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럴 일을 당할 만하지 않은 사람이 치명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변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고통의 감정'.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clcos)'을 정의한다. 이어서『수사학』은 연민의 감정을 자세히 살핀다. 정의에서의 '변고'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이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머지않아 당할 법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다가올 일과 관련되어 있단 얘기다. "연민의 정을 느끼자면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이나 친구 중 한 명이 어떤 변고를, 그것도 우리가 연민에 관한 정의에서 말한 것과 같거나 그와 거의 비슷한 변고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수사학> 2권 8장-연민, 16~19행) 필자는 이 책을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데, 저자는 어떤 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심적 상태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논의를 이어간다. 

 

『수사학』은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

『13번째 증언』을 읽었다. 저자가 응한 인터뷰들과 관련 기사들도 읽었다. 책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올리다가, 윤지오 배우의 책과 인터뷰에서 느낀 어떤 감정이랄까, 그것을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까, 『수사학』몇 장을 읽어가면서 추적해보게 돠었다. 10년 동안 저자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동료배우(언니)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일까? 책보다 인터뷰들을 먼저 보아서인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미안함'이었다. 책에는 죄책감, 자책감이란 단어도 보인다. 자신의 처지가 동료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첫 실명 인터뷰(<故장자연 씨 동료의 최초 증언(윤지오)_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윤 배우는, 그 기획사에 소속되기 전에 ‘언니’와 몇 개월을 알고 지냈다고 했다. 윤 배우 부모님은 캐나다에 살고 있었고, 언니는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신 상태라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 윤 배우는, 자신은 위약금을 물고 기획사를 나온 상태였으나 "언니는 나오고 싶은 상태"였지만 "그럴 수 없어서 기획사를 나오기 위해 작성된 문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뉴스들이 다루고 있으니, 이만큼만 언급하자.

 

『13번째 증언』과 인터뷰를 접하며 먼저 떠오른 말은 '미안함'

그런데, <수사학>을 살피는데, '미안함'이란 항목이 없다. 가장 근접한 감정들을(항목) 살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연민'이었다. <위키백과>는 연민(憐愍/憐憫)을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한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국어사전은 연민(憐憫)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유의어로, 동정(同情)을 소개한다. 같을 동[同]에 정 정[情]이다. 낯설고 새롭다. 명사 '동정'의 기본의미는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알아주거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란다. 이런 사전풀이를 앞세우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술과 비교핼 볼 필요는 느껴서다.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안면은 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야 한다.'는 것. 그럴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기에 그렇단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끔찍한 것(기억)은 가련(可憐)한 것과는 다르며, 때로는 연민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란다. 연민과 ‘반대되는’ 그 감정은 무엇일까?
끔찍한 것이 나의 문제로 다가오면 우리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한다. <수사학>에 따르면 10년을 마음감옥에서 보내고 있는 윤 배우가 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곧 '연민'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비록 남남이지만 윤 배우가 언니의 비극에 ‘참전하고’ 있는 정도가 연민 그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책의 한 대목에 주목한다.
"죽음으로 말하려 했던 언니의 고통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기억들을 피하지 않고 다시 마주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13번째 증언』 244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가 숱한 증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다.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 가운데 희생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잠재독자를 향하는 저자의 마음이야말로 ‘수사학’이 정의하는 연민에 가깝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수사학>에 따르면 연민에 가장 ‘대립되는’('반대되는'이 아니다) 것이 '분개(nemesan)'이다(같은 책, 2권 9장_분개). 그러데 이 감정도 예사롭지 않다.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되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는 분개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도리라는 것.”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연민’이다. 그리고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다. 이렇게 연민과 분개는 대립각을 형성한다. 자신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 예상될 때 가지는, 연민보다 더욱 깊이 참전하는(반대 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수사학>은 이번에도(‘분개’의 경우도) '어떤 불상사가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웃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생긴다.'고, 분개라는 감정도 ‘부당하게 번영하는’ 상대와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단다. 이에 따르면 『13번째 증언』이나 인터뷰는 ‘분개하는’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분개하게 하지만, 앞서 제기한 어떤 ‘미안함’과는 좀 다른 듯하다.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  연민과 대립각을 형성

오히려 저자가 겪은, 겪고 있는 그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하고 있거나 아직도 두려움 그 자체로 보인다. '두려움'(수사학 2권 제5장)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다. 세월이 약이라고는 하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작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분개의 대상이 되오 있으며, 먼저 떠난 동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 친구를 제대로 배웅하기 위해 용기를 낸 자가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뭔가 한참 잘못되어 있다. 『일리아스』라는 서사시의 배경은 10년 전쟁(트로이아 전쟁)이다. 그러나 그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일반화하면 ‘인간의 분노’다. 전쟁 10년째에 이르러 ‘끝내’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분노’란? <수사학>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 없이 명백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 하는, 고통이 뒤따르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복수'나 '고통이 따르는 욕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데, 차분히 생각하면 심오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헥토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들인다. ‘자신의 친구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분노를 거두는 것. 『일리아스』는 이처럼 주제인 분노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곧바로 ‘자신의’ 분노를 거두어들이는 아킬레우스

<수사학>은 앞서의 정의에 입각하여,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일부)에게 화를 낼 것이며, 그 이유는(분노하는) '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 책 2권 제2장-분노)이란다. 『일리아스』를 떠올리면 얼른 이해가 된다. 『13번째 증언』의 저자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떤 미안함이고 자책감이고 회한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히는 과정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연민'과 '분개' 사이에 있을까? '두려움'과 '분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수사학』의 목차를 살펴보기시를. 이 가운데 몇몇 항목들을 살폈으나 저자가 고인에게 느끼고 있는, 그 아음 읽기는 실패한 것 같다. 다만 그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인간이 가진 감정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 책이 일종의 '감정사전'이면서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연민과 분개와 두려움과 분노를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사각형 내부에 한 점을 찍는다면 과연 어느 지점이 될까? 과연 이런 가상의 사각형 안에 한 점을 찍을 수는 있는 것일까?  책 『13번째 증언』과 저자의 인터뷰, 관련 기사들을 대하는 마음은 예사롭지 않다.  『13번째 증언』 저자가 책의 출간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우정이랄까. 그 아레테(arete)를 굳이 우리말 한 단어로 옮긴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닐는지.

 

*이 글은 『13번째 증언』이란 책과 인터뷰들을 보면서 착안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방점을 찍은, 필자의 '의견'이라, 해당 책과는 연동하지 않습니다. 이 책과 관련된 리뷰는 따로 올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필자 timeroad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