 없지. 그런 만큼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할까?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나 양상이 있을 테니, 너무 경제주의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교조주의적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어보면, 역사란 무엇인지,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역사와 비역사의 구별 기준은 무엇인지에 관해 철학적 논의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게 결국 생산양식으로 귀착되거든. 이렇게 말하지. “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는 하나의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308~309) 또는 이렇게도 말하지.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으로부터의 [역사-인용자 추가], 그리고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에 의한 역사, 즉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312) 마치 사회구성체나 생산양식 말고는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 그럼 미시사나 여성사 같은 건 뭐지? 또는 이주사나 환경사는?


더 나쁜 건 끊임없이 생산양식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한다는 거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레닌의 [제국주의]에 기초하여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그리고 또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역사적 동력”(272)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1980년대라면 아마 여러 사람에게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난 거 아닌가? 말 그대로 지나간 역사, 돌아오지 않을 역사지. 물론 계급에 대해 계급투쟁이 선행한다는 주장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관점과 부합하는 그럴 듯한 얘기인데,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공산주의자 선언]“[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일 뿐이다라거나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같은 명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너무 낡아빠진 얘기 아니야? 이런 본질주의, 이런 환원주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읽어보는 듯해.


- 나도 한 마디 해보자면, 생산양식이나 계급투쟁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꼭 본질주의적이라거나 환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까 자네가 지적했듯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작업을 자신의 철학 전체의 내기로 삼았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지.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 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1972),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p. 182.]


이건 알튀세르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사실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라고 하기는 어려워.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를 내고서 교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온갖 비판과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더욱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기 위해 고안해낸 과잉결정이라든가 인식론적 절단, 아니면 이데올로기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호명 같은 개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바깥에서도 널리 활용되었잖아.


그럼에도 자네와 같은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을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 또는 환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외상(, trauma)이 깊다는 뜻이겠지.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생산양식이나 생산관계 또는 계급투쟁을 말하고, 사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 논하는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실제 그런 범주들이 먼 과거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범주들, 그리고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20세기 노동자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의 상처를 망각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또 그것은 그만큼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의 이 책이 낡은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깊은 신념을 바탕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썼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 왜냐하면 자네가 말한 대로 알튀세르가 다양한 이론적 원천을 활용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비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얘기지. 1960~70년대라면 알튀세르의 이론이 새롭고 의미가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야. 오늘날에는 알튀세르의 제자뻘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옛날 얘기로 간주되고 있잖아?


더욱이 알튀세르가 아무리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해도 그는 한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교조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해. 이 책에도 나오지만 알튀세르는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생산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생산양식은 단순히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는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역사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지. 말하자면 칸트의 초월론적인 것이 알튀세르에게는 생산양식에 해당되는 거야. 무엇이 역사적인 것이고 무엇이 역사적인 게 아닌지, 수많은 사건들 내지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게 바로 생산양식이라는 것이지. 이것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정교한 이야기이긴 해도 결국 교조주의적인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결국 인종적 관계도, 성적 관계도, 그리고 생태적 위기도 모두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최종 심급에서”. 하지만 최종 심급이 가능하다고,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 아닐까?


