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만간 도서출판 이매진에서 나올 루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해설"로

쓴 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지난 1993년에 국내에서 이미 번역, 출간된 바 있는데, 이번에 새로 출간될

책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외에도 지난 번 국역본에서는 빠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함께 묶은 책입니다.

분량으로 따지면 한 200쪽 가량이 추가된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열과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퍼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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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의 자서전인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에 부쳐



그런데, 자네는, 자네는 존재하고 있는가?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인텔리 ...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 윤소영 엮음, {루이 알튀세르} 민맥, 1991.



I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는가?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을 수 있는가?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읽(을 수 있)었던 게 될 것인가?

알튀세르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장한 삶의 기록으로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른바 그의 “자서전”의 재출간을 “해설”하는 글을 이런 엉뚱한 문장들로 시작하게 된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미 지난 1993년 국내에서 번역ㆍ출간된 바 있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 알튀세르 개인의 사생활 및 당대 프랑스 지성사의 내밀한(사실은 얼마간 외설적인) 풍경을 엿보는 데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다면[이는 전혀 이런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다. 이 책 자체를 그러한 호기심의 충족 대상으로 환원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한, 그러한 호기심 자체는 결코 비난받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만한 이 책의 재출간을 맞아, 더욱이 그것에 대한 “해설”을 쓰면서, 한 번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 무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해설”을 펼쳐볼 독자들을 더 당혹스럽게 만들 것은 이 글의 제목이 아닐지 모르겠다. 보통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알튀세르의 “자서전”이라고 한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든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이든 간에, 그것이 일종의 자서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사실 알튀세르의 내밀한 속내 이야기를 읽어보겠다는 욕구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 책을 사거나 또는 빌려서 읽어보겠는가? 그러나,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렇게 물어보기로 하자. 이것이 정말 그의 “자서전”인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그의 자서전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또 만약 이것이 “자서전”이 아니라면, 이것을 무엇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자서전에 관한 탁월한 연구서에서 필립 르죈은 자서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 [󰡔자서전의 규약󰡕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17쪽.] 상당히 포괄적이고, 따라서 형식적인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마땅히 자서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실존했던 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아내인 엘렌느 리트망을 살해하게 된 사건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인성의 역사(또는 그것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들의 구조)를 이야기한 산문체의 회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러한 일치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선뜻 “자서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인 알튀세르 자신이 이 책은 자신의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가령 이 책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렇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28)[이하에서 이 책의 인용문은 본문에 쪽수만 숫자로 표시하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언은 수사법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곧 이 책이 사실상 자서전이기는 하지만, 통상적인 자서전들이 담고 있는 한 개인의 생애에 대한 자전적인 서술을 넘어서 이 책은 어떤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수사법적인 표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수사법적 표현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입장과 이 책이 지닌 “자서전”적 성격 사이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알튀세르가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의 제창자 중 한 사람으로서, 역사와 사회를 분석하는 데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접근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개인 또는 주체의 삶의 가장 내밀한 속사정을 드러내는 자서전의 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의 여러 저작들 중 오늘날까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얻고 있는 글은 바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며[{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75-130쪽;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Etat”, in Sur la reproduction, PUF, 1995.], 이 글 안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저 유명한 호명(interpellation)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테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들로 호명하며”, 더 나아가 “개인들은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었다”면, 정의상 모든 개인, 모든 주체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인 그가 어떻게―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를 경우―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자서전의 주체, 자서전의 저자가 될 수 있는가? 이 책을 과연 “자서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또 만약 그렇게 볼 수 없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모순을 해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독자들 및 주석가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이 책은 사후에, 그것도 타자에 의해 편집된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서명 하에 출간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스스로 서명하지 않은, 적어도 스스로 그 출간을 위해 서명하지 않은 책을 하나의 책이라고, 더욱이 그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가정되는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 자신이 과연 생애의 마지막까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타자에 의해 자서전의 형식으로 편집된 글들을 그 저자 자신이 의도한 자서전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을 곧이곧대로 “자서전”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적어도 이런 의문들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은 한 편의 “자서전”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자서전” 형식으로 된 상이한 두 편의 글로 이루어진 편집물이다. 최근의 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 편의 글은 매우 상이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두 편의 글을 집필할 당시 알튀세르 자신의 (무의식적인) 심리상태의 차이들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록의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엘렌느의 살해 이전에 씌어지고 다른 하나는 살해 이후에, 그리고 극심한 광기의 고통과 법적인 면소 처분을 겪은 뒤에 씌어진 글이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Irène Fenoglio, Une auto-graphie du tragique: Les manuscrits de Les Faits, et de L'avenir dure longtemps de Louis Althusser, Academia-Bruylant, 2007. ]


II



이처럼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해석 방식은 정신분석학적인 방식일 텐데[특히 Gérard Pommier, Louis du Néant. La mélancolie d'Althusser, Aubier Montaigne, 1998; Eric Marty, Louis Althusser, un sujet sans procès: Anatomie d'un passé très récent, Gallimard, 1999; Lewis Kirshner, “The Man Who Didn't Exist: The Case of Louis Althusser”, American Imago vol. 60, no. 2; Catherine A. Poisson, “Louis Althusser's The Future Lasts Forever: The Failure of Auto-Redemption”, Sites: The Journal of 20th Century Contemporary French Studies vol. 2 no. 1 참조.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알튀세르 자신이, 엘렌느 리트망을 목졸라 살해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을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 곧 그의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및 여러 분석가들)의 설명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살고 존재했다고 느꼈으며,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인위적인 것에서 속임수까지는 금방이다) 유혹의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64)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사실상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은 인위적인 가짜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고통이야말로 평생 알튀세르의 무의식의 구조를 지배한 “정서적 감정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인 감정의 상태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낳았으며, 또 결국 엘렌느의 살해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해명의 시도다.

