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총서의 첫번째 책인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가 이번 주에 나왔습니다.  



경북대에 계신 변학수 선생님께서 번역의 수고를 맡아주셨습니다. 사실 이 책은 번역자에게는 무척이나  

괴롭고 귀찮은 책인데, 이집트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로 된 수많은 문헌들이 인용되고  

있고 많은 경우 번역 없이 그대로 각주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번역을 해주신 변학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첫번째' 책이라는 것에 대해 큰 의미는 부여하고 싶지 않은데, 프리즘 총서에서는 1, 2, 3 같은 숫자보다는  

책 하나하나가 지닌 독특한 내용과 의미, 효과를 중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번째 책이라는 것보다는  

이 책의 탁월한 내용과 깊은 의의, 또 그것들이 국내의 인문학 논의에서 산출하게 될 효과들이라는 측면에서 

좀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탐독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표지에 대해 말씀드리면, 프리즘 총서는 7개의 작은 갈래로 이루어져 있고 각 갈래에서 나오는 책들은 

고유한 색깔을 띤 표지로 구별되는데, 얀 아스만의 이 책은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에 속해 있어서 노란색 

표지로 돼 있습니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낸 책 소개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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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reenbee.co.kr/book/book_info.php?article_id=171&series=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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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1-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나요?

balmas 2010-01-1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세요.^^ 저는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어요.^^ 서양문명사나 종교사 등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좋은 책이랍니다.

stella.K 2010-01-19 11:18   좋아요 0 | URL
헉, 오늘에야 님의 댓글을 보네요. 그렇군요.
정말 오랫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0-01-20 15:44   좋아요 0 | URL
예, 스텔라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든다. 과연 우리가 유럽인들보다 더 자세히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떠나지를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 조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지식생산자 또는 소비자들의 언급은 항상 빈약하다. 유럽중심주의적 이분법을 비판하면서도 본인이 그런 이분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 강철구 씨 같은 분이다. 아닌 것 같다고?

현실의 인식은 각자가 항상 다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닌가? 권력은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에 민주주의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돌출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문제인가? 아니면 문명 자체가 문제인가?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라?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우연적인 전개과정을 어떤 결과가 주어진 시점에서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라고 인식하고 결론을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이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은 소프트커버로 나오면 사고 안 나오면 안 살 것이다. 믿을 수 있는 번역들인지는 발마스 님이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다.

balmas 2010-01-19 01: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프리즘 총서의 책들은 모두 소프트커버로 나올 예정입니다.^^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번역은 될 수 있는 한 유능한 분들께 맡기고 세심하게 검토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왜 탈-근대적인 것, 포스트식민적인 것, 철학적인 것, 예술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신자유주의, 생명권력을 서로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봐도 저 프리즘들은 모두 겹쳐서 이야기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푸코는 분과학문의 경계는 자의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발마스 님 또는 프리즘 총서의 저 자의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푸코를 얘기하지만 별로 푸코적이지도 않다.

탈-근대적이면서 포스트식민적이고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이며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면서 예술적인 것 아닌가? 그것들이 별개의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이 프리즘 총서의 기획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이 프리즘 총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을 꿈꾸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의 저작들을 내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

발마스 님이나 프리즘 총서 기획자는 내 글을 부당하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물어 보자. 라틴 아메리카 해방 철학의 대가인 엔리케 두셀이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이 아니라 왜 포스트식민주의의 프리즘에 속해 있는가?

그는 "트랜스모더니티"라는 개념으로 유명한데 그러면 탈-근대성의 프리즘에 넣을 수도 있지 않는가? 또 정치적인 프리즘에 넣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화보다는 글로벌화 또는 전지구화라는 번역이 더 나아 보이지만 어쨌든 신자유주의가 모던이나 식민주의와 무관한가? 그것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나아가서 예술적인 것과 생명 권력과 무관한가?

쓸데 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아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진보적이며서 새롭기만 한 것은 문제가 있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내가 진보적인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 것은 이런 근거 때문이다.

balmas 2010-01-19 01:43   좋아요 0 | URL
오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네요.^^ 맞습니다. 프리즘의 갈래 분류는 얼마간 자의적입니다. 하지만 그 분류를 확정된 경계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얼마간 실용적이고 편의적인 분류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두셀의 저작은 철학적인 것에 들어갈 수도 있고, 탈-근대성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저작들도 마찬가지죠. 우물안개구리 님처럼 이 저작들을 상호 연관성의 시각에서 봐주신다면 편집자로서 더할나위없이 기쁘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지식생산자들은 독자들(소비자들)을 지배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발마스 님은 권력자인 것이다. 소비자들은 그런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다. 이것은 발마스 님의 인격과는 무관한 조건이다. 그렇다고 지식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은 필요하다.

나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대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이미 인식론적 폭력을 수반한다.

대화가 아니라 대결을 해야 한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대결은 가능하다. 역사 속의 수많은 농민봉기를 상기해 보시기 바란다. 독자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인 언어적 구성물과 대결하면서 저자조차 모르는 그 언어적 구성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 "의미의 의미"를 통해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 2010-01-27 23: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독자들은 소비자고 발마스=권력자라니 그건 정말 어이가 없군요; 그건 대체 얼마나 "자본주의"적인 정식화입니까? 대화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데, 푸코에 대해서 생각해보신다면 오히려 대화가 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보실 문제 아닐지.

푸코광신도 2010-02-12 19: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님 제가 보기에 우물 안 개구리는 푸코광신도가 아니라 알튀세르나 스피박의 광신도입니다.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대화가 아니라 서로 절대적인 타자로 만나는 것, 서로 대등한 관계로 대면하는 것을 대화로 생각하는 거지요. 스피박이 들뢰즈나 푸코를 어떻게 비판했는지 상기해 보세요. 지식생산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타자화시키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나요? 대상화되는 자들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고 그들을 마치 주체인 것처럼 묘사하는 지식생산자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다는 거죠. 거기서 무슨 대화가 가능할까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거기서 발생하는 거죠. 아무튼 제가 이해하는 우물 안 개구리 님의 얘기는 그렇습니다. 이름부터가 우물 안 개구리 아닙니까?

우물 안 개구리 2010-01-1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강조한다. 역사 속에서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란 것이 있을까?

그 필연적인 전개과정은 항상 결과가 주어진 시점에서 인식이 시작된다. 우연적일 수도 있는 것을 필연으로 배치하고 인식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한마디가 발마스 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프리즘총서가 나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프리즘총서가 나오는 것이 필연적인 전개과정일까? 아닐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해야 할 것인가? 전개과정은 우연이고 인식방법이 필연적인 것은 혹시 아닌가?

<말과 사물>도 재출간됐으면 좋겠다. 7개의 프리즘 중에 어디에 속할지 알 수 없지만 그 책의 앞부분의 동물을 분류하는 방식이 프리즘 총서의 분류 방법과 묘한 조화 또는 부조화를 이룰 것이다.

소프트커버주의자 2010-01-18 18: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럼 뭐 해! 뻘짓인 걸!

발마스 님 로그인 걸어 버리세요.

miro 2012-01-1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ㅍ*

balmas 2012-01-14 00: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미로님.^^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