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선거는 정치를 바로잡고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서 이탈하는 수단이 되었다. 트럼프를 뽑은 거의 6,2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은 트럼프에게 찬성표를 던짐과 동시에 민주주의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탈’에 찬성했다. 모디의 선거, 에르도안의 선거, 푸틴을 지지한 사이비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경우와 유럽의 많은 포퓰리스트 지역에서 민주주의 자체의 약화가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 약화는 각 국가별 민주주의 형태에서 자유와 심사숙고와 폭넓음이라는 요소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지도자가 당선되는 토대다. 모든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불만을 자양분 삼아 성공하고 출세했고, 스탈린과 히틀러와 페론을 비롯해 각자의 시대와 장소에서 민주주의 실패를 이용한 20세기 전반기의 다른 많은 지도자의 전철을 밟는다고 한다면 반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민주주의 약화에서 새로운 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민주주의 자체에 진저리를 치는 정서가 독특한 논리와 맥락을 갖는 방식은 3가지가 있다. 첫째, 갈수록 증가하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이용 인구와 웹 기반 동원, 선전, 정체성 형성, 친구 찾기의 유용성이 누구나 원하는 대로 또래, 동료, 동지, 친구, 협력자, 전향자를 찾을 수 있다는 위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모든 개별 국민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경제 주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셋째, 이방인과 외국인과 이주자가 어디로 이동하든 냉정한 반응과 가혹한 상황에 부딪치겠지만 인권이 전 세계로 확산된 덕에 사실상 모든 국가에서 그들에게 최소한이나마 발을 디딜 토대가 제공된다. 이 3가지가 결합해 민주주의 체제에 늘 필요한 정당한 법 절차, 신중하고 합리적인 행동, 정치적 인내심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이 전 세계에서 심해졌다. 여기에 세계경제 불균형의 악화, 전 세계 사회복지의 붕괴, 우리 모두가 재정 재앙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의 확산 덕분에 번창하는 금융산업의 세계적인 침투까지 더해지면, 민주주의의 더딘 행보에 대한 조급증은 끊임없는 경제공황 분위기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그런데 번창을 약속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흔히 고의로 이런 공포를 조성한다
우리가 여전히 (결코 뻔한 결론이 아닌) ‘발전’을 믿는다면, 이제는 발전을 축복과 저주의 혼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축복은 갈수록 줄어들고 드물게 나타나는 반면 저주는 꾸준히 증가한다. 최근의 우리 선조들은 희망을 투자할 가장 안전하고 유망한 곳이 미래라고 믿었지만, 지금 우리는 주로 다양한 두려움과 불안과 우려를 안고 미래를 예상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에는 일자리 부족이 증가하고, 소득이 떨어져 자녀를 위한 삶의 기회가 줄어들고, 사회적 지위가 대폭 하락하고, 삶의 성취가 일시적이고, 마음대로 이용 가능한 도구와 자원과 기술에서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리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삶의 통제권이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서, 우리 요구에 무관심한 모르는 사람들 손에 좌우되어 앞뒤로 움직이는 장기판 졸의 신세로 전락한다고 느낀다. 그나마 이 정도면 나은 신세다. 심하면 장기판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대놓고 적대시하거나 잔인하게 굴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려고 우리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래는 더 편하고 덜 불편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업무에 서투르고 부적합한 사람으로 파악되거나 분류되어 가치와 위엄이 부정되고 그런 이유로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고 소외되고 따돌림당하는 섬뜩하고 위협적인 상황이 자주 떠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늘날의 악, 혼란, 무기력의 근원을 파헤쳐서 드러낼 용기와 투지를 지닌 권위자)은 2016년 샤를마뉴 상 수상에 즈음하여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절대 싫증내지 않고 반복해야 하는 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대화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화의 문화를 촉진해서 사회구조를 재건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대화의 문화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타당한 대화상대로 보게 하고, 외국인과 이주자와 다른 문화 출신자를 경청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존경하게 하는, 견습 기간과 훈련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 대우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고 민첩하게 대응하고 모두를 포괄하는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동의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수단"을 만드는 작업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시급히 참여시켜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239) 우리가 아이들을 대화로 무장시키고 만남과 협상이라는 유익한 싸움을 하도록 가르치는 그런 정책을 펼치는 한 평화는 지속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이들에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전략을,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전략을 창안할 능력이 있는 문화를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9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화의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사실상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 또 다른 메시지가 포함된 문장을 덧붙인다. "이 문화는 (……) 학교 교육의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어린이들에게 안겨주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