알튀세르의 해명의 핵심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인위적 정체성이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 자신은 평생 존재하지 않은 인물로 살아왔다는 데에 있다. 본문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어머니의 연인이었다가 1차 대전 참전 중에 사망한 그의 삼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의 압력과 전시 상황의 불가피함 때문에 원래 약혼자의 형인 샤를르 알튀세르와 결혼을 하지만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순결함에 대한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정력적이고 세속적인 인물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결코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첫 아들인 알튀세르에게 상징적이게도 “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신의 방식대로 알튀세르의 삶을 통제하려고 했으며 그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했다(적어도 알튀세르의 감정 구조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그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모든 아이들과 같이 엄마를 사랑했고 또 엄마의 사랑을 필요로 했던 알튀세르는 자신의 엄마가 알튀세르 “자신의 인격적 부재를 통해 인격적으로 현존하는 한 인물을, 그가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알아야 했던 한 인물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척 일찍 깨달았으며”,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또 엄마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되기 위해서, 엄마가 다른 루이에게 바라고 기대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어머니를 유혹해야 했다.”(61)

그러나 이처럼 엄마가 바라는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삶은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곧 진정한 정체성 없이 이미 죽은 인물의 대체물로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했지만, 모든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 그렇다, 단순히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그것도 내 육체 속에서 ... 어머니가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경멸했던 그 육체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61)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의 이러한 강렬한 욕망은 바로 어머니 자신에 의해 거세당하게 된다(물론 이것 역시 알튀세르 자신의 무의식적인 환상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거세의 사건”은 알튀세르가 13세쯤 되었을 무렵 일어났는데, 그것은 이부자리에서 알튀세르의 몽정의 자취를 확인한 그의 어머니가 “얘야, 이제 너는 남자가 된 거야!”라고 선언함으로써 일어나게 된다. 소년 알튀세르에게 이는 지극히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그는 이러한 어머니의 선언을 “내 넓적다리 사이로 헤집고 들어와 내 성기를 잡고 흔들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정확하게 그것은 강간이고 거세”(55-56)였던 것으로 경험한다. 그 후 포로생활을 마치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 알튀세르는 자신이 성병에 걸렸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심한 고통을 겪는데(163), 이러한 환상은 소년 시절에 일어난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과 그것의 재발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의 무의식)에게 이는 어머니에 의한 강간 및 거세로, “누군가가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부분을 침해했고 나는 손상을 입”(165)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결국 그 자신이 누구를 사랑할 만한,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능력을 영원히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고 또 누구의 사랑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는 남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두려움, 곧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부족함 없이 갖기를 열망하는 욕망, 곧 전능에 대한 열망이라는 양면 감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양면을 가진 동일한 환각이 우울증의 비현실적 전능과 편집증의 과대망상증적인 전능 속에서 교대로 나를 사로잡는 것이었다.”(172) 그리고 이러한 우울증의 반복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런 존재도 갖고 있지 않고 참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가짜 존재라는 강박관념은 더욱 강화되어 평생 동안 알튀세르를 괴롭혔으며, 이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 속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욕망의 끝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자기 부정의 욕망, 자기 파괴의 욕망 때문에 끝내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여인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22장에 나오는 알튀세르의 말은 이러한 논리적 귀결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명료하게 보여준다. “사실 나는 모든 것을, 내 책들과 내가 결국 죽인 엘렌느, 나의 정신분석가 등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내가 내 자살 계획 속에서 환각적으로 꿈꾸었듯이 나 자신을 확실히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토록 끈덕진 자아 파괴의 욕망은 무엇 때문인가? 내 존재 깊숙이, 무의식적으로 ... 내가 나를 파괴하고자,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파괴하고자 원했기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가까운 모든 사람들, 내 모든 지주들과 내 모든 수단들을 다 파괴한 다음, 자신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343)

이러한 설명은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주며, 결국 알튀세르의 비극을 어머니와의 (환상적인) 관계, 좀더 나아가 가족관계라는 궁극적인 원인을 통해 결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93년 번역본에는 실려 있지 않던 새롭게 추가된 자료들(무엇보다도 “자서전적 자료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이러한 설명을 제시하고 또 납득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64년에 엘렌느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나 같은 해에 꾸었던 꿈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해석은 이 점을 특히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III



