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1944년 여름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깊숙이 점령해 들어가고 파시즘을 신봉하던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그때까지 동맹국이던 나치 독일을 향해 급작스레 전쟁을 선포했다, 1945년 1월 소련의 장군 비노그라도프는 스탈린의 이름으로,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
  내 어머니도 오 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   (작가 후기 중)

    역사 속에서 강제수용소에 관해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한 것은 아마도 나치 치하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일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의 영화, 「죽음의 수용소」, 「더 리더」같은 책을 통해서 강제수용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때는 시간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슷한 때이지만, 그 대상은 유태인이 아닌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고 강제수용소는 러시아에 있다. 동성애자 레오가 열 일곱살때 징집되어 오 년 동안 러시아 강제수용소에서 복역한다. 

   작가는 다른 소설들이 흔히 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시점은 레오의 시선에 있고, 시간 순으로 흐르지만 짧은 각개의 장은 '시멘트'나 '화학 성분에 대하여' 처럼 어떤 사물, 사건,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격앙된 감정이나 분노는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담담하게 현재형으로그리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더 실재감을 더한다. 읽으면서 그들의 배고픔, 서서히 박탈되어 가는 소망, 처절함을 서늘하게 함께 느낀다.  읽으면서 가장 아팠던 부분은 '대리형제'였다. 집에서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기뻐서 입천장이 팔딱거렸'던 레오가 어머니가 보낸 (새로 태어난) 동생의 사진과 그 밑 한 줄을 보고 흐느끼던 장면. 그 한 줄에서 어머니는 쓰지 않았지만 레오는 읽어내어 버렸던 말,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 그게 내 입장이야. 집에 입 하나 준 셈 치고."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말이 결국 레오를 지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언어 실험실이다. 숨그네, 심장삽 같은 새로운 단어의 조합, 의인화된 수많은 단어들과 개념들 - 그럼에도 추상적이지 않고 그 의인화가 그 상황을 더 적확하고 날카롭게 드러내어 주는 -, '한방울넘치는행복' 처럼 띄어쓰기를 없애버림으로써 본래 단어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표현하는 것, 수많은 은유가 시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밑줄 그은 단어와 구절이 너무 많아 다 옮기지 못할 정도다. 번역서이지만 입으로 소리내어 굴리고 싶은, 되씹게 만드는 구절들이 많았다. (번역자의 공도 크다 할 것이다)  뮐러는 실제로 수용소에서 복역한 경험이 있는 시인 파스티오르에게서 영감을 받고 이 소설을 집필했는데,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뮐러는 '지시어와 대상 간의 거리'에 대해 고민했고,


....거리를 줄이고자 하는 뮐러의 필사적인 노력과, 언어와 의미에 대한 불신을 음성시와 같은 글쓰기로 표출한 파스티오르의 시적 특성이 만나 태어난 말들이 '숨그네',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감자인간', '양철키스', '볼빵'과 같은 조어들이다. 파스티오르는 수용소가 자신의 언어를 부수었다고 했다. 파스티오르에게 바치는 오마주의 성격을 띤 소설 「숨그네」 안에서, 이 단어들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건축가가 집을 짓듯 머릿속에 수용소를 짓는다.

    "모국어란 피부와 같아서 누군가에게 폄하되거나 심지어 사용을 금지당했을 때 피부에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고 뮐러는 말했다. 얼룩진 역사에 오염된 모국어를 혐오했지만 말년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국어를 보여준 파울 첼란처럼, 뮐러와 파스티오르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상처투성이의 모국어를 복원해냈다. 그 모국어에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떠나온 고향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고향과 과거의 얼굴도 새겨져 있다. 「숨그네」 는 독재치하 루마니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이 그 파국과 관련되어 있는 나라 독일로 이주한 작가 헤르타 뮐러가 쏟아내는 말의 축제다. 말들의 축제 속에서 복원되는 수용소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감당할 것인가는 우리의 과제다.


이 부분을 보면서 문득 우리말의 사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약간 씁쓸해졌다. 우리말은 제대로 풍부하게 사용되고 사용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을까. 이 영어 광풍의 시대에 우리말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함께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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