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영도 동문선 문예신서 342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의욕적으로 서가를 둘러보다 바르트를 꺼냈다. 대충 훑어보고, 바르트의 다른 책들과 가지런히 세워두었던 글쓰기의 영도. 

1. 번역에 관한 투덜거림 

바르트의 번역서 중 최악인 거 같다. 이 번역서를 읽고 바르트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불문 원서를 읽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돌이켜보건대, 바르트의 원서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않다! 고로 바르트 문체의 난해함을 알 수 없으니 가독성 문제를 번역자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건 염치없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번역자의 오류에 대해 좀 말하자면, 번역투가 문제가 아니라 긴 문장의 호흡을 끊는데 미숙하거나 게으른데서 나온다.  

   
  랭보나 초현실주의자들의 종국적 실서증-바로 이로인해 그들은 망각으로 떨어진다-문학의 그 전복적인 자침이 가르치는 것은 어떤 작가들의 경우 문학적 신화의 처음이자 마지막 활로인 언어가 결국은 그것이 달아나고자 했던 것을 재구성한다는 것이고, 혁명적 상태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글쓰기는 없다는 것이며 형태의 모든 침묵은 완전한 무언을 통해서만 기만으로 벗어난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이게 과연 우리말인가? 조금만 더 교정을 보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부지런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만년 만에 의욕적 독서를 통해 돌아봐야 하는 사항 

인간의 공유물이고 반사작용인 랑그langue와 랑그의 밀도과 결을 갖는 파롤parole의 차이인데 여기서 생겨나는 게 문체style이다. "작가의 문학적 의도와 육신적 구조 사이에 놓인 방정식"으로 간주한다.  

고전주의적 글쓰기가 정치적 글쓰기와 비슷한 기저를 지니고 있고, 소설에서 글쓰기를 19세기 사실주의에서 분석한다.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과거가 소설적 시제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즉 인용부호 안에서만 가능한 글쓰기로 전락한다. 이를 뛰어넘은 글쓰기로 까뮈의 문체를 든다. 어찌보면 까뮈가 사용한 복합 과거는, 단순 과거가 지닌 허구적 특성을 극복하고 객관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담론은 프랑스 언어 사용자가 아니라면, 사실 단순 과거만큼 객관적이고 허구적 담론에 불과할 뿐이다. 바르트의 장점이자 한계가 바로 해당 언어의 고유성에 있다. 즉 그가 비판했던 사실주의적 글쓰기가 옛날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고전에는-바르트의 글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면!-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다. 고전주의부터 글쓰기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중립적 글쓰기를 강조한다. 영도의 이르는 글쓰기는 "작가가 처한 새로운 상황의 양태(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보여주고자 했던)이고 침묵이 존재하는 방식(시적 감정을 중요시하는)이다." 요거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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