그러나 이러한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은 몇 가지 근본적인 점들을 해명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 우선 1985년 글은 22장으로 끝나지 않고 23장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22장에서 알튀세르는 엘렌느의 살해를 “전혀 다른 하나의 ‘변증법’, ‘애도’의 변증법”(340)의 결말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그가 평생 동안 느꼈던 “존재할 수 없다는 나의 무력함”(340)은 “나 자신의 근본적인 구원 불가능성, 즉 나 자신의 죽음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보이고자 했으며, 그렇게 해서 자살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 나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알튀세르 자신의 자살이 아니라 “타인들의 파괴”(342), 특히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의 부인 엘렌느의 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해석, 그것도 엘렌느가 죽은 다음에 그러한 살해의 원인을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하나의 해석이다(그러나 알튀세르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스피노자 역시 {신학정치론}에서 신과 모세/히브리 인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에 대해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opinione magis quam re”이라고 쓴 것처럼.]. 더욱이 알튀세르는 자신이 이러한 해석을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지 않는 것,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당신의 욕망이에요”라는 그의 여자친구의 말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마침내 알튀세르로 하여금, 그가 처음부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겪고 있었던 애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를 끝내고 “내 자신의 존재를 (다시)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345)갈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22장을 마무리하는 알튀세르의 감동적인 말은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정말 평생 그를 괴롭혔던 광기의 비극에서 마침내 벗어나 “아름다운 ... 인생”, 새로운 “청춘”을 되찾고, 그 자신의 존재를 “(다시) 쟁취”했던 것일까? 그렇게 미래는, 아름답게 오래 지속될 것인가? 그는 정말 “환상을 가로지른”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의 자서전은 결국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되지 못했을까? 왜 그는 그 이후로 더 많은 이론적인 작업을 전개하지 못한 채(주지하다시피 그가 80년대 이후에 남긴 유고들은 82-86년에 씌어졌다)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든 채 숨을 거두었을까?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이는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말이 아닌가?

이는 결국, 그가 22장의 말미에서 표현하고 있는 재생의 기쁨, 새로운 청춘을 누리는 것에 대한 감동은 무의식적 환상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낳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애도의 변증법”은 오히려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의 저자가 1962년에 썼던 의미에서 “의식의 변증법”과 같은 것이 아닌지,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띤 “자기의식의 변증법”이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멜로드라마적인 의식은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들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신화 속에 틀어박힌다는 조건 하에서만 변증법적일 수 있다.” [L. Althusser, Pour Marx, François Maspero, 1965, p. 140. ]

그런데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22장이 알튀세르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22장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말로 끝나고 있고, 이 말은 그대로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 책,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 1985년에 쓰인 “자서전”의 궁극적인 결론은 22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 다음에는 또 다른 장, 진짜 마지막 장이 지속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놀랍게도 앞장에서 제시된 알튀세르의 “애도의 변증법”의 결론에 대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곧 타자인 의사 친구의 입을 빌려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에 대한, 또는 적어도 무의식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삶의 사건들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관점, “인생에 대한 사실적 사후 해석과 정신생활에 대한 사후 해석”(352)을 혼동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제시되고 있다. 다소 길지만 핵심 논지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조차도 그렇다는 것을 아네. 즉, 엘렌느는 그의 병이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병을 죽인 것이다, ... 그는 그 자신의 자기 파괴라는 환각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자기 파괴는 ‘논리적으로’ 그의 작품, 그의 명성, 그의 정신분석가, 그리고 결국에는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엘렌느의 파괴로 변해 갔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라고. 그런데 이런 식의 논리 전개 ...에서 무척 곤란한 것은 그 “때문에”라는 것인데, 그것은 객관적인 우발적 요소들이 한곳에 모이게 된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결정적인 필연성만 제시하게 되지.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다 무의식적인 공격적 환각들을, 게다가 살인과 살해에 대한 환각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지. ...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과 같은 환각을 품고서도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일 전혀 없이 완벽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거지. 그가 더는 그녀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지만 그가 그녀를 없애버리길 바랐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하는 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네.”(351. 강조는 인용자)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의 해석, 어떤 사람의 일생 전체는 그의 정신생활의 경험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고 믿는 해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이는 정신적인 활동 자체에는 근원적인 양가성이 존재한다는 점, 곧 일의적인 환각이란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 환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인하려고 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은 동시에 그와 정반대로 삶에 대한, 타인에 대한 깊은 사랑 및 구원의 욕망과 중첩된다. 둘째, 이처럼 양면적인 감정들의 대립 속에서 알튀세르가 결국 엘렌느를 살해했다면, 이는 정신 구조 자체의 논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 ‘기회’가 그로 하여금 그 욕망을 ‘만들도록’ 해주는 그런 기회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곧 이러한 환각의 양면성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는 “몇몇은 완전히 우연적이며 몇몇은 우발적이지 않은 사태들이 터무니없이 부딪힌” 결과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들의 결합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 단지 하나만 달라졌더라도 무척 쉽게 힘들이지 않고 피할 수도 있었을 그런 일”(347)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장의 결론, 의사 친구의 입을 빌려 제시되고 있는 이 결론(“다음이 그가 한 그대로의 답이다”)은 22장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 자신의 손으로 제시된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과 어긋나는,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는(칸트적 의미의 비판 개념을 포함하여)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튀세르가 22장에 이르기까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결국 자신의 가족관계에서 생겨난 무의식적인 욕망이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 전체를 좌우했으며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이야기, “단순한 인생에 대한 사실적 사후해석”(352)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알튀세르는 왜 22장에서 글을 맺지 않고 23장을 더 썼을까? 왜 자신의 자서전을 타자의 말로 끝맺고 있을까? 그런데 이것이 정말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일까? 또는 적어도 23장의 내용 전체는 과연 이 친구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일까? 왜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싶어 했던 그가 “자서전”의 마지막 장, 따라서 결론 부분을 하필이면 타자의 말로 채우고 있을까? 그런데 23장 전체가 타자의 말이라고 믿기에는, 그것은 알튀세르 자신의 사상, 특히 그가 같은 시기에 가다듬고 있던 우발성의 유물론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정신분석가 친구의 말이 과연 익명의 친구의 말인지 아니면 알튀세르 자신의 말인지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타자 친구의 말로 “자서전”이 종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적어도 한두 가지 해명이나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IV


