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디까지나 편집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면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면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순수의 상징인 아이들의 정직한 이중성에 절망하는가. 자기한테 불리한 거는 쏙 빼놓고 이야기 하는 거 있죠? 아이에게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바로 내가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제3자에게 이야기할 때, 기억 속의 는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얼마나 예의 바른 사람인가. 내가 말하는 기억 속의 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다. 오로지 좋은 사람. 실제와는 다르게.


기억에 관한 책이라면 제일 먼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생각난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쌍욕과 저주를 애인과 친구에게 퍼부었던 과거의 나와 만난다면 어떨까. 책을 읽었던 사람 10명 중의 8명은 첫번째 페이지로 되돌아 갔다는 데 500원을 건다. 기억이라면 모디아노를 빼놓을 수 없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던 M도서관 어린이실의 뜨뜻한 방바닥을 확실히 기억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주인공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살인자의 기억법>도 기억난다. 70대 노인이 화자로 등장하는 <에브리맨> <유령 퇴장>도 함께.

















캐나다는 물론 미국, 유럽까지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토머스 키니어 씨와 그의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 피살 사건의 주범 제임스 맥더모트는 교수형을 당했다. 공범으로 지목되었던 그레이스 마크스, 일명 메리 휘트니라고 불렸던 그녀는 혐의를 부인한다.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는 피고석에 서서,

모든 걸 부인했지.

저는 그녀가 목 졸리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쓰러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28)


질문은 하나다. 그레이스는 영악하고 잔인한 살인마일까? 아니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순결한 희생양일까? 당시에 만들어졌던 수많은 문서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 책을 집필한 마거릿 애트우드는 <작가의 말>에서 확실하지 않으면 가장 확률이 높은 안을 선택하되 그럴듯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기록상에서 단순한 암시에 그치고 누가 봐도 분명한 빈틈이 발견될 때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적었다.(677) 소설은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고, 비극이 벌어졌던 바로 그 날, 그 장소, 그 시간의 기억으로 점점 좁혀져 간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정확히 471쪽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술주정뱅이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 동생 다섯을 돌보며, 캐나다로 건너오는 배에서 엄마를 잃고 엄마를 바다에 장사 지내야 했던 그레이스가, 이집 저집 하녀로 떠돌며 자신의 일을 억척스럽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내는 그레이스가 마냥 불쌍했다. 나는 언제고 그녀 편이었다. 그런데 471쪽을 읽고 나서는, 작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미 월시의 증언에 따르면 8시쯤, 그러니까 당신이 쓰러진 직후에 마당으로 찾아 갔다고 합니다. 맥더모트는 그때까지 총을 들고 있었는데, 새를 쏘았다고 우겼다더군요.”

저도 알아요, 선생님.”

당신은 펌프 옆에 서 있었다고 했고요. 당신이 제이미에게 말하길 나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낸시는 라이츠 부인네 집에 놀러 갔다고 했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어요. ” (472)


애트우드는 사건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최선과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 한 채로 남겨졌다. 30년 동안 교도소와 정신 병원을 옮겨가며 지냈던 그레이스는 1872년에 사면되었다. “거처가 마련된뉴욕 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후의 행적은 모호하다. 진실은 정말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683).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불린다고 하던데, 여자 이야기라고 무시하고 싶어서 붙이는 말이라면 동의하지 않지만, 남자가 모르는 세상을 조롱하기 위함이라면 받아줄 만하다.


그때쯤 우리 아버지는 지긋지긋해했어요. 뭐하러 자식새끼를 또 낳아 놓느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런데 멈출 줄 모르고 먹여 살려야 할 입을 또 하나 더하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에요. (162)


메리가 너는 이제 여자가 된 거라고 말했을 때 저는 다시 눈물이 났어요. 메리는 저를 감싸 안고 다독여 주었어요. 늘 바쁘거나 지치거나 아팠던 우리 어머니라도 그렇게 다독여 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더니 제 것을 살 때까지 쓰라고 빨간색 플란넬 페티코트를 빌려 주면서 어떤 식으로 옷을 접어서 핀을 꽂으면 되는지 가르쳐 주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245)


그는 길거리에 험악한 남자들이랑 떠돌이들이 많으니 보호 차원에서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아는 중에서 유일하게 그런 남자가 지금 여기 이 부엌에 나와 앉아 있다는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죠. 하지만 맥더모트가 예의를 갖추려고 하고 있었으니 입술을 꾹 깨물고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했어요. (381)



퀼트 이불을 연상시키는 파란색 표지를 한 장 넘기고는 한 달음에 읽었다. 그레이스가, 예쁜 용모에 손이 야무진 하녀 그레이스가 자꾸만 생각난다. 그녀를 본다. 그녀를 다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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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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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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