- 나는 자네들의 이야기에 각자 일리가 있다고 봐. 한편으로 보면 알튀세르는 확실히 생산양식을 일종의 초월론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초월론적인 기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주의 또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관념론 철학과 달리 마르크스는 초월론적인 기준을 초월론적 주체나 정신에서 찾지 않고, 물질적 토대인 생산양식에서 찾았다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철학자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또 이렇게 단일한 초월론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오늘날의 사유 흐름에 비춰보면 낡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오늘날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나 생산양식에 대해,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대신 푸코를 따라 규율권력이나 생명권력, 통치성에 대해 말하거나 아니면 신유물론자들처럼 사물 그 자체의 권력(power of the things)에 대해 말하지. 또는 젠더나 성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거나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느라 바쁘지. 아니면 적녹보 연대라든가 교차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말이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리고 그것이 산출한 거대한 외상과 더불어 세계는 변화하고 사회운동도 많이 바뀌었고 아울러 사상의 조류도 크게 변화한 거지. 우리나라만 해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후에 민중민주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대신 포스트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이 사상계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가역적인 현상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20세기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돌아오지 않을 역사가 되었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게 아닐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셈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에 따라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돌아오지 않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건재해 있고, 착취와 배제,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각종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는데 말이야. 진지한 이론가나 시민이라면, 또는 적어도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또 당연히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되고, 그것은 생산양식, 생산관계, 계급투쟁 같은 질문을 수반하게 되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어휘법은 오늘날의 사상 조류와 잘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질문이나 주제는,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도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내게도 발언의 기회를 줘. 나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한 마디 해볼게. 자네는 알튀세르와 오늘날의 사상의 차이를 어휘법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심층적일 수도 있을 듯해.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작업은 이른바 언어적 전회바깥에서 진행되었는데, 포스트 담론은 결국 언어적 전회 이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담론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유행한 것은 이 때문이지.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언어적 전회의 관점에서 보면, 실재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면 생산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테면 담론 양식일 거야.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담론 양식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 그럴 수도 없고.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에 놓이게 되면 담론은 대문자 주체가 되거나 실재 그 자체가 될 텐데, 언어적 전회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따라서 담론적인 것은 인식론적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 상위의 질서에 놓이되 그 자체가 초월론적인 것은 아닌 셈이야. 이런 측면에서 보면 데리다가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antal)이라고 부른 것은 언어적 전회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지.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적인 것은 단지 고전적인 초월론 철학에서처럼 가능성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경우 담론은 단순히 방법론적 용어 이상의 것이 되지.


초월론에서 유사초월론으로의 전환은 사실 보편의 다수성과도 관련되어 있어. 보편이 단일한 것이라면 단일한 초월론적 토대(말하자면 생산양식 같은 것)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하겠지만, 다수의 보편이 문제가 된다면 과잉결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과소결정(sousdétermination)을 함께 말해야 하지. 과소결정은 바로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언어적 전회 바깥에 있었지만, 사실 그 나름의 방식대로 언어적 전회와 비견될 만한 문제설정의 전환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과잉결정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어느 시점 이후부터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함께 말하거든. 그리고 그 시점은 아마도 68의 실패 이후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하면 초기에는 어떻게 하면 혁명이 일어나는지, 혁명의 가능 조건에 관해 과잉결정 개념으로 답변하려고 했다면, 68 이후에는 어떤 조건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는지 그 불가능성의 조건을 함께 사고하려고 했으니까.


아울러 이와 더불어 알튀세르는 나름의 방식대로 다수의 보편을 사고해보려고 한 게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이 존재하는 듯해. 한편으로 알튀세르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을 반()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다수의 보편을 사고하려고 하지. 그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토픽이야.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론에 토픽의 형태를 부여한 것인데, 마르크스에게 토픽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물의 비유로 나타나지. 토픽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다수의 보편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구별”(128)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 법적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같은 곳)을 각각 독자적인 층위 내지 어떤 통일체에 내부적인 효력의 정도들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


하지만 다수의 보편에 대한 사고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우발성의 유물론이야. 이 책에서는 발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점이 잘 드러나지. 알튀세르는 공접합”(conjunction)이라는 범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한 고전적인 생산양식 이론과 비교해볼 때, 공접합 개념을 중심으로 한 우발성의 유물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돼. 하나는 생산양식의 요소들을 비동시대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거지(93쪽 이하). 이 경우에만 맹아라는 형태로 출현하는 목적론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게 가능해지거든. 다른 하나는 요소 A와 요소 B의 관계를 선형적 인과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구조적 효과에 따른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이야. 이 개념 덕분에 생산양식 내에서 상이한 요소들의 인과적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에게 구조적 통일성 내지 제약을 부여할 수 있게 되지


더욱이 알튀세르는 제한된 지대 내지 시퀀스에서 선형적 인과성의 효력을 긍정하고 있기도 하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서, 초월론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불분명하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과소결정 개념의 토대 위에서 급진적으로 탈구축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보편의 다수성을 사고할 수 있거든. 요컨대 생산관계와 인종관계, 젠더관계 또는 생태적 관계를,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의 배타적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것이지. 우발성의 유물론은 그런 사고의 싹을 함축하기는 하는데, 역으로 보면 그것은 구조적 인과성 전체의 효력을 실추시킬 위험도 지니고 있지.


그런데 이것은 알튀세르의 결함은 아니야. 우발성과 구조적 인과성을 함께 사유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거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철학적 과제인데 말이야.