우리의 삶이 단지 생물학적인 조건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각종의 상상과 환상, 망상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상과 환상의 구조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가들이 20세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그처럼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은 때로는 설명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상을 추가하는, 피분석자의 고통을 덜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거나 적어도 봉합하고 은폐하는 도착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때로는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장치(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노릇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2장에서 정점에 이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바로 이런 결과를 낳는 것 같다. 면소 판결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하여,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 없이 존재해온, 아니 부재해온 어떤 개인이 마침내 평생 동안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놓은 정체성의 부재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기 자신으로, 하나의 주체로 태어나게 되는 이 이야기는 결국 호명의 성공에 관한, 정상적인 주체로의 호명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이 글이 22장에서 완결되었다면, 이 글은 마땅히 한 권의 “자서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광기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던 철학자가, 그러한 광기에서 벗어나, 더욱이 평생 그를 괴롭혔던 무의식적 환상과 감정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됐고 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또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거기에서 끝을 맺지 않았으며, 내가 보기에 이 글 내지 이 책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개인의 삶의 실천적 기록으로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에서 진정으로 감동적인 것은, 그가 그처럼 고통스러운 광기 속에서도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한 사람의 선생으로서 자신의 이론적 활동과 교육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치적인 발언과 개입을 통해 세상의 갈등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변혁하려고 전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그의 활동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그런데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남긴 이론적 작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론적ㆍ실천적인) 효과들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수행했던 “이론 안에서의 계급투쟁”(주지하다시피 이것은 그가 철학에 대해 제시한 두 번째 정의다)은 적어도 현실적인 효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파괴하고 결국 자신의 정신적ㆍ육체적 삶을 문자 그대로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 상태에서도 그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으며, 손쉬운 동일화identification의 유혹에서 벗어나 결국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함의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3년 이래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출판된 이후 새삼 깨닫게 된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저작 전체는 일종의 자서전으로, 하지만 우리가 자서전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또는 오히려 그러한 자서전을 해체하는 의미에서의 또 다른 자서전으로, 자서전의 또 다른 실천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유명한 「서문. 오늘」의 앞부분이 그렇고, 섬뜩하면서도 감동적인 「프로이트와 라캉」의 한 구절도 그렇거니와 [“이 조그마한 생물체가 살아 남았다는 것, 늑대나 곰의 새끼가 된 늑대소년으로 살아남지 않고 ... 인간의 자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 ... 그것이 성인이 된 모든 인간이 극복한 시련이다. 그들은 영원히 건망증에 걸린 이러한 승리의 증인들이면서 때로는 그들 자신의 가장 은밀한 곳에, 다시 말해 가장 명백한 곳에 상처를 지닌 채, 인간의 생사를 위한 이 투쟁으로 지치고 불구가 된 희생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무사하게 그곳을 빠져나온다. 또는 적어도 소리높여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애를 쓴다. 많은 옛 전사들은 일생을 통해 그것의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지난 후에 그들의 전투로 인해 생겨난 오랜 상처가 갑자기 정신병의 발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의 최후의 강박인 광기 속에서 다시 벌어지게 되어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더욱 많은 수의 다른 사람들은 가장 ‘정상적으로’ ‘신체의’ 쇠약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인류는 전쟁의 비망록 속에 공식적인 죽음들만을 기록해둔다. 그들은 인간적인 이리들과 인간적인 신들로 갈라져서 서로를 희생시키는 인간의 전쟁에서 적시에, 다시 말해 늦게서야 인간으로서 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정신분석은 그 유일한 생존자들에게서 다른 투쟁, 인류가 결코 누설하지 않았던 척하는, 기록도 비망록도 없는 유일한 전쟁을 연구한다.” “Freud et Lacan”,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Stock/IMEC, 1993, pp. 33-34; 「프로이트와 라깡」, {아미엥에서의 주장}, 30-31쪽. 번역은 수정했다.]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정신분석학에 관한 강의록에서도 이러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L.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Le Livre de Poche, 1996, pp. 20-21] 특히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던 {재생산에 대하여}의 한 단락은 “루이”라는 이름을 거명하면서 한 개인이 자신의 생애에 걸쳐 주체로 호명되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다. 좀 길지만 관련 구절 전체를 인용해보자.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루이라는 어린애를 주체로 호명하면서 직접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루이는 이미-주체인데, 아직은 종교적 주체가 아니라 가족적 주체다. 법률적 이데올로기가 어린 루이에게 더 이상 아빠 엄마에 대해서도, 하느님과 아기 예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그를 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가족적ㆍ종교적ㆍ학교적 주체 등이다. 나는 도덕적ㆍ미학적 따위의 단계들은 건너뛰겠다. 마지막으로 훗날에, 인민전선ㆍ스페인 전쟁ㆍ히틀러, 1940년의 패배 혹은 포로 상태나 공산주의자와의 만남 등과 같은 자전적-타전적auto-hétérobiographique 상황들로 인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비교적인 형태들로) 성인이 된 루이를 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할 때, 상당히 오래전에 그는 이미, 항상-이미 가족적ㆍ종교적ㆍ학교적ㆍ법률적 주체였는데, 이제 그는 정치적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되돌아오자, 전통적이고 가톨릭적인 전투적 태도에서 진보적인 가톨릭적인 전투적 태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는 반이단자이다가 마르크스를 읽고, 이어서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의 순서를 밟는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간다. 이데올로기들은 항상-이미-주체인 자들을 ‘징집하기 위해’ 주체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그것들의 작용은 동일한 주체한테, 항상-이미 (여러 번에 걸쳐) 주체인 동일한 개인한테 겹쳐지고 교차하며 모순을 드러낸다. 벗어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 ... [Sur la reproduction, PUF, 1995, p. 229;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296쪽.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며,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은 이 책의 일부 내용들이 발췌되어 편집ㆍ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이 책은 원래 알튀세르의 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또한 이데올로기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생전에 발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에는 이 구절 전체가 빠져 있으며,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루이”라는 이름 대신 “피에르”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또 출생연도도 {재생산에 대하여}에서는 “1928년”으로 되어 있는데, 발표된 논문에서는 “1920년”으로 바뀐다. 왜 이러한 누락이나 대체가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단락(및 다른 책의 구절들)은 알튀세르가 특히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작업(정신분석학과의 관계를 포함하여)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함께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역으로 이 단락 및 이와 유사한 다른 구절들은 우리가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읽을 때 늘 그의 이론적 작업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개인, 다른 모든 주체들처럼 알튀세르 역시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데올로기적 장치(가족)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았으며, 호명되었다. 알튀세르 가문의 장남으로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는 우수한 학생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열성적인 청년 신도로서, 또 위험에 처한 조국을 구해야 하는 군인으로서, 또 나중에는 인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공산당원으로서,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우울증 때문에 늘 의사들 및 의료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정신병 환자로서, 그리고 엘렌 리트망의 남편으로서 ... 알튀세르는 일생을 주체로서, 아니 주체들로서 호명되었으며, 그 주체들로서의 삶을 살았다. 따라서 자서전이란―알튀세르의 이론적 입장에서 본다면―주체들로의 호명의 역사에 관한 기록과 다르지 않으며, 모든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항상 이미 주체들로 호명되어 있는 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각자 자기 나름의 자서전을 기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호명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부여한 의미에서 호명이란 어떤 개인에게 정체성(또는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또는 그 개인을 어떤 상징적인 연관망 속에 기입하는 것(알튀세르 가문의 장남, 고등사범학교의 교수, 공산당의 당원, 프랑스의 국민 등)인데, 개인 또는 주체란 이러한 정체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이해된 개인이 아닌 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주체로서의 아무개는 늘 이러한 정체성(들)을 통해 실존하고 사고하고 행위한다. 따라서 호명에 의한 정체성 부여는 개인이나 주체가 독자적으로 생존하고 살아가기 위한 상징적인 지주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한 개인이나 주체에게 호명에 의한 정체성의 부여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가 호명에서 배제될 경우, 그 개인이나 주체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에 관한 한 사례로 가령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이라는 영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상의 나라인) 코르코지아 출신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동안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고국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졸지에 국적을 잃은, 다시 말해 더 이상 코르코지아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국으로 입국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공항 터미널에서 살아가게 된다.[이 영화는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16년째 살아가고 있는 이란 출신의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영화 자체는 휴먼 코미디물로서 결국 헤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외국 여행 도중에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경우(또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분실하는 경우. 가령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모두 잃어버린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큰 불편함을 겪고 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좀더 심각한 사례들로는 미등록 이주자들(“불법 체류자들”)이나 탈북자들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만 해두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 “자서전”에서는 알튀세르 자신이 바로 이처럼 호명에서 배제된 인물로 등장한다. 곧 알튀세르는 엘렌느를 살해한 이후 정신감정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정신착란 상태에서 살인을 한 것이 인정돼 법적인 책임을 면하게 된다. 하지만 법적인 책임의 면제, “면소(免訴)” 판결은 동시에 알튀세르로부터 법적인 주체의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살인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났지만, 동시에 법적 주체로서의 정체성 역시 상실하게 되었다.[“면소”는 불어로 “non-lieu”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주체로서의 “자리가 없음”을 시사해준다.] 그가 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처럼 자신에게 내려진 면소 판결,[도미니크 르쿠르에게 쓴(하지만 끝내 부치지 않은) 편지가 알려주듯이 이는 1985년 3월 14일자 󰡔르몽드󰡕에 실린 클로드 사로트의 주장, 곧 “‘유명세를 타는’ 경우 사람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죄인에게만 관심을 갖는다”(512)는 주장이 직접적인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알튀세르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건의 진상 및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했으며, 이것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집필로 이어졌다.] 곧 주체로서의 정체성 박탈에 맞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해명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리,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 “자서전” 전체는 호명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호명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곧 호명은 우리가 주체로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상징적 지주로서만 기능하는 것인가? 이 문제가 제기하는 매우 복잡한 쟁점들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그냥 (알튀세르가 얼마간 변용해서 사용하던 스피노자 식의 의미에서) “전제 없는 결론”에 만족하기로 하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관념이나 표상 또는 지배계급에 의한 기만이나 조작이 아니라, 심지어 포이어바흐-청년 마르크스 식의 의미에서 소외된 관념들도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로 개념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지배와 예속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장소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없이는 사람들은 사고하거나 활동할 수도 없고, 투쟁할 수도 없다. “요컨대 (정치적 행동과 비행동 속에서) 역사를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체험된” 관계는 이데올로기를 경유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인간들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는 것은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서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라고 말했다.” [Pour Marx, p. 240; {마르크스를 위하여}, 280쪽. 번역은 수정.]

