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의 주인공이 각자 사랑의 대상을 찾는 영화다. 뒤적여봤더니 2006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어제 아주 새로운 영화처럼 봤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6년, 내가 내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몸부림치던 때였다. 영화 속 세실리아가 현실 도피로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이, 나도 스크린을 바라보다 불이 켜진 후 극장 밖의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그 후 9년이 흘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현실 밖을 꿈꾸지 않아서 평온하다.

 

꿈이 없는 비극적 나날들이지만 꼭 꿈이 있어야하나? 꿈을 갖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환상 역시 사회적 쏠림은 아니었나? 모두가 꿈을 가질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꿈을 갖고 이루기위해 노력해야 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태도 역시 꿈을 이루는 일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데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세실리아한테 격하게 공감했었다. 세실리아가 현실 탈출을 꿈꾸고 그 탈출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도 기뻤고 다시 현실로 내팽겨쳐졌을 때, 그 황망함을 함께 느꼈다. 이제, 네 명의 인물들이 어긋난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대공황기, 웨이트리스로 재능없고 일해도 가난하고 남편은 술마시고 폭력을 휘두르고. 객관적 불행 요소는 다 갖춘 세실리아. 그녀의 불행한 삶의 구성요소들은 그녀한테 예민한 감수성을 선사하고 영화 속 단역을 맡은 배우를 만났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제 막 발돋움하기 시작한 야심찬 배우한테 사람들은 심지어 극중 인물까지도 그의 배역은 하찮다고 말한다. 세실리아만 그 배역은 중요하고 말한다. 현실에서 아무리 하찮은 존재의 삶도 지우고 다시 살 수 없고 중요하듯이, 하찮은 배역도 중요하다는 걸 세실리아는 알아봤다.

 

세실리아가 삶과 영화적 환상을 혼동하는데 이 혼동은 삶을 바탕으로 한다. 아직 별 명성이 없는 배우는 세실리아의 이런 통찰력있는 시각에 반할 수 밖에 없다. 세실리아가 사랑한다고 믿는 영화 속 인물 탐과의 관계를 보면 세실리아가 실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크린 속에 자유롭고 싶다면 어느날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세실리아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한다. 영화 속 지시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면서 영화 속 인물 탐은 왜 놀이공원에 있는가. 놀이공원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탈현실 공간이다. 탐이 놀이동산에 있는 건 당연한데 여기서 세실리아의 반응이다. 세실리아는 그건 영화에서나 그렇죠, 현실에서는 안 그래요, 라고 말한다. 세실리아는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인물이어서 처음부터 현실에서 도망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처럼.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현실이든 허구든)에서 탈출하는 걸 자유로 여기는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자신이 속한 세계로 되돌아는 자유를 택한다. 이 영화가 단순한 판타지물이 아닌 이유이다. 판타지라면 세실리아는 단역배우랑 헐리우드에 갔어야한다. 꿈을 꾸는 건 잠시 즐거울 수 있으니 꿀 것, 그러나 현실로 돌아올 것. 우디 앨런 옹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영화는 현실과 스크린을 재치있게 잘 섞어서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가 황당하다고 느낄 경우에 그럴듯함이 결여되는데 이 영화는 영화임을 알리고 시작해도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본성을 꿰뚫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해프닝과 유머. 다시 보니 참 정교하게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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