-나는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어. 내게는 알튀세르가 철저하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사유하려고 한 것이 인상적이더군. 아까 자네는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오늘날 생생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 벤야민도 철저하게 패배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있지. 그가 메시아적인 것 또는 약한 메시아적 힘”(역사의 개념에 대하여2번째 테제)이라고 부른 것은 과거에 패배한 사람들이 남긴 구원이라는 항목을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색인(heimlichen Index)에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의 결을 거슬러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에 입각해서 역사를 읽어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아.


예컨대 알튀세르는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는 명제를 모든 형태들 밑에 있는 - 역사의 광대한 장을 열어젖”(136)힌 것으로 해석하지. 이것은 참으로 알튀세르다운, 이단적인 해석이지. 그에 따르면 역사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 곧 역사적 사실, 역사적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사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서구 전통 속에서 쓰인 공식적인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고 현상이야. 이것은 이를테면 역사의 좋은 측면이지. 반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의 나쁜 측면을 이러한 지배계급의 공식적인 역사 밑에서 사라진 역사, 또는 공식 역사에 의해 역사가 아닌 것으로 배제된 만큼 -역사라고 재해석하지. 따라서 마르크스가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고 말함으로써 보여준 것은 착취당하고, 압제에 신음하며, 모든 노역과 학살을 위해 과세를 부과당하고 징집되었던 대중들의 생성”, -역사가 되는 거야. 어때? 벤야민 생각과 놀랄 만큼 가까운 발상이 아닌가?


- 자네 얘기를 들으니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어. 말하자면 세 가지 유사초월론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지.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은 칸트 또는 후설적인 것이지. 원래 데리다의 철학적 원천이기도 하고. 반면 패배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으려는 벤야민의 유사초월론은 라이프니츠적인 거야. 벤야민은 지금-시간”(Jetzt-Zeit)라는 것을, 공허한 동질적 시간과 대비되는 일종의 역사의 모나드로 이해하니까 말이야. 반면 알튀세르가 과소결정 개념이나 우발성 개념을 통해, 또는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패배하거나 소멸된 것들의 비-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시사하는 것은 스피노자에 기반을 둔 유사초월론이 아닐까 싶어.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지!


- 그런데 지금까지 듣고 있자니 자네들은 아무도 문학사에 관한 대화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군. 마치 그 글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하긴 문학사는 역사라고 하기도 뭐하고 철학이라고 하기는 더 그러니,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역사에 관해 쓴 글모음에서 제대로 주목받기는 처음부터 어렵겠지. 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지만 놀라운 통찰력을 품고 있는 글이 피콜로 극단이듯이, 알튀세르의 이 책에서도 이 글이 다른 글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나는 알튀세르가 문학사의 병리학에 관해 말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 “전 세계 모든 문학의 사산아들”(58)에 관한 문학사라니! 이런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알튀세르는 이러한 문학사가 진정한 의미의 문학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사는 항상 세 가지 요소를 품고 있는데, 첫 번째가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되었던 것의 역사라면 두 번째는 문학으로 생산되고 성공했던 것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서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의 역사가 바로 그것들이지(61). 참 놀라운 생각 아닌가? 자네가 방금 전에 언급한 비-역사와도 관련되는 것이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과소결정 개념은 결국 이런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 그건 알튀세르 제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가 문학의 재생산에 관해 말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마슈레가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가?](1990) 이후로 문학 생산의 이론보다는 문학 재생산의 이론에 더 관심을 기울였지. 그리고 그건 결국 문학의 역할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공백, 빈 틈, 균열을 발견하는 것에서 찾지. 알튀세르의 생각과 아주 가까워 보여.


- 그런데 오늘날은 문학의 종언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사실 문학사는 비-문학의 역사가 된 건가? 아니면 문학의 비-역사가? 하하.


- 정리하자면, 이 책은 결국 알튀세르의 비-역사 또는 비-현재성의 증거가 되겠군.


- 사실 오늘날은 역사라고 하는 것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게 된 시대인 만큼, -역사, -현재성이라는 게 나쁘지 않겠군.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때맞지 않음, 시대에 거스름(contretemps)으로서의 비-역사인 셈이지.


- 그럼 자네가 아까 알튀세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 낡았다고 하는 것은 칭찬이겠네?


- 이봐,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지 말라고. 그건 따져봐야 아는 거라고.


-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하고 말하고 있는 거지? 자네는 누구고 자네는 또 누구인가? 우리는 과연 몇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거지?


- 그게 뭐가 중요하지? 자네는 자네가 누구인지, 자네가 몇인지 아나?