알튀세르가 이런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개념화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특히 그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 독창적인 상상계l'imaginaire 개념을 자신의 이데올로기론 속에 포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사용하는 상상계 개념을 라캉 식의 상상계 개념 또는 더 심각한 것이지만 지젝 식의 상상계 개념(그런 게 존재한다면)과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및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론의 문제」, 서양근대철학회 1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미공간)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읽는다면, 호명은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의 장치이기에 앞서 개체화 내지 주체화의 메커니즘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호명이 항상 이미 권력 관계 및 지배 관계와 연루되어 있는 한에서, 개체화 내지 주체화 과정으로서 호명은 동시에 지배를 위한 호명의 전유 과정, 곧 예속적인 주체들의 생산이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호명 그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호명 자체가 계급투쟁 또는 적어도 사회적 적대와 투쟁의 쟁점이 된다는 점이다. 호명이냐 반호명이냐, 또는 호명에 사로잡힐 것이냐 아니면 호명에서 벗어날 것이냐는 식의 문제제기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극히 관념론적인 관점 또는 알튀세르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호명(교육 장치, 법적 장치, 의료 장치 등)이 문제인지, 어떤 호명에서 일어나는 어떤 갈등, 어떤 투쟁이 문제인지, 또 호명을 어떻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조하는 것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각각의 호명 영역에서 진행되는 예속화의 메커니즘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다.[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또는 오히려 국민국가 등에 고유한 호명양식을 그 자체로 개념화하고 분석해볼 수 있다.] 
 

