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은 나이 들어감의 또 다른 의미다. 크고 작은 무수한 파편의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잊혀지고 쓰러진 나의 서재는 빛이 바랬고 함께 낡았다. 새삼 돌아 왔노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게 뭐라고 사라져 버린 것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 생명력에 오롯이 감탄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듯 근면은 소실되지 않는다. 어디서든. 아이러니하지만 적당한 불안함과 막연한 걱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더라. 이 또한 사라지지 않는 명제랄까. 나만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다 그럴거라는 끈끈한 연대의식의 갸날픈 위로로 퉁치면 될 듯 싶다. 많은 것이 변했고 나 또한 무던히 변했다. 찬란했던 젊음도 이곳저곳 삐걱대기 시작했으며 기억 또한 찰나처럼 빠르게 지워진다. 


그나마 위안히 되는 것은 꾸준히 읽어 내고 듣고 생각했으며 덤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태생이 앉은자리 습성의 종족이 아니건만 오랫도록 앉아 지내는 동안 굳어 버린 근육의 얼레를 달리기를 통해 쓰다듬고 온기로 채웠다. 달리기는 다른 세상으로 이끄는 온기가 되었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곳으로 안내했다. 언제까지 달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러너스 하이가 지속되는 동안 읽고 쓰고 달리고파 낡은 서재로 천천히 뛰었다.


호흡을 열고 가슴을 넓히는 동안 나약한 인대는 들숨에 삐걱댔고 날숨에 통증은 빠르게 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살기 위해 뛰지 않으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퇴화된 달리기의 기억처럼 낡은 나의 서재를 천천히 다듬고 고쳐 세워야겠다. 지금의 몹쓸 통증이 시나브로 달리다 보면 강인하고 튼튼한 강철인대로 강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에.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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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살이에 빠져 산 지 이태 즈음 되었다. 종달새처럼 수시로 물어 날라 오던 택배전령이 반갑기도 했고 새로운 취미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명분이야 아이들을 위한 답시고 온갖 장비를 저울질 하며 머릿속에는 온통 들로 산으로 내달렸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야 다시 또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위안을 삼으며 욕망을 잠재웠기에 이 정도지 막 질러댔음 그나마 있던 세간살이도 남아 나질 않았을거다.

 

각설하고 몇 달 전 강화 캠핑장사고로 정부에서 관련법령을 정비한다고 떠들석하다. 요즘 돌아 가는 정황을 보면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역시나를 거듭해 황망하기까지 하다. 그 옛날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낡은 부르스타와 은박 돗자리에 온통 파란색 일색인 케빈텐트를 들고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고 사고는 곧 금지와 등치되었다.

 

야업장에 대한 규제의 골자는 강화도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동식천막(사방이 막힌 텐트나 타프(폴대를 세...워 그늘을 만드는 천막)) 내 전기, 가스 전면금지 및 텐트 내 취사금지란다. 비 오면 어디서 밥해먹지...?

 

사고는 안타깝고 불안하지만 금지는 구속이고 통제다. 개정하겠다고 들고 나온 야영장에 대한 관련규정은 온통 금지로 도배했고 어떻게 이런 발상이 쉽게 안건으로 상정되고 협의를 통해 나온 것인지 도통 이해불가다. 하기사 뭐든 이 땅에 올라타면 버젓이 한자리 꿰차는 세상인데 이게 무어라고. 어느 안중에라도 있었을까?

야영이 이젠 극기가 되었고 원시체험 코스프레로 돌변했다. 아이가 있건 말건 KS품질 인증이 선연하게 찍힌 전기장판하나도 쓰지 못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체온을 공유하는 진정한 야생이 기다리게 되었다. 낭만은 고사하고 감내할 수 없는 불편과 동행해야 한다.

 

규제는 최소화되어야 하고 사회통념에 맞아야 한다. 금지는 불법을 양산하고 억제는 또 다른 불만을 가져 온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감시와 처벌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증가시킨다고 미셀 푸코는 말했다. 결국 주류적 판단에 인간은 구속되고 판단을 유보하게 되며 규범적 상황에 길들여지게 된다.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소통없는 규제는 폭력이다. 불행하게도 폭력에 길들여지면 순응하게 되고 체념하게 되는 것이 또 인간이다. 어찌하다 힐링하겠다고 시작한 캠핑에 이런 무거운 상념까지 보태야 하는 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다만 이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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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한 바람이 들쥐를 타고 대지를 뒤흔들었던 페스트가 그랬을까? 14세기 유럽에 불었던 검은 바람이 21세기를 사는 지금, 기시감처럼 닮았다면 과장일까? 매일 같은 시각, 올라 타는 전철 안 가려진 눈빛들 사이가 그저 낯설기만 하다.

 

 

아놔....마스크 사야 하나....쩝...
재난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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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건만 이번엔 꽤나 심각하다. 마치 메르스 사태처럼...그녀가 한국문단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무시한 것도 있겠거니와 문제는 권위있는 출판사의 태도가 더 화근이다. 나는 창작과 비평의 계간지를 꾸준히 읽지도 않으면서 구독해 왔다. 계간지가 배달되어 와 책장 한켠에 고스란히 꼽혀 장식을 할지언정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지적 허영감의 표출이었고 현재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런데 믿었던 창비가 무너졌다. 권력의 카르텔이 담합해 내는 손쉬운 유혹에 경도된 것인지 너무도 가벼이 눙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별 볼 일 없는 내가 재차를 다시 읽어 봐도 표절인데 그 표절이 인용도 아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감춘다고 될 일인지 모르겠다.

 

 

문장을 단련하고 제련하는 과정에 필사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롤모델링을 삼고 그 작가의 글을 연장삼아 자기 것으로 화하라는 것이지 그대로 몇 줄 바꿔 가져오라는 뜻이 아님은 무지랑이 나도 안다. 나는 문학으로부터 불확실한 삶을 위로 받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문학의 본령이고 공감이다. 제 아무리 틀이 든든해도 쏟아 부은 알갱이가 부실하면 부실하기 마련이다. 신경숙 작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원치 않는다. 아울러 창비가 가려지질 못할 명분을 가지고 소방수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글을 읽고 위안 받는 사람으로써 썩어 빠진 이 시대와 다름을 보여 주길 간절히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고 민심이 이반된 지금, 용기 있는 커밍아웃만이 살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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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6-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용기 없이 아무 것도 아니죠..

穀雨(곡우) 2015-06-18 14:36   좋아요 0 | URL
용기내는 게 어려운 세상이죠. 누구든...
 

백선생이 나오는 자리는 호불호가 갈린다. 지난 밤 심드렁한 이야기 중에도

백선생은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또 누군가에게는 공공의 적(?)

즈음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가 나와 송송 식감을 썰어 내고 휘리릭 다지고 버무리는 동안 탁탁 놓이는

집밥의 마력. 신기방기하다.

 

그가 쥔 칼이 물론 좋겠지만 어찌 저리도 수월하게 절묘한 조합을 이뤄내는지

그저 감탄 또 감탄.

 

물론, 그로 인해 때 아닌 구박은 몹시 불편하지만 말이다. 그의 아내가 부럽다는

나의 아내는 그가 잘 나서도 아니고 요리를 잘하기 이전에 진심이 느껴져서란다.

 

 

...

백선생의 인기가 찌르는 이유,
그의 음식에 건강함을 넣지 않음에도
어눌하게 드러낸 그의 손맛으로부터
착착 감기는 누구나의, 누구나를 위한
누군가의 요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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