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가 망할 무렵 크게 유행했던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 요동으로 가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는 아직도 대륙 도처에 나돌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사 이래 고구려를 치기 위해 흘린 피가 무릇 몇 말이며, 그렇게 싸워온 세월은 장장 몇 해였던가! 이는 만천하가 이미 다 아는 일로서 고구려는 누가 뭐래도 누대에 걸친 중국의 숙적이며 천적이었다.
대륙의 수많은 인접국들과는 처음부터 격이 다른 나라가 고구려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들어서는 과정은 물론, 대륙의 역사가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는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항상 그 배후와 이면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와 싸운 나라치고 온전하게 사직을 보전한 나라가 없었고, 요동으로 군사를 낸 황제치고 뒤에 후회하는 경구를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 이세민만 하더라도 번번이 요동에서 대패하여 들개처럼 쫓겨다니다가 결국 안시성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성주의 화살에 한 쪽 눈마저 잃지 않았던가. 그 이후 요동에서 시작돼 탁군과 낙양에까지 널리 유행한 노래가 있었다.
새야 새야 무당새야 안시성에 앉지 마라
샛바람 부는 깃이 눈동자를 가릴레라
친정살이 좋다더니 고생 고생 말도 마라
비단 백 필 짜내다가 남 좋은 일 한단 말가
실명(失明)한 이세민이 패배를 자인하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비단 1백 필을 주어 사죄했다는 치욕적인 사실을 풍자한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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