- 하긴 역사가 시작되면 모든 게 빗나가고 꼬이는 법이지. 그래서 특히 역사가들이 민족에 집착하는 건지도 모르지. 마치 그게 역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 그건 또 다른 초월론적인 것이겠지? 그들이 이 책에서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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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11-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오월의봄 근간이라고 하여 찾아봤는데 아직 출간이 되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23-11-16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 이제 막 출간됐습니다.^^

추풍오장원 2023-11-2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린트해 놓고 꼼꼼히 읽었습니다. 책 구입 전에 읽기를 잘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곰씹어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balmas 2023-11-22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2024-02-07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24-02-0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선생님 감사해요.^^ 오랜만에 댓글 주셔서 반갑습니다.^^
 














12월 1일부터 그린비 아카데미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읽는 강의를 


개설합니다.


아래는 강의 취지와 일정, 참고문헌입니다. 


강의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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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읽기 



2. 강의 취지

 

2023107일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 정당이자 무장조직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3주 가까이 전개된 현재 점점 더 전쟁 폭력이 무자비하게 확산되고 있다. 하마스의 테러리즘과 이스라엘의 국가테러리즘은 주로 어린이, 노인, 여성들과 같은 희생자들을 숙주삼아 적대와 분노, 공포의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도덕적정치적으로 우리는 바로 그 잔혹한 폭력의 현장 한 가운데 있다. 실로 우리가 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관여하는가 여부는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한 척도가 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강의에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그 자신이 유대인인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한나 아렌트, 발터 벤야민 등과 같은 다른 20세기 유대인 사상가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버틀러의 사색은 비폭력의 정치철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불길처럼 번져가는 극단적 폭력을 사유하기 위한 귀중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이 강의에서는 버틀러 사상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 성찰해보려는 이들과 함께 비폭력의 정치 내지 반폭력의 정치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려고 한다.

 

 

3. 강의 일정

 

이 강의는 전체 10강으로 구성될 것이며, 각 강의마다 책의 서론에서부터 1장씩 차례로 버틀러의 논의를 살펴볼 것이다.

 

 

4. 강의 참고문헌

 

1) 강의 교재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양효실 옮김, 시대의창, 2016.

 

매 강의마다 강사의 강의록이 제공됩니다.

 

2) 함께 읽을 만한 책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19.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2021.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 그린비 아카데미 홈페이지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읽기(온/오프) : 그린비출판사 (greenb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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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부터 23일까지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와 학산도서관 공동주최로 


"철학집중강좌, 스피노자와 니체"가 개최됩니다.


저는 11월 2일과 9일 두번에 걸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해 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강좌는 온라인으로만 이루어지는 강좌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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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 출판사에서 나온 시노하라 마사타케 교수의 [인간 이후의 철학] 추천사를 올립니다. 시노하라 교수는 몇 년 전에 [인류세의 철학]이라는 책이 국역되기도 했는데, 이 책도 역시 인류세의 문제를 다루는 책입니다. 좋은 책을 많이 내는 이비출판사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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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의 상상력, 사물적 유령론, 촉각의 언어: 인류세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

 

 

