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고 난 뒤, 도처에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개중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호소도 있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은 호소들도 있지만,
솔직히 잘 공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2002년 고 노무현 씨가 커다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부터 지금까지 근 10여년 동안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
하지만 한국 인문학 연구자들(및 독자들)의 심성을 잘 보여주는
현상 하나를 늘 껄끄럽게 생각해왔다.
그것은 이론에서는 (사석에서든 지면에서든) 늘 혁명과 변혁, 자본주의의 철폐를 외치면서
정작 현실에서는 민주당이라는 보수 야당 후보에게 거리낌 없이 투표하고
더욱이 그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지원한다는 점이다(단순히 전술적이거나 마지못해 투표하는 게 아니라).
후원회비를 냈다는 사람들도 있고 계속 유세를 따라다녔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선거가 끝난 이후의 주변 상황을 보니까 그 수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개중에는 심지어 캠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살 맛이 안난다느니, 일이 손에 안잡힌다느니,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느니 하는 하소연이
나올리가 없다.
새누리당이 집권하든 민주당이 집권하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거의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큰 이론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어서 민주당을 원래 지지하고,
더욱이 문재인 씨를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이야
당연히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2년 무렵에는 들뢰즈를 읽고, 최근에는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를 읽으면서
사석이나 이런저런 토론회 등에서는 늘 체제의 급진적인 변혁, 혁명을 이야기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들은 뭔가 성에 안차는 듯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정작 보수당 후보에게 그처럼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반대로 여태 오직 민주당을 지지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민주당만을 지지할 분들이
들뢰즈나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의 주장에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신기한 체질인 듯하다.
(하기야 평생 정의를 부르짖고 살아온 서울대 모 교수는 왜 뉴라이트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철학과 인생이 같은 줄 알아!'라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고 하니
머리와 몸, 철학과 인생이 따로 노는 것은
한국 인문학판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들뢰즈,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의 이론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읽는 한국 독자들의 지적, 정치적 (심지어 윤리적) 불충실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섣불리 단언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포스트 담론 및 프랑스 철학 수용이
결국은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문제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번 글로 써 볼 만한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