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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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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쓰리'가 무엇인가 했다. 일본 소설이니 영어 three는 설마 아닐테고. 표지의 그림이 '쓰리'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말처럼 '반사회적'인 소매치기이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내게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낯선 이름이고, 이 소설가의 책도 처음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흡인력이 있어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소매치기 장면의 생생한 묘사,인물 행동들의 묘사가 영화를 보는 듯 눈 앞에 그려진다.

주인공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어난 사건들, 그들간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지 각 인물들에 대한 부연 설명은 거의 없다.  

'나(니시무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맨 마지막 그를 죽이기 직전에 기자키가 "너 참 너저분하게 살았더군."이라고 한 것과 지난 날을 회상하는 아주 잠깐의 몇 몇 장면에서 '나'에 대해 유추해 볼 뿐이다.  

신처럼 이 세상을 휘두르는 기자키 외에 (아니 그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모두들 삶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정되고 지속적인 관계는 없다. 니시무라와 관계를 맺었던 유부녀 사에코는 헤어진 후 한달 뒤 자살했고, 신미도 살해당했다. 편의점에서 발견한 꼬마 소녀치기와 창녀인 그 젊은 어머니의 관계, 생활도 매우 불안하다. '내'가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은 나에게 조금씩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자키에게 약점으로 이용당하고 만다.  

기자키는 소름끼치는 존재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국가나 권력자보다도 더 큰 권력을 뒤에서 휘두르고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다. 기자키가 니시무라에게 들려준 '운명의 노트' 이야기는 기자키가 생각하는 최고의 쾌락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그가 예로 든 이야기는 끔찍하다)

기자키는 몇 가지 임무를 니시무라에게 맡긴다. 꼬마 소매치기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임무 수행 전 꼬마 소매치기에게 상자를 주고 함께 공던지기를 한다. 작별인사를 하며 '시시한 인간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으니 소매치기도 되지 말라고. 니시무라가 그 임무를 수행해 내는 과정은 이 소설에서 극적인 재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자키의 칼(그가 명령한)에 찔린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다면서. 그러나 소설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리는 암시를 남기며 끝난다. 기대할 것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라는 걸까. 혹시 속편이 나온다면 살아남은 내가 기자키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며, 그 꼬마 소매치기가 어떻게 성장해서 또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려지지 않을까. 

파편화된 인간관계가 일본 소설에서는 주로 많이 다루어지지 않나 싶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실제 우리 삶이 많은 부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 소설을 읽고 나면 금속성의 차가운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탑'. 실제 작가의 경험과 의식에서 나온 이 '탑'은 어떤 지향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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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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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보인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고 먹지 않는 것이 돼지고기인데 이런 고기류를 다루는 정육점 주인이 무슬림이라니. 게다가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아직은 낯선 단어다.

서울의 한 달동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고아원에서 입양된 아이다. 나를 입양한 사람은? 터키 출신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국에 눌러앉은 ‘하산’아저씨다. 터키에서 왔으니 무슬림인 아저씨의 직업은 정육점 주인이다.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지만 학교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이승복 동상의 팔을 떼어버리고 화단에 오줌을 누었던 나는 어떤 ‘진단’을 받았고 그 후론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하산 아저씨가 몇 번이나 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셨어도 말이다. 내 몸에는 나도 알지 못하는 무수한 흉터가 있다. 하산 아저씨는 그 흉터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그것도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방향으로. 하지만 이야기는 우울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외려 담담하고, 이야기는 경쾌하게 흘러간다. 너무 무겁지 않은 이야기 전개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오히려 더 잘 전해주었지 않나 싶다.

본래 남편, 아이들과 무슨 연유에선지 떨어져 살고 있는 충남식당 안나 아주머니. 하산 아저씨처럼 한국전 참전 후 역시 한국에 눌러 살고 있는 그리스 출신의 야모스 아저씨. 소설가를 꿈꾸는 연탄집 아들 말더듬이 유정(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가 억겁 세월 윤회를 통해 이 곳에 왔다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맹랑한 녀석, 참전 당시 기억을 잃어버려 그 당시 기록을 줄줄 외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기억은 찾지 못한 대머리 아저씨. 어른이고 아이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정상적인 삶’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쌀집 둘째딸과 교회 전도사까지.