며칠 전 국제층서위원회(ICS) 산하 인류세실무그룹(AWG)이 캐나다 토론토 시 부근의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의 시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른바 대가속기가 시작된 1950년대 이후 핵실험과 원자력 발전에서 발생하는 플루토늄이나, 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발전소에서 태울 때 배출되는 구형탄소입자(SPC) 같이 인류세를 대표하는 주요 마커가 지구상에서 급속히 증가했다는 지질학적 흔적들이 이 호수의 퇴적층에 뚜렷이 나타나 있고, 이는 우리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 선정 이유다. 이제 제4기층서위원회(SQS)와 내년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차례로 투표를 거쳐 이 선정안이 통과되면, 내년 국제지질학총회(IGS)에서의 최종 비준을 통해 인류가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퍼드절에 들어섰다는 점이, 적어도 지질학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0년 미국의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네덜란드의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공식적으로 사용한 이후 인류세 개념은 지구 시스템과학이나 지질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 그리고 대중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확산되어왔기 때문에, 이런 뉴스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문학 또는 철학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학적 사건은 단지 새로운 지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사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특히 그것이 인류의 삶의 형태 및 방향, 우리의 윤리적 책임과 관련하여 무엇을 함축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류가 지금처럼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지(심지어 더욱 강렬하게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식의 삶의 형태와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인류세와 관련한 인문학 또는 철학의 고유한 물음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노하라 마사타케 교수의 이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류세 문제를 사유하는 인문학적인 사유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은 저자가 붕괴의 상상력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다. 붕괴의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왜 인류세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붕괴의 상상력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먼저 인류세가 인간의 조건에 관한 근대적 사유 및 문명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근대적 사유가 인간세계가 자연과 단절된 것이며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다”(5)고 보는 이해방식이라면, 인류세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으로 상정된 인공적인 문명 질서가 붕괴하거나 잠재적으로 폐기물이 될 수 있”(6쪽)음을 위협적으로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잘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을 넘어 자연의 지배자가 되기를 추구해왔는데, 인간의 자연 지배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 순응하는 존재자라는 가정, 물론 이런저런 저항과 부작용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인간이 점차적으로 탐사하고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는 수동적 대상이라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엽 이후 지배자로서 인간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그만큼 여기에 대한 자연또는 지구 시스템의 반작용도 더욱 강해져서 더 많은 폭염과 산불, 가뭄, 태풍과 침수, 영구 동토층의 해빙, 전염병의 빈번한 확산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가 산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지구 평균 기온을 2도 내지 1.5도 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욱 예측 불가능한 파괴적 결과들이 초래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세는 역설적 성격을 지닌 사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인류의 인공적 행위성이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지구 시스템 자체를 변동시킬 수 있는 위력을 보여주는 한에서, 주체와 객체 이원론 및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근대 철학과 문명의 정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는 이러한 변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지구의 폭력적인 힘과 인류의 가능한 종말을 가리키는 한에서, 인류의 왜소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위성과 주체성의 정점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약소함과 의존성을 보여주는 사태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세의 역설에서 반드시 붕괴의 상상력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류세라는 사태를,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연내지 지구시스템의 도전으로 이해하면서,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의 기본 방향에 입각하여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과학과 더 많은 기술을 통해 인류세의 도전을 극복하고 더 많은 발전과 더 많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것은 때로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역배출기술(NETs)이나 우주 양산 같은 기술적 대응의 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화성 이주와 같은 우주공학적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핵심은,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서 지구시스템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반면 시노하라 교수는 인류세의 의미를 지금까지 인류의 근본적인 생존 조건이라고 자각되지 못한, 따라서 사실상 배제되고 무시되어 온”(249) 지구시스템이라는 조건이 동요하면서 인류의 인공적인 문명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무너지게 된 사태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저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서 이러한 붕괴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붕괴의 가능성 및 현실성이 단지 지역적인 사태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와 관련된 보편적인 사태라는 점이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인간이 구축해온 문명 질서 내부에 어두운 바깥이 존재하며, 인간이 소멸하거나 부재하는 미래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니 그 세계는 이미 도래한 현실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여기에서 붕괴의 상상력이 나온다.


붕괴의 상상력은, 인류세를 통해 우리 인류가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했으며,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형태와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생명체들에게는 파멸의 길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절박한 철학적윤리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반드시 소멸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변적인 문제이다. 생태적 위기라는 현 시대의 생존 조건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종 또한 소멸할 수 있는 상황을 연결 지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202)


여기서 독자들은 SF의 여러 광경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우거진 잡초와 황량한 들판, 부스러기 잔해로 남은 문명의 흔적들, 마치 원시인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소수의 생존자들 사이의 치열한 생존 경쟁 ... 하지만 시노하라 교수의 붕괴의 상상력은, 통속적인 SF의 상상력과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첼피시 극단의 <고무지우개 산>이라는 연극은 저자의 붕괴의 상상력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연극의 한 대목에는 돌연 고장난 세탁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부분적인 파탄 내지 붕괴를 보여주는 것인데, 보통의 경우라면 서비스센터로 연락해서 수리를 받거나 아니면 코인 세탁방에 가서 세탁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붕괴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카다 도시키와 함께 저자는 이러한 사물의 부분적인 붕괴에서 다른 측면을 파악한다. 그것은 세탁기가 비활성화”(134)되었다는 사실이다. 세탁기의 비활성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세탁기의 각 부분이 세탁기라는 전체로부터 해방”(137)되는 것을 의미하며, 세탁기가 고장 나면서 들려오는 바삭바삭하는 소리는 세탁기로부터 벗어난 부품의 소리”(134)를 나타낸다.


