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 관광청 홍보 동영상처럼 파리의 대표 명소를 쭈욱 비춰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우디 앨런 감독처럼 도시를 사랑하는 감독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도시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런던, 바르셀로나, 파리, 로마(to Rome with love-기대 중이다!) 서울에도 좀 오셔서 서울을 무대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음 좋겠다. 그가 렌즈를 통해 보는 서울은 어떨지 궁금하다.

 

2.

그는 사랑, 특히 이성 간에 있을 수 사랑에 대한 전문 탐구가다. 수 없이 사랑 이야기를 해 왔지만 진부하지 않다. 그는 언제나 청년 같은 감수성을 지니셨다. 관계에 있어서 늘 초보자의 모습이고 심드렁하거나 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 관계에서 실패하는 걸 전전긍긍하면서도 전면적으로 실패를 내세우고 그 실패를 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단세포 생물의 무성 생식의 신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약혼을 한 커플이 파리로 간다. 객관적 섹시함과 교양을 두루 지닌 예비 신부 이네즈와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작가이지만 소설을 쓰는 게 꿈인 길. LA에서라면 두 사람은 계속 같은 공간과 시간대를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파리라는 낯선 공간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세계관을 지녔는지 증명해 주는 곳이 돼 버린다. 이네즈는 전형적 미국인으로 파리 관광에 열중하며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에 열광한다. 길은 불확실한 미래에 물건을 미리 사들이는 게 마뜩잖다. "움직이는 축제의 도시" 파리에서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재발견한다.

 

3.

길은 자정만 되면 시간을 가로지른다. 미국 예술가들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 1920년 대로 간다. 헤밍웨이, 게르투르드 스타인, 피츠제랄드, 피카소, 달리, 루이스 브뉴엘, 만 레이를 만난다. 영화 속에서 우디 앨런이 해석한 예술가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들이 모여 잡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낄낄낄, 웃음이. 길은 이들과 집필 중인 소설에 관해 흥겹게 이야기를 나눈다. 2010년 파리에서 어떤 가구를 미래의 말리부 집에 놓을 지 이야기 한다면 1920년 대 길은 소설과 예술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 진정한 황금 시대로 보인다!

 

2010년의 사랑이 결혼식을 어떻게 치룰 거며 파리 어디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지로 분주한데 1920년 대 여인 아드리아나는, 마티스, 피카소, 헤밍웨이의 연인답게, 길의 소설에 관심이 있다. 길은 신이났다. 밤마다 20년 대로 갈 시간만 기다린다.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로트렉, 고갱, 드가가 활동하던 시절을 황금 시대로 꿈꾸는데 정말 어느 날 밤, 벨 에포크로 간다. 벨 에포크 시대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한다. 우리는 과거를 미화하고 그리워한다. 추억 때문인데 추억이란 이미 일어난 일을 기호에 따라 재구성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인다. 현재는 이런 기호의 재구성이 일어나지 않은 채 무언가가 자꾸 결핍되었다고 무의식에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4.

해결책은 결핍을 채우는 길이다. 길이 20년 대에 머무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리부가 아니라 파리에 머무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에서 파리로 공간을 이동하는 건 시간을 가로지르는 만큼의 효과가 있다. 다가올 다른 미래에 대한 설레는 기다림 때문이다. 약혼자와 결혼하는 대신 약혼자를 대신할 여인을 찾는 게 가능 할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랑에 빠질" 준비도 돼 있기 때문이다.

 

5.

우디 앨런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영화 속 주인공과 사랑해 보고 과거 예술가들과 친분도 쌓아보지만 고개를 돌리면 현재는 피할 수 없는 것. 파리도 있다보면 곧 현실이 되어 황금 시대가 될 수 없다는 게 두려운가 보다. 도시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지만 곧 현재가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까봐 다음에는 로마로 간다니. 우디 앨런의 두려움은 곧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시길. 우리는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을 담은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황금 시대를 꿈  꿀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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