각 등장인물들의 사정을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이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다같이 ‘소풍’을 가는 장면일 것이다. 트럭을 타고 이 모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함께 소풍을 떠나서 산돼지를 잡고 먹고 어울려 논다. 이후에 하산 아저씨의 가게를 더 비싼 값에 개발업자에게 팔려는 주인 때문에 하산 아저씨는 결국 가게를 내놓고 나와야 하게 되고, 라마단 금식 중 폐렴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입원하게 된다. 거기서 하산 아저씨는 내 흉터가 총상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하산 아저씨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의붓아저씨의 피가 흘러 들어온 것을 느끼고 , 그리고 적대하던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떤 처지에 있건 삶의 순간 순간은 소중하다고,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라고 이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순응’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덤덤하게 소설 중간중간에서 보여준 비판적 시선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후속편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자라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밑줄)
(p. 22) 학교란 한마디로 착실한 바보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나는 학교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똑같은 책걸상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얻어터지거나 욕을 먹거나 웃거나 울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끔찍해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p. 50)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 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심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p. 51) 차이는 유사성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 자는 행복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차이가 유사성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무시해도 상관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한 자들이라고 한다.
 

(p. 70)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다. 불우한 청소년들의 꿈은 하나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추상은 구체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행복은 추상에 속한다. ......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는 것이야말로 구체가 아닌 추상으로밖에 꿈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p. 91)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는 싸구려 애정과 동정일 뿐이었다.
.....
상처받은 사람을 놀리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p. 107) 상처의 치유는 그런 식으로 유예된다. 정작 상처입은 사람들은 그걸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 태연한 척 애를 쓰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상처가 증식하면 드디어 온몽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돌려주기 시작한다.
 

(p. 118) 말을 더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다.
(p. 126) 나는 지루한 오후를 맛없는 빵처럼 뜯어먹었다.
(p. 129) 둘 다 명사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 둘이 함께 걷기 시작하자 일종의 합성명사가 되어 버렸다.
(p. 138) 내게 속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늘 그렇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
(p. 140) 시선에는 한계가 없다. 어디든 볼 수가 있다.
 

(p. 141)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 음악은 소리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영혼과 유사한 리듬을 지녔느냐에 따라 음악으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p. 155) 고통받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언어의 목록은 너무 간단하다.

(p. 189) 슬픔에 시효가 없다는 점이 인간이 지닌 권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p. 197) 소풍이란 이런 것이다. 용트림을 하는 돼지와 함께 게으른 바람속을 진땀을 흘리며 갈팡질팡 걷는 것.
 

(p. 214) 너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냥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곳이야. 자본주의란 녀석은 한마디로 버릇이 없단다. 너도 자본주의한테 예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처받는 건 너일 테니까.
 

(p. 229) 눈부신 하늘과 푸른 나무와 그것들이 품은 생명들. 그런 때가 있지 않던가. 세계가 선명한 의미가 되어 소나기처럼 와락 덤벼드는 순간. 지나가는 비 한 줄금에 영혼마저 흠뻑 적셔버린 그 순간이 지나고,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저 스쳐 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절로 눈물이 났다. 하산 아저씨는 까닭 없이 흐르는 내 눈물을 이해해 주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걸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p. 233)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음에도 이 세상과 별거 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들이 수렴된 단 하나의 표정은 바로 저 엉덩이에 있는 게 아닐까.
 