세탁기라는 전체로부터 부분의 해방. 그것은 인간이 구축해 놓은 인공적 문명의 질서에서 세탁기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탁기를 포함하는 문명적인 사물의 질서를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관점이 깨지는 것을 뜻한다. 인공적 문명의 질서 내부에서 보면 세탁기의 고장(좀 더 큰 사례를 들자면, 카카오톡 서비스 장애 같은 것)은 상당히 번거롭고 불편한, 그리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일로 표상될 것이다. 그것은 하루빨리 수리되거나 해결이 돼서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기능 상태로 복원되어야 하는, 일시적인 일탈이나 장애 상황일 뿐이다.

이것은 인류가 구축한 현대 문명이 목적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고 있으며, 이러한 원리는 문명 내의 거의 모든 것이 기능적인 적합성 내지 최적의 상태에 따라 작동하도록 통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떻게든 전력공급망은 무사히 작동해야 하고 어떻게든 카카오톡 서비스도 지장 없이 가동되어야 하고 어떻게든 교통연결망도 지체를 유발하지 않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만약 이것들 중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체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이 망가지게 될 것이다. 전기가 수주일 동안 들어오지 않는 밤, 카카오톡이 1주일, 1달째 연결되지 않는 생활, 도로, 철로, 항공로가 막혀서 이동이 불가능해지는 삶 ...


그런데 저자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문명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을 상상해보도록, 그리고 그 상황을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라 해방으로, 적어도 우리 인류가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환영해야 하고 감수해야 하는 해방의 상황으로 생각해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기존 생활세계의 파탄으로부터 사물이 흘러넘치고 이와 더불어 인간도 이로부터 해방된다”(216)고 사유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디자인되고 구축된 현대 문명의 인공적 질서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작동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도적으로 환경을 훼손하거나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우리는 이미 지속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 및 지구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형 활동에 동참하는 셈이다. 저자의 붕괴의 상상력은, 그 존재 자체의 속성상 생태계 파괴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현대 문명의 기본 속성을 성찰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 책의 두 번째 인문학적 또는 철학적 특징이 도출된다. 이러한 특징을 (저자는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자크 데리다의 용어법을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유령론의 관점에서 인간 이후를 사고한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유령론은 무엇보다 물질적인 유령 내지 사물적인 유령에 관한 것이다. 사물적인 유령이란, 사물들이 실체로서 존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잔해 내지 흔적으로서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사물의 본질 또는 사물성이란, 그처럼 자기 자신으로-존립하지-않음, 완결되지-않음, 자립적이지-않음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주제와 관련하여 저자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사상가들은 최근 국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생태철학자 티머시 모턴과 영문학자 프레드 모튼, 그리고 일본의 사진작가 요네다 도모코 같은 사람들이다. 티머시 모턴은 생태적인 것을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연관된다는 것”(161)으로 정의하는데, 여기서 상호의존 내지 상호연관성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서로 관계를 맺기에 앞서 이미 모종의 자립적 실체들로서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2차적인 존재 방식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됨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턴이나 저자가 이해하는 관점에 따르면, 상호연관으로서 자연 또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물들을 그것들의 고정성과 독립성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지닌 세계상을 탈구축하는 작업이다. 첫째 이것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립하며, 불변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 실체로서의 자연 및 사물의 질서에 대한 탈구축을 함축한다. 자연적인 사물들의 부동적이고 자립적인 질서는, 사실은 자연이라는 것을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이 탐구하고 개척하고 정복해야 할 수동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관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변적이고 자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연이라는 표상은 인공주의적 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세계상인 것이다. 인류세로 표현되는 생태적 위기가 깨뜨리고 있는 것이 자연 및 사물의 질서에 대한 이러한 표상이다.