V

알튀세르의 이 “자서전”에서 놀라운 점은, 그가 여기 이 “자서전” 안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호명에 대한 투쟁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의 호명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호명의 메커니즘을 둘러싼 지배와 권력의 쟁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본문의 중요한 한 단락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알튀세르는 푸코의 예를 거론하면서 익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푸코가 ‘저자’라는 아주 근대적인 개념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나서, 마치 내가 어두운 감방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그가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한 투쟁 활동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푸코의 깊은 겸허함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에티엔느 발리바르가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내가 내 이름에 대한 모든 선전에 대항해 끊임없이 펼치는 맹렬한 반대임을 알고 있다. [...] 지극히 개인적인 이 책을 독자들 손에 맡기는 지금 역시,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지만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즉, 이제는 면소판결의 묘석 아래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사실을 출판함으로써다. 이렇게 해서 모든 신문기자들과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모든 정보를 다 얻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만족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에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또 그들이 내가 쓴 것에 뭔가 덧붙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 그것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본문, 2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단락은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보통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익명성자서전의 저자라는 관념을 긴밀하게 결부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저자라는 개념을 비판한 뒤, 그러한 비판에 걸맞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한 투쟁 속에 뛰어들었다. 이는 익명성을 스스로 실천한 경우, 이른바 지행합일이 모범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튀세르 자신은 푸코와 달리 거꾸로 자기 자신을 자서전의 저자로 만듦으로써, 따라서 역설적인 방식을 통해, 익명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책을 독자들 손에 맡기는 지금 역시,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지만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어떤 의미에서 자서전의 저자가 되는 것이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내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광인으로 보아달라는, 광인으로서의 자기의 발언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알튀세르의 간절하고 진심어린 호소다. 광인으로서의 자신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나는 광인이 아니다라고 하기보다는, 나는 광인이 아닌 정상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바로 광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기. 그리하여 광인에게 그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 그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해명하고 서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적어도 그러한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자서전”을 가감 없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 이 때의 알튀세르 자신은 정상적인 주체, 게다가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의 알튀세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사람, 평생을 광기의 돌발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갔던 광인으로서의 알튀세르다. 우리가 그를 광인이 아닌 철학자로, 정신착란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위험한 인물이 아닌 사려 깊고 존경할 만한 저명한 교수로서 옹호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나아가 어떻게든 그의 “사적인 삶”에 대한 부분은 무시한 가운데 공적인 삶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할수록, 심지어 이 “자서전”의 의의 및 그 존재 자체를 알튀세르의 이론 “저작”과 구별하고 전자에서 제시된 알튀세르의 발언에 맞서 후자를 옹호하려고 하면 할수록,[이는 특히 가브리엘 알비악의 관점이다. Gabriel Albiac, “Althusser lecteur d'Althusser: L'autobiographie comme genre imaginaire”, in collectif, Lire Althusser aujourd'hui, L'Harmattan, 1997. 알비악의 관점과 반대로 얀 물리에 부탕은 이 “자서전”을 통해 알튀세르는 “주체”로서, “저자”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를 통해 1980년 11월에 일어난 광기에 대한 패배를 딛고, 마침내 취약한 승리이기는 하지만 광기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는 알비악 못지않게 부탕의 관점도 부당 전제에 의거해 있다. J.-M. Boutang, “L'interdit biographique et l'autorisation de l'oeuvre”, in collectif, Lire Althusser aujourd'hui, 위의 책 참조.] 이데올로기의 간지에, 이데올로기의 덫에 더욱 깊이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겠는가? 이 몇 개의 문장을 쓰고 읽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범주들을 가정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정상 대 비정상, 이성 대 광기, 범인 대 철학자, 저명인사 대 비루한 인물, 사적인 것 대 공적인 것, “자서전” 대 “이론 저작” ...