(p. 236) 나는 내 몸속으로 의붓아버지의 피가 흘러들어온 걸 느꼈다. 뜨거웠다. 인간의 모든 기억들이 이처럼 단순하고 정직하게 이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훗날 내 자식들에게 나의 피가 아닌 의붓아버지의 피를 물려주리라. 병실 구석에 있던 이맘이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그날 나는 이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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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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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깊숙이 점령해 들어가고 파시즘을 신봉하던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그때까지 동맹국이던 나치 독일을 향해 급작스레 전쟁을 선포했다, 1945년 1월 소련의 장군 비노그라도프는 스탈린의 이름으로,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
  내 어머니도 오 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   (작가 후기 중)

    역사 속에서 강제수용소에 관해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한 것은 아마도 나치 치하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일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의 영화, 「죽음의 수용소」, 「더 리더」같은 책을 통해서 강제수용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때는 시간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슷한 때이지만, 그 대상은 유태인이 아닌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고 강제수용소는 러시아에 있다. 동성애자 레오가 열 일곱살때 징집되어 오 년 동안 러시아 강제수용소에서 복역한다. 

   작가는 다른 소설들이 흔히 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시점은 레오의 시선에 있고, 시간 순으로 흐르지만 짧은 각개의 장은 '시멘트'나 '화학 성분에 대하여' 처럼 어떤 사물, 사건,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격앙된 감정이나 분노는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담담하게 현재형으로그리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더 실재감을 더한다. 읽으면서 그들의 배고픔, 서서히 박탈되어 가는 소망, 처절함을 서늘하게 함께 느낀다.  읽으면서 가장 아팠던 부분은 '대리형제'였다. 집에서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기뻐서 입천장이 팔딱거렸'던 레오가 어머니가 보낸 (새로 태어난) 동생의 사진과 그 밑 한 줄을 보고 흐느끼던 장면. 그 한 줄에서 어머니는 쓰지 않았지만 레오는 읽어내어 버렸던 말,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 그게 내 입장이야. 집에 입 하나 준 셈 치고."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말이 결국 레오를 지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언어 실험실이다. 숨그네, 심장삽 같은 새로운 단어의 조합, 의인화된 수많은 단어들과 개념들 - 그럼에도 추상적이지 않고 그 의인화가 그 상황을 더 적확하고 날카롭게 드러내어 주는 -, '한방울넘치는행복' 처럼 띄어쓰기를 없애버림으로써 본래 단어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표현하는 것, 수많은 은유가 시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밑줄 그은 단어와 구절이 너무 많아 다 옮기지 못할 정도다. 번역서이지만 입으로 소리내어 굴리고 싶은, 되씹게 만드는 구절들이 많았다. (번역자의 공도 크다 할 것이다)  뮐러는 실제로 수용소에서 복역한 경험이 있는 시인 파스티오르에게서 영감을 받고 이 소설을 집필했는데,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뮐러는 '지시어와 대상 간의 거리'에 대해 고민했고,


....거리를 줄이고자 하는 뮐러의 필사적인 노력과, 언어와 의미에 대한 불신을 음성시와 같은 글쓰기로 표출한 파스티오르의 시적 특성이 만나 태어난 말들이 '숨그네',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감자인간', '양철키스', '볼빵'과 같은 조어들이다. 파스티오르는 수용소가 자신의 언어를 부수었다고 했다. 파스티오르에게 바치는 오마주의 성격을 띤 소설 「숨그네」 안에서, 이 단어들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건축가가 집을 짓듯 머릿속에 수용소를 짓는다.

    "모국어란 피부와 같아서 누군가에게 폄하되거나 심지어 사용을 금지당했을 때 피부에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고 뮐러는 말했다. 얼룩진 역사에 오염된 모국어를 혐오했지만 말년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국어를 보여준 파울 첼란처럼, 뮐러와 파스티오르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상처투성이의 모국어를 복원해냈다. 그 모국어에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떠나온 고향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고향과 과거의 얼굴도 새겨져 있다. 「숨그네」 는 독재치하 루마니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이 그 파국과 관련되어 있는 나라 독일로 이주한 작가 헤르타 뮐러가 쏟아내는 말의 축제다. 말들의 축제 속에서 복원되는 수용소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감당할 것인가는 우리의 과제다.


이 부분을 보면서 문득 우리말의 사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약간 씁쓸해졌다. 우리말은 제대로 풍부하게 사용되고 사용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을까. 이 영어 광풍의 시대에 우리말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함께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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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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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하면 떠오르는 것 - 이슬람 국가,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미국과의 전쟁, 파병 등..

