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줄이 재심 무죄판결을 받은 조작간첩사건은 대한민국에서 반세기 동안 펼쳐진 공포정치의 살아 있는 증거다. 민주화시대를 맞은 지 3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도 조작간첩을 만들어낸 공포정치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과 석 달 후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체제를 수립했다.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채택하고 개인숭배와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더욱 확고히 했다.

흔히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틀을 바꿨다고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사로 보든,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보든, 그렇게 말할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 공로를 국제사회가 인정했기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틀을 바꾼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라 생각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개선했고 진지한 태도로 옛 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한의 체제경쟁이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고 북한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여겼으며,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북한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자극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남북관계의 기조를 이념·군사적 대결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으로 전환함으로써 한반도의 국지적 냉전체제를 해체하려고 했다.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0년 10월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연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의 전쟁억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체제안전보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에는 말로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내심 ‘적화통일’을 꿈꿨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북한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원하며 미국과 수교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고 한 적이 없다. 동독 국민이 원하고 동독 정부가 결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교류·협력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동독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고 동독 정부의 무장을 해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브란트 총리가 펼쳤던 동방정책의 한국 버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관점에서 평화공존과 높은 수준의 교류·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정부의 태도와 국민의 판단은 결정되어 있다. 평화체제를 수립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남북한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양측 모두에게 유익한 사업을 하는 것,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과 수교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되는 것, 이산가족 상봉과 생사 확인을 포함한 인적 교류와 식량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을 주고받는 것, 그리고 북한 당국과 인민들이 원할 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아래 국가의 통합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생각할 수 없다.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대유행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국가역량을 총동원하고 시민의 일상생활을 제약하면서 방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효과가 확실한 예방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또는 바이러스의 변이가 진전되어 독감 수준으로 치명률이 낮아질 때까지 대유행을 늦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방역의 보건정책적 목표다.

지금의 40대, 50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수가 많다. 그들이 변화를 기피하는 보수적 또는 과거 회귀적 고령 유권자가 된다면 대한민국은 일본처럼 혁신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 물질에 대한 개별적 욕망과 북한에 대한 감정적 증오가 지배하는 나라로 머물 것이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사람의 욕망과 의지가 만든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한국현대사에는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절망,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짧지 않은 그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내 자신과 동시대의 벗들을 위로하고 싶다.

‘주어진 시대의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 안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살면서 오늘을 만들었으니 이제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역사를 지켜봅시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아직도 아름다운 감정과 소망이 남아 있다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삶의 마지막 날까지 서로 등 두들기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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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대법원이 재심 무죄를 확정한 사건들이다. 재심이 진행 중인 사건이 많아서 얼마나 더 무죄판결이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조작간첩 재심 무죄’를 키워드로 인터넷 포털 뉴스를 검색해보자. 모두가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은 아니지만 정보기관과 검찰과 법원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북한과 연계됐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를 씌워 수사하고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예외가 없다.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정치인 조봉암(1959), 박정희 정부가 북한 앞잡이로 몰아 사형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61),• 간첩죄로 기소한 1차 인혁당 사건(1964),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 등 유럽 지식인들을 엮어 넣은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 1967), 이중간첩 이수근(1967), 납북어부 간첩 서창덕(1967), 조총련 간첩 김복재(1970), 납북어부 간첩 박춘환(1971),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중 중앙정보부에서 사망한 최종길 교수(1973), 이철 등 민청학련 사건(1974), 손두익·전국술 등 울릉도 간첩단(1974), 김우종 교수 등 문인 간첩단(1974), 김우철 등 형제 간첩단(1975), 납북어부 간첩 정규용(1976), 김정사 등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1977), 석달윤·김정인 등 진도 간첩단(1980), 신귀영·신춘석 등 가족 간첩단(1980), 한국전력 검침원 간첩 김기삼(1980), 재일교포 간첩 이종수(1982), 나진·나수연 남매 간첩단(1981), 재일교포 간첩 이헌치(1981), 조총련 간첩 최양준(1982), 미법도 섬마을 간첩단(1982), 일본 취업 노동자 간첩 차풍길(1982), 납북어부 간첩 이상철·김춘삼·윤질규(1983), 조총련 간첩 조봉수(1984), 이준호·배병희 모자 간첩단(1985), 제주도 간첩 강희철(1986), 조총련 간첩 김양기(1986) 사건이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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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 판매가 금지됐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 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됐던,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 지목된 이유는 좀 우습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를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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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행자
행복 충전소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내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라.

-에이브러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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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내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라.

-에이브러햄 링컨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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