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을 단 책이 한 권 나와 있구나.

당신의 아내는 왜 자살할 수밖에 없을까?

프랑수와 다고네 (지은이), 여인석 (옮긴이) | 청년의사

 

이 책은 프랑수아 다고네(Francois Dagognet)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의사-철학자의 대담집을

옮긴 책이다. 다고네는 바슐라르-캉귈렘의 제자이자 동료이며, 프랑스 과학사, 과학철학계의 거목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매우 다작의 철학자인데도 국내에는 한 권의 책도 번역되지 못해 아쉽던

참에, 찾아보니까 2004년에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걸 알고 오늘 구입해서 읽고 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질병의 철학을 위하여"(Pour une philosophie de la maladie, 1996)인데,

번역본 제목은 역자가 바꿔 붙인 모양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했는데, 1장 말미쯤 가니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원제인 <질병의 철학을 위하여>만큼 이 책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얼마전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의 정치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이

[나는 철학자다]라는 코믹한 제목으로 번역돼서 실소한 적이 있는데(아마도 출판사 사장이 개그를

좋아하는 듯하다. 번역은 좋은데, 책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놓았다.), 이 책의 제목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이 책은 3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프랑스 의학 사상의 계보에 대하여 다루고 있고,

2장은 생명 윤리학에 대해, 3장은 [건강의 사회정치학을 위하여]라고 해서 공공 의료 정책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대담집이라는 성격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게 술술 잘 넘어간다. 하지만 매 쪽마다, 아니 매 답변마다

다고네의 말과 생각은 간결하고 거침 없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핵심을 찌른다.  대가다운 풍모다.

아직 1장 뒷부분 정도밖에 안 읽었지만, 2장과 3장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시사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더 흥미진진할 것 같다.

 

몇 가지 인상적인 구절들.

"우리는 질병에 대해 순수하게 양적으로 판단하는 이론을 포기해야 합니다. 유기체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부과하는 규범을 위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26)

 

"의학은 무엇보다 분리의 학문입니다. [...] 병리학은 유기체 속에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상호관계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유명한 의사인 장 밥티스트 부이요는 류마티스의 증상과

심장질병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무릎의 관절과 심장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경탄할 만한 일입니다. [...]

그것은 몸에 대한 해부학적 독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와 그 안에 많은 길이 있는 하나의 '총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그것을 하나의 '전체'라고 말하며 내게 몸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일종의

실망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는 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입니다."(27)

 

"내가 철학자로서 상상했던 질병과 의사로서 접근한 질병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질병이란

고통이지요. 철학자로서의 나는 불행과 죽음과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29)

 

"새로운 의료 기술의 큰 기여는 몸을 외면화시킨 것입니다. [...] 이제 더 이상 몸을 열거나 죽음을 보기

위해 몸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 외면화란 몸을 외재화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의 내부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31)

 

"우리는 질병을 [완전히] 외면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초음파 기기와 컴퓨터 스캔과 같은

진보된 형태를 통해 방사선학은 우리에게 병변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기술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만족하지 않습니다. 기술 이전에, 그리고 기술을

적용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몸의 감수성입니다."(33)

 

"질병은 흔히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건강이란, 당신을 엄습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과감히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는 가능성인 것입니다."(42)  등등.

 

아주 적임자가 번역을 해서 매끄럽게 술술 잘 읽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인명의 번역이 잘못된

데가 있고, 간혹 원어가 무엇인지 궁금한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가령 위에서 인용한 "총체와 ""전체") ... 

그런데 책값이 너무 비싼 것 같다. 130쪽 정도 되는 책에 9500원이면 너무 비싼 거 맞지???

15% 할인을 해도 8000원 ...

거의 팔리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재미있고 유익하고 생각할 만한 것들을 많이 안겨주는 책이다.

깊이 있으면서 쉽고 명쾌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책을 쓰는 법, 말하는 법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나는 ...) 

 

나중에 서평을 한번 써봐야지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영엄마 2006-01-1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님이 올리실 서평을 눈여겨보겠습니다. ^^*

balmas 2006-01-13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보다 의사이신 분들이 써서 올리셔야 하는데 ... ^^;;

마늘빵 2006-01-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재밌겠다.

로드무비 2006-01-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읽고 땡스투 누를 거야요.(유인작전)
우선은 추천만!=3=3

마냐 2006-01-1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퍼 제목으로도 도발적이야요. 기둘릴께요. ^^;

balmas 2006-01-1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예, 재미있어요. 한번 보세요. :-)
로드무비님/ 추천 감사. 헤헤, 그럼 못이기는 척하고 말려들어볼까요? ^^;;
마냐님/ ㅋㅋ 제목이 좀 자극적이죠?

비로그인 2006-01-1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제목 정말 마음에 드네요. 님의 서평이 올라오면 보고 읽을것인가 말것인가 결정을..(실은 심히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balmas 2006-01-1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목 멋있죠?
책도 별로 안 어려워요. 명 문장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o^

포월 2006-01-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의 책의 제목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철학자이다'라는 주장에 순수사유와 파시즘의 관계가 압축으로 담겨있다고 보는 독자분들도 계시더라구요. ^^

balmas 2006-01-1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