   작가인 할레드 호세이니는 1965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출생하여 1980년에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전까지 겪었던 그 곳에서 (아마도) 겪었을 역사의 굴곡은 이 소설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사는 상류층 '바바'의 아들이고 작가인 호세이니처럼 나중에 미국에 망명하게 되는 '아미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그 어린시절의 중심에는 하인 '알리'의 아들 '하산'이 있다. 수니파인 아미르는 바바의 유일한 외아들이자 도련님이고 하산은 소수인 수니파이고, 하자라인 하인의 아들이면서 아미르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비록 아미르가 다른 사람 앞에서도 하산을 친구로 인정한 적은 없었지만 하산은 늘 아미르에게 변함없는 신의와 충직을 지킨다.

   남성적인 바바와 달리 (어머니를 닮은) 아미르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책 읽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자기를 별로 닮지 않은 아들에게 바바는 아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아미르는 늘 아버지의 애정에 목이 말라 있다. 알리는 바바의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낸 가까운 하인이었고 그의 아들 하산 역시 바바는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하산과 아미르는 동네의 어린 악당인 아세프 일당을 마주치게 되고, 하산은 그에게 새총을 겨누며 위기에 빠진 아미르를 구해준다. 아세프는 복수하겠노라며 이를 간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연날리기와 연싸움이 아이들의 대대적인 행사였다. 연싸움에서 끝까지 이기는 아이와 마지막까지 날던 연을 잡은 아이는 영웅이 된다. 아미르와 하산은 연을 잘 날렸고, 연을 잡는 데는 하산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연싸움에서 이겨 바바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는 결국 연싸움에서 이기고 하산은 연을 잡으러 간다. 이렇게 말하며,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열 두살 나이에 아미르를 그 이후의 그로 만든 그 사건이 그 날 일어났다.

연을 주워오다 골목에서 아세프에게 강간당하는 하산을 보고도 아미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도망쳤고, 하산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산을 볼 때마다 드는 죄책감에 아미르는 하산을 아예 피해 버리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 결국 알리와 하산을 떠나게 만든다. 하산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떠났다.

 

   그 후 공산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 사건 후 6년 뒤 바바와 아미르는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트럭에 몰래 오른다. 여러 고비를 거치며 미국에 도착한 그들. 바바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아미르는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아프가니스탄인 벼룩 시장에서 만난 소라야와 아미르는 결혼하고, 바바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느 날, 아미르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아버지의 옛 친구 라힘 칸의 연락을 받고 고국에 가고 그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산의 출생의 비밀(그가 아미르이 이복동생이라는 것)과 그가 탈레반에게 총살당한 것, 그리고 그의 아들 소랍에 관한 이야기를. 그사이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산 정권을 몰아낸 탈레반이 공포 정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연싸움은 금지되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여곡절 끝에 소랍을 찾아내어 데려오지만 탈레반의 우두머리가 된 아세프와 마주치게 되고 아미르는 그의 놋쇠 장갑에 처참하게 맞는다. 죽기 직전이었던 그를 구한 것은 소랍의 새총이었다. 하산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아원에서 끔찍한 생활을 했던 소랍은 미국으로 가기 전 잠시 법적 절차를 위해 고아원에 가 있자는 말에 절망하여 손목을 그어 버린다. 다른 통로가 마련되어 고아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하러 아미르가 갔을 때 욕조는 이미 피바다였다.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소랍은 그 후 말을 잃었다. 미국에서 소라야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랍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에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아미르와 소랍이 다시 희미하게나마 소통을 시작한 것은 연을 날리면서였다. 아미르가 연을 날리자 그것을 보던 소랍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돌았고 아미르는 상대편 연을 끊어버렸다. 연을 잡아다줄까 하는 물음에 소랍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아미르는 말한다.


"너를 위해서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해주마."

