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 1부

 

 

우리는 우리 시대 경제의 산물로서 지금 이렇게 존재한다. 특히 물질 생산수단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삶과 사고를 형성한다. 초시간적 불변적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역사적 시기의 산물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1부의 핵심, 즉 역사 유물론의 핵심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부정적이다. 즉 청년 헤겔주의자로 불리는 헤겔 철학 해석가들의 저작을 거의 한 줄 한 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많은 곳에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를 논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게오르그 헤겔과 더불어 마르크스의 지적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저술가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대부분 이 책의 1부에서 제시된 건설적 이론들에 집중한다. 이 이론들을 제시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과녁으로 삼은 저작을 세밀히 비판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 책 전체를 놓고 이사야 벌린은 이 책의 매우 지루한 면들을 인정하면서도,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한다.

이 장황하고 ‘체계 잡히지 않은’ 육중한 저작은 죽은 지 오래되어 막 잊혀진 저자들과 이들의 견해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긴 서문에서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아주 일관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인상 깊게 해명하고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을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창하는 급진적 접근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접근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저술 당시에 마르크스가 별도로 저술했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여러 논제Thesen üer Feuerbach』의 마지막 논제에서 보이는 접근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압축되어 표현된다: “철학자들은 지금껏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자본주의가 많은 사람들을 무의미한 노동생활과 메마른 가정생활 속에 가두어 놓는다는 사실을 그저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필요한 것은 혁명이다. 현 상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목적을 달성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논의된 많은 저술가들과는 달리, 이들 두 사람은 단지 학문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저작은 거의 기적에 가까울 만큼 혁명의 성공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이것의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다.

역사 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 유물론, 또는 이들이 더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유물론적 역사관’은 당신의 물질적 여건들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유물론materialism’은 철학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심리철학에서 유물론은 마음은 순전히 물리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용하는 의미의 유물론이 아니다. 이들에게 ‘유물론’은 생산도구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주목한다. 아주 기본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 및 부양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해야 하는 노동과 매한가지이다. 더 복잡한 사회에서 그 관계는 우리의 또는 우리 것이 아닌 재산, 그리고 부를 생산하는 수단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물론은 실제 인간 삶의 본모습을 잊고, 추상적 일반화의 공허한 영역에 떠있는 그런 종류의 철학에 정면으로 대립된다. 이 철학은 대부분의 인간 삶이 처해 있는 거친 현실에 집중하며, 아마도 이런 점이 이 철학이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이 유물론은 물질적 상황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술의 영향은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며, 따라서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도 바꾸어 놓는다. 가령 노예제도의 폐지는 증기기관의 발명에 의해 가능해졌다. 기계가 수백 명의 노예들보다 더 열심히,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동 분업 division of labour

인간들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스스로를 동물들과 구별 짓는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의 구체적 물음이 그들의 삶을 규정하게 되었다. 사회가 성장함에 따라 성공적 생산에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들도 더욱더 복잡해져갔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노동 분업은 더 많이 일어났다.

노동 분업은 간단히 말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일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한 사회에서는 개인들 각자가 농사를 짓고 사냥도 하고 집도 짓는다. 좀 더 개발된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행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특징인 극단적 노동 분업이 인간 삶에 강력하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노동 분업은 소외를 일으킨다. 즉 개인들의 노동을 그들의 삶에서 분리시킨다. 노동 분업은 개인들을, 이들을 노예화하고 이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체제의 무력한 희생물로 전락시킨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서로 분리될 때, 노동 분업은 특히 큰 피해를 준다. 그런 분업은 오로지 거칠고 지루한 육체노동만 하는 사람들이 보람된 삶을 이룰 기회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더욱 심각한 것은 노동의 분업이 공통의 이익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전망하는 미래세계는 사적 소유가 이미 소멸된, 개인들이 일정한 근무 일수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런 세계이다. 그들이 말하듯이, 그런 사회에서 나는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고, 아침에는 사냥하고, 낮에는 고기를 잡고, 늦은 오후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식사 뒤에는 비평을 하는, 꼭 사냥꾼이나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자유로이 선택된 자기실현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의 이상적 모습이다. 강요된 단조롭고 고된 일로서, 이것 아니면 굶주림만이 있는 그런 노동이 아니고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불행만을 느끼게 하는 일에 갇혀있는 얼굴 없는 경제체제의 희생물일 뿐인 노동자 계급에 동정심을 느꼈다.

이데올로기 ideology

우리 삶의 모든 면이 그렇듯이 종교적·도덕적·형이상학적 신념도 모두 우리의 물질적 관계의 산물이다. 전통적으로 계급적 이익에서 독립해 있다고 여겨졌던 ‘한 시대를 주도하는 정신’이란 사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허황되고 합리화된 관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란 특정 경제 및 사회체제의 부산물에 불과한 이런 관념들을 지칭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데올로기에 속박된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자신들의 의식을 순수 사유의 결과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한마디로 잘못 알고 있다. 이들의 관념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역사적 사회적 여건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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