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꿈결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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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인 경우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열 살부터 청소년으로서의 고뇌와 성찰을 시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때부터 싱클레어는 ‘한 세계’와 ‘다른 한 세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어색해한다. 싱클레어가 어릴 적 부모님의 집에서 경험한 밝은 세계는 신의 세계다. 부모님의 집은 경건함을 띠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성경에서의 신은 ‘선한 신’으로서 선함과 질서를 대표한다. 따라서 이곳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신이 명한 의무를 수행하고, 죄를 지었으면 뉘우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선량한 세계다.


 ‘다른 한 세계’는 질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어두우면서도 이상한 세계로, 악과 혼란, 금기가 있는 곳이다. 또한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벗어나 있어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혹적이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느낀 혼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정말이지 기이한 일은 이 두 세계가 서로 맞닿아 있고 너무나도 가까이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12p)

 한편 작품에서의 ‘두 세계’는 헤세가 살던 20세기 초 독일에 지배적이었던 ‘기독교적 가치관’과 하층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개방적 태도’를 각각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데미안』은 널리 알려진 대로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수적 가치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를 드러낸 것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작품에 나타난 두 세계를 사회적·개인적 두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밝은 세계'는 엄격한 윤리와 도덕을 기반으로 한 사회를 가리킨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한편, '어두운 세계'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따르지 않던 하층 민중들의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곳은 상대적으로 무절제하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인다.

 다음으로 개인적 측면에서 두 세계를 비교해보자. ‘밝은 세계’는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가정을 뜻한다. ‘다른 세계’는 밝은 세계에서는 금지된 다양한 욕구가 있는 곳이다. 가령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의 무리에 끼고 싶어서, 도둑질을 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꾸며낸다. 밝은 세계에서의 악행이 여기에서는 미덕으로 인식된다. 그는 이 거짓말로 인해 크로머로부터 고초를 겪다가 데미안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온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악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았다. 단지 싱클레어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조건 없이 그를 도와주었다. 여기에서 데미안이 외부에 드러나는 밝은 세계를 이미 전혀 개의치 않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도 싱클레어에게서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생겨나는 고민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듯 청소년기의 고뇌와 성찰은 대체로 성장하면서 인식하는 자신의 욕망과 기존 사회의 질서와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사회적으로는 엄격한 도덕률로부터,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데미안』은 일관되게 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긍정한다. 이는 ‘아브락사스’라는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선악을 초월한 상징적 존재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누구나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면밀하게 탐구하는 것이라고 작품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찾은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데미안』이 주는 메시지다. 이는 의존과 자립, 미성숙과 성숙 사이에 놓인 청년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느껴진다. 나 역시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독립을 갈망하게 되었다. 내 경우엔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산 지 이제 4개월이 넘어간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는 못했다. 휴대폰 요금은 아버지께서 내주고 있고, 형에겐 가끔씩 돈을 빌리곤 한다. 이러한 의존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다. 작년에 한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경제적 독립 없이, 인격적 독립 없다.”라는 말씀을 했는데, 나는 이 말에 참으로 공감하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어린 시절은 ‘잃어버린 낙원’(78p)이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4p) 알을 깨고 나온 자는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 없고 불안할 때가 많다. 싱클레어가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리라 느꼈으며, 나도 나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았다.’(109p)고 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자주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인생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어색하기만 하다. 문득 앞서 언급한 교수님께서, “나는 결코 20대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언젠가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가진 돈도 많지 않고, 직업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이 무척 불안했다는 것이다. 이를 듣고 비슷한 상황에서의 불안을 나만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 위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자연히 사라질 불안감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을 표현하는 두 가지 명칭이다.”(133p) 고유한 자신의 심성(타고난 마음씨.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운명과도 같다. 그렇다면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운명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본성은 결코 나의 삶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죽을 때까지 책임지고 가져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태어난 이후 내가 이제까지 겪었던 모든 경험과 이로 인해 떠올린 생각들 또한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유일무이한 것이다. 누구도 내가 겪은 경험들을 완전히 똑같이 겪지 않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오지도 않았다. 즉 나 자체가 완벽하게 고유한 맥락을 가진 하나의 복잡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다.’(9p) 결국 주어진 본성을 인정하면서 생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을 통해 의미를 찾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언제 끝날지 모를 여정을 착실히 살아가는 것이 삶을 정직하게 대하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몇 달 전 소로우의 『월든』을 읽고서도 이와 비슷한 결심을 했었는데, 이번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다시금 삶에 대한 생각을 다듬을 기회를 얻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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