나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미소에 불과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아지지도 않았고, 어떤 것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저 작은 미소에 불과했다. 놀란 새가 날아오른 직후에 흔들리는 숲 속의 나뭇잎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그 미소를 양팔을 활짝 펴고 환영할 것이다. 봄이 오면 눈발이 하나씩 녹듯, 어쩌면 최초의 눈발이 녹는 것을 내가 목격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은 아미르와 하산, 소랍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아프가니스탄 마을의 모습, 아이들의 놀이, 음식, 연싸움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호세이니의 개인적 체험에서 나왔으리라. (아직도 그 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비극과 격동의 역사 속에서  아미르와 하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그럼에도 그들을 바라보고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고 애정이 스며있다.

 

  출간된지도 한참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구입한지도 한참 되었지만 선뜻 손내밀어 읽지 못했다. (부끄럽다.) 읽고 나면 틀림없이 마음이 아플 것 같았고,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읽기를 잘했다. 이 책에 대한 입소문은 부풀려진 것이 아니었고, 누구에게든 추천하고픈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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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어빈 얄롬 지음, 임옥희 옮김 / 리더스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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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린다? 오만하리만큼 자존심 강했던 철학자 니체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니체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서 결국 울게 만든다고? 도대체 어떻게?! 처음 소설 제목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다. (어쨌든 이 소설 끝에서 니체는 정말로 눈물을 흘린다.)

 

   작가 어빈 얄롬은 정신의학과 교수이니 인간 정신과 심리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리란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소설이라는 틀 안에 담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한 철저한 이해 후에 가능할 것인데 그 시도 자체가 대범하다. 더구나 작가 후기에도 나와 있듯이, 소설 속 니체와 브로이어의 만남이 실제로도 정말 ‘있을 뻔’ 했었다니.

 

    이 소설에는 빈의 저명한 의학자 브로이어, 니체, 프로이트, 루 살로메 등 그 시대의 지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브로이어가 누군지 몰랐다.) 휴가를 떠났던 브로이어에게 루 살로메가 니체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아마도 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니체의 절망을 치료해 줄 것을 루는 브로이어에게 부탁한다. 이 당시는 아직 정신의학이 정식으로 인정되기 전이지만 브로이어는 이미 환자 ‘안나 O'의 사례를 통해 ’대화요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생각을 했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거의 없어서 관계에 있어 무척 서툴렀고 그래서 루와의 결별에 그만큼 더 치명적인 영혼의 상처를 입은 니체도, 겉으로는 성공한 의사의 삶을 살고 있는 브로이어도 ’안나 O'에 대한 연정, 아내와의 관계, 의사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한 다른 길에 대한 아쉬움 등으로 마음 속은 이미 환자다. 우여곡절 끝에 니체는 브로이어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치료’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브로이어가 여러 계획을 통해 니체를 ‘치료’하려 들지만, 그런 브로이어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그 뒤 브로이어는 방법을 바꿔서 자기를 니체에게 먼저 드러내고 그의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그렇게 자기의 ‘문제’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니체의 '의지'와 '선택'에 관한 가차없고 냉혹한 지적 앞에 브로이어는 자기 마음속의 괴로운 진실과 대면하게 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브로이어 자신이 ‘치유’를 받는다. 이 소설의 반전이자 클라이막스는 결국 자기가 정말 원했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을 깨달은 브로이어가 만약의 시나리오를 프로이트의 최면 도움으로 실현시켜 본 장면이다. 그것이 최면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뒤통수 맞은 느낌이라니. 어쨌든 최면에서 깨어난 후, 브로이어는 현재의 선택에 더 겸허하게 충실할 수 있게 되었고, 치료라는 명목 아래 숨기고 가렸던 모든 부분을 니체에게 말한다. 니체 역시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고독한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고독의 냉증을 치유받는다. 여기서 니체의 눈물은 그 고독의 얼음이 녹아내린 흔적이다. 다소 갑자기 극적인 변화라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브로이어의 최면 과정에서는 나 자신도 그 장면에 깊이 몰입하여 함께하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내가 걸어온 길을 간접적으로 잠깐이나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 선택들에 대해서.

  실제로 니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있었더라면, 그는 생의 마지막을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마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옮긴이의 말대로, 루 살로메와 안나 O에게도 좀 더 많은 부분 목소리가 부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놀랄만큼 매력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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