(물론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이후 그에게 집중되었던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감안한다면, 광기에 빠져 부인을 살해한 “정신병 환자” 알튀세르와 구별되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저열한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나 얀 물리에 부탕이 모두 인정하듯이 자서전의 출간은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을 영원히 망각 속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자서전의 출간 이후에 계속 유고들이 출간되었고[L. Althusser, Journal de captivité, ed.,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2; Ecrits sur la psychanalyse, ed.,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3[부분 국역,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5]; Sur la philosophie, Gallimard, 1994[{철학에 대하여}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7];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Stock/IMEC, 1994[부분 국역,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새길, 1995];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Stock/IMEC, 1995; Sur la reproduction, PUF, 1995[{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LGF, 1996; Lettres à Franca, Stock/IMEC, 1998;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Cours à l'Ecole normale supérieure de 1955 à 1972, Seuil, 2006.] 더 나아가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그의 주요 저작들이 속속 재출간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프랑스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작들이 복간되었다.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Lire le Capital, PUF, 1996;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8. 또한 최근에는 {라 팡세La Pensée}에 실렸던 알튀세르의 글들이 한데 묶여 재출간되기도 했다. Penser Louis Althusser, Le Temps des Cerises, 2006.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및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 같은 잘 알려진 논문들 이외에 그동안 책으로 묶이지 않았던 다른 글들도 함께 수록되었다.] 최근에는 특히 그의 유고들이 체계적으로 영어로 출간됨으로써, 영미권에서도 알튀세르의 작업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 따라서 자서전적인 저술들과 이론적인 저술들을 구별하려는, 적어도 양자를 대립시키려는 관점은 더 이상 상황적인 이유로 정당화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알튀세르가 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고 그것을 출판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익명성 속으로 들어가겠노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광인으로 드러냄으로써, 저명한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라는 개인 주체가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정신의학적 치료로 인해 신음하고 있고 또 일체의 발언권을 박탈당한 가운데, 살아 있지만 부재하는 존재들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광인들, 정신이상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또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발언함으로써 알튀세르는 가장 내밀한 자신의 속내 이야기의 “저자”가 됨과 동시에 광인 아무나 중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한다는 사실은 정신의학적인 이데올로기 장치 및 그것과 결부된 법적 이데올로기 장치의 억압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또 수행적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2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끝내지 않고 타자의 입을 빌려 23장에서 이 “자서전”의 주체의 관점에 담겨 있는 환상을 드러냄으로써, 정신분석학적인 호명의 양식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한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알튀세르는 광인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사고에 대해 성찰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광인 저자, 광인 주체가 됨으로써 입증하고 있지만, 이는 광인이 온전한 주체, 정상적인 주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말하자면 광인에 고유한 호명 양식, 곧 억압적인 예속화 양식이 아닌 또 다른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음을 수행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을 집필함으로써 그 자신이 새로운 주체, 정상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익명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애도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주체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23장에서 그가 타자인 의사 친구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입각한 비판이 바로 이를 드러내준다. 만약 그가 이를 믿었다면 이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집필하고 나서 얼마 뒤에 다시 착란에 빠져 병원에 입원하기 때문이다.


VI


따라서 아마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의 “자서전”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960-70년대의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한 철학자였다가 1980년 충격적이게도 아내를 교살함으로써 공적인 무대에서 비참하게 퇴장당한 한 사상가의 비극적인 개인적 삶의 내력 및 그가 활동했던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면모를 좀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또 알튀세르는 그가 서두에서 밝히듯이 “한 편의 자서전”을 씀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면소” 판결에 맞서 법적인 주체로서의 권리, 자기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법적인 판결을 받을 권리를 옹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어떻게 “자서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읽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 책이 결국 “자서전”이라면, 이 책은 다른 자서전들과 달리 자서전이라는 범주 자체를 재고찰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모든 진정한 자서전은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이 책이 증언하는 것은 결국 자서전이란 자아나 주체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의 불가능성, 그러한 서사적 목적론(이는 결국 예속적 주체화의 서사이기도 하다)에서 벗어나야 할 필연성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그렇게 해석한다.

요컨대 우리가 오늘날 (및 장래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는 방식, 알튀세르의 유령의 명령들에 가장 충실한 한 가지 독서방식은 이 책을 좁은 의미의 “자아” 알튀세르 내지 “주체” 알튀세르, 곧 다른 모든 이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한 개인 주체로서의 알튀세르가 자기 자신에 관해, 자신의 생애에 관해, 곧 개념들과 이론들, 투쟁과 정치, 착란과 망상, 사랑과 증오, 우정과 결별 등으로 점철된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해 기록한 “자서전”으로 읽지 않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런 “자서전”으로서만 읽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 각자의 “자기”의 자서전으로서, 우리들 “자기”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겪어왔고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겪게 될 탄생과 성장, 죽음의 기록, 주체들로의 호명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특이한 한 개인의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기”, 말하자면 관개체(貫個體)적인transindividual 자기에 관한 기록이 바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며, 너무나도 특이한 그의 삶이 그 특이성idiosyncracy을 넘어, 특정한 한 개인의 삶의 제한된 시공간을 넘어, 이 책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 각자의 “자기”에게 무언가 공명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서전의 주체는 필연적으로 관개체적인 익명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방법만이, 불모의 대립을 넘어서 보편성과 개별성, 아니 공통의 익명성과 특이성이 서로 결합하고 분화되는 방식, 다시 말해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한 권의 “자서전”에게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발리바르는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에서 그를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인텔리 ...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관개체적인 주체에 관한 탁월한 한 가지 정의이자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한 한 철학자에 대한 깊은 찬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알튀세르 “자신”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해설”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자기에 대한 이러한 재인지reconnaissance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본질적인 동일성(이것은 심리적인 한에서 심리적 동일시 과정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같은 저녁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 관객들과 배우들을 결합하는 본질적 동일성을 가정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선 연극이라는 이러한 제도에 의해 결합되어 있지만, 좀더 심층적으로는, 우리의 고백 없이 우리를 통치하는 같은 신화들, 같은 주제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체험되는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 비록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라도, {우리의 밀라노}에서 우리는 같은 빵을 먹고, 같은 분노, 같은 거역감, 같은 망상(적어도 그 속에서 이 절박한 가능성이 부단히 배회하고 있는 기억 속에서)을 느낀다. 어떤 역사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선 시간 앞에서의 같은 절망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억척어멈처럼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바로 지척에서 같은 전쟁을 겪고 있다. 비록 우리 내부에 같은 끔찍한 맹목성과 우리 눈 속에 같은 재와 우리 입 속에 같은 흙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같은 새벽과 같은 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비의식성이라는 같은 파멸을 스치고 있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고 바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미 그 원리에 있어서부터 우리는 이미 연극 자체이기도 하다. [...] 나는 몸을 돌린다. 그리고 갑자기 저항할 수 없는 질문이 나를 침입한다. 나름의 방식대로 서투르고 맹목적인 이 몇 쪽의 글은, 나의 내부에서 자신의 미완성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이미 모든 배우들이 떠나가고 장식들이 제거된 이후에 나의 내부에서, 나에게 거역하여, 자신의 침묵의 담화의 도래를 모색하고 있는, 6월 어느 저녁의 생소한 그 연극 {우리의 밀라노}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Pour Marx, pp. 150-152; {맑스를 위하여}, 179-180쪽. 번역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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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8-03-2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일찍 알려주시지^^ 며칠전 인터넷헌책방에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를 주문했고, 오늘 발송했다고 연락왔는데.....아아...