둘째,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사물을 형태 없는 흔적”(92)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턴이 말하듯 간객체적 공간”(space of interobjectivity, 164)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사물의 질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간객체적 공간이란, 단어가 표현하듯이 사물의 사이에 있는 공간”(164)을 말하는데, 단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사이란 이미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실체로서의 사물들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이 실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이는, 오히려 사물들을 성립하게 해주는 사이 또는 공간이다. 이러한 사이 내지 공간 이전에는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이 자체도 무언가 확고한 실체성을 지닌 어떤 것, 사물들이 공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가 멀어지고 벗어나 버리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164)이며,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의 행위가 현실 세계에 남긴 흔적을 축적한 공간”(164)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현실의 모든 사건은 존재하는 것이 그 흔적을 다른 것에 남겨 각인시킨 것이다. 간객체적 공간은 이런 모든 흔적의 총체에 불과하다.” 또는 요네다의 표현을 빌린다면 역사는 눈에 보이는 기념품이나 건축물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이 무형으로 태연하게 존재”(93)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독자들은 내가 왜 저자의 사유의 두 번째 특징이 사물적인 유령론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 입각하면 사물들은 흔적의 흔적이며, 간객체적 공간으로서의 상호연관은 실재성을 지니지 않지만 현실의 사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는 것이다. 확고한 실재처럼 보이는 인류 문명의 인공적 질서의 기저에는 유령적인 지하세계”(모튼)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여기에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이러한 사물적 유령론이 필요한가? 왜 자연적 세계를 포함한 실재하는 모든 것의 실재성을 이렇게 철저하게 박탈해야 하는 것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저자가 보기에 인류가 구축해 놓은 인공적인 문명의 질서, 그 자체로 생태계 파괴적인 그 질서가 너무나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고, 그 질서는 자연과 문명에 관한 실체론적 세계상 및 자연의 정복자이자 주인으로서의 인류라는 관점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고 정당화되고 있어서, 철저하게 이 질서 및 세계상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인류세가 제기하는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고 그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의 세 번째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감각을 매우 중요시하는 철학자라는 점이다. 저자는 공공권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합리주의적인 철학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철학이야말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최종적인 보루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 그리고 공공권에 기초를 둔 사유는 오직 감각에 의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감각은 취약성에 대한 실존 감각”(15)이며, 소멸을 사물의 존재양식으로 파악하는 감각, 소멸을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곳에 남겨짐”(28)으로 파악하는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일상적인 감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감각, 예술가들의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을 통해 드러나고 고양될 수 있는 감각이다.


저자가 말하는 감각의 차원은, 프레드 모튼과 클레어 콜브룩이 각자 제시하는 소리와 음향의 구별에 관한 논의에서 파악될 수 있다. 소리가 개별화된 음을 가리킨다면 음향은 어떤 개체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무수한 익명의 노이즈”(208)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음향은 인간 신체가 형성되고 조직화되기에 앞서 존재하는것이며, “인간 신체와 무관한 곳, 인간 신체를 벗어난 곳에서 생겨나고 존재”(210)하는 것이다.


이러한 음향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그것이 무언가 이야기되어야 함에도 이야기되지 않거나 이야기된다 해도 어떤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무시되는 극한적 상황, “자격 박탈의 상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들린다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소리, 곧 음향으로만 들릴 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소리와 구별되는 음향은 공공권에서 들리지 않은 세계의 파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계기를 전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음향은 인간적 신체를 넘어서는, 인간이 없는 매끄러운 공간”(들뢰즈가타리)의 차원을 감지하게 해준다. 그 공간은 지점이나 대상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바람, 눈 혹은 모래의 파동, 음향, 얼음 소리, 촉각적인 것과 같은 성질의 움직임, 방향성의 총체로서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212)되는 공간이다. 진정으로 생태적인 차원은 시각에 기반을 둔 언어를 넘어서는 이러한 감각, 촉각적인 언어의 발명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의 논의에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여러 독자들,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독자들이 보기에 저자의 입장은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어쨌든 사회적 합리성의 차원을 너무 과도하게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공공권의 철학과 촉각의 철학을 그처럼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것이 인류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일까,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양자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인문학 또는 철학적 가치는 이런 첨예한 논란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세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어떤 실정적인 대상(positive thing)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W. B. Gallie)이라는 점, 이처럼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차원의 개방 속에서만 인류세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성숙하게 다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인류세의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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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입니다. 


추석 연휴 시작이네요. 오늘 생명안전기본법 국민동의청원 마감입니다. 아직 1만 명이 부족합니다. 


다급한 마음에 부탁드립니다. 딱 1분씩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세월호참사 유가족 창현이 엄마가 7행시를 지은 동영상 보시고, 


국민동의청원에 참여해주시고, 주위에 1명씩 권유해 주시면 가능합니다. 


추석명절 즐겁고 쉼이 있는, 아울러 안전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 국민동의청원 참여하기 https://bit.ly/45IzNey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KN9uPMnOf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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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개미 2023-09-2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완료했습니다, 교수님 즐거운 추석 되세요~

balmas 2023-10-02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