balmas 2008-03-2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참 안타깝네요. ^^

에로이카 2008-03-26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자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경외감에 흠뻑 젖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주체'들'로의 호명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자서전... 그러나 저자가 되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자신을 법적 주체로 호명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저항... 억압적 예속화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한 본보기로서의 광인의 자서전 (맞나요?)... 사실 많이 배웠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흥미롭습니다.

제 생각에 발마스님은 이런 논문도 좋지만,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류의 추리소설을 쓰셔도 크게 성공하셨을 것 같습니다. ^^

balmas 2008-03-26 23:5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소설 씁니다. ^^;

포월 2008-03-2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존경과 찬탄, 열정과 좌절을 주십니다. ^^

balmas 2008-03-26 23:58   좋아요 0 | URL
쑥스럽습니다. ^^;

릴케 현상 2008-03-2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사서 보겠습니다^^ 몸이 나으면=3=3=3

balmas 2008-03-28 23:1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러셈~
그나저나 어서 몸이 회복되셔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

menwchen 2008-03-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좋아라

balmas 2008-03-28 23:11   좋아요 0 | URL
멘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람혼 2008-03-30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 소식이 무엇보다도 반갑군요.^^

balmas 2008-03-31 01: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람혼님.^^ <미래는 ~> 재출간을 반기는 분들이 꽤 되는군요. ㅎㅎ

람혼 2008-03-31 02:06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 전에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지닌 성격에 관해 예전에 썼던 짧은 글을 올리면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오랜만에 다시 펴보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재출간 소식을 접하게 되니 일종의 '동시성'을 느끼게 되어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나저나 balmas님의 다음 번역본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힘 내세요!

2008-03-30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재뮤지션 2008-03-3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쌤! 역시 쌤 글은 간지가 줄줄. 그나저나 저 전역했습니다. 전역하고 찾아뵈야 되는데 이거 경영학 전공수업을 많이 넣다보니 시간이 너무...ㅠㅠ 용서하세요. 흑흑흑. 팀레폿에 과제에 아주 미칠 것 같은 나날들입니다. 흑흑흑.

balmas 2008-04-02 02:01   좋아요 0 | URL
재영이 오랜만이구나. 과제가 많으면 좋은 거지 뭐. ㅋㅋㅋ

릴케 현상 2008-03-3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번에도 친절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쯤이나 자립할 수 있으려나^^

balmas 2008-04-02 02:01   좋아요 0 | URL
ㅎㅎ 별 말씀을.

류우 2008-03-3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던중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그럼 언제쯤 출간될까요? 총알을 미리 장전하고 있어야 해서-ㅎㅎ

balmas 2008-04-02 02:02   좋아요 0 | URL
제가 듣기로는 4월 안에 출간된다고 하던데요. ^^

릴케 현상 2008-03-3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런데 마르쿠제의 입장이 [2]의 결과로 [1]이 되었다는 뜻인가요?
테러적 압력과 억압은 개인적인 자기억압을 강화시켜 마침내 모든 가능성을 가로막기에 이르러서[2] 로봇화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발적인 의식인양 생각하는 인간[1]이 되었다는 건가요?

balmas 2008-04-02 02:02   좋아요 0 | URL
예, 그렇게 볼 수 있겠죠.

paviana 2008-04-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를 잘 모르지만 알기 위해서 찬찬히 출력해서 읽어보겠어요,
이번 알라딘 개편중에서 가장 좋은 기능은거 같아요.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__)

balmas 2008-04-09 02:30   좋아요 0 | URL
예, 그렇게 하세염.^^ 열심히 읽어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ㅎㅎ

익명 2008-08-0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거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언제쯤 나오는지 혹시 알수 있을까요.
그냥 궁금해서요..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balmas 2008-08-0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실례라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언제쯤 나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5월이나 6월까지는 낸다고 했는데, 무슨 사정인지 늦어지고 있네요.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기다리신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