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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엄마 안녕 유럽 - 엄마가 떠나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김인숙 지음, 강영규 사진 / 한빛라이프 / 2016년 6월
평점 :
'엄마가 떠나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김인숙, <안녕 엄마 안녕 유럽> 리뷰
© 네이버 책 정보
"너희는 절대로 내 맘 모르지.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린 느낌이야..."
엄마의 이혼은 별다른 계획없이 어느 날 진행되었다. 어쩌면 그냥 터질 게 터진 거였다는 말이 더 걸맞는 것 같았다. 나는 스무 살씩이나 되어서도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는 아버지 앞에서 무력했고, 또 그 앞에서 그저 무섭기만 했다. 고래고래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가 나는 부엌 근처에서, 나는 그냥 문 뒤에 숨어 숨죽여 울 뿐이었다. 하루는 이러다 엄마한테 병이 나겠다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보다 무서운 건 그런 아버지를 견뎌내느라 엄마한테 또다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그 때는 그랬다.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그렇고 온통 나는 나만 생각하기 바빴던 것이다.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있기보다는 거리에 나앉더라도 이것보단 마음이 편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왔다. 막상 나오니 홀가분한 동시에,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가 근처 원룸 오피스텔에 자리 잡았다. 잠시만 있자, 라는 생각으로 일 년을 있었다. 일 년 남짓한 시간동안 엄마의 이혼을 옆에서 보고 도우며 들던 생각은, 생각만큼 아버지와 헤어져도 별 일이 없다는 것. 남들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그다지 보고싶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긴 시간을 홀로('홀로'라는 말이 지금에 와서 보니 가장 정확하다) 견뎌온 엄마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쓸데없이 잘 울었던' 내 말을 엄마는 언제나 잘 들어주었는데, 나는 스무 해를 지나 겨우 일 년 여의 시간도 채 못 견딜 만큼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고통스럽다고 느꼈던 것이다. 딸이랍시고 있는 게 그거 하나 듣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 갑자기 비가 내리고 날이 어두워졌다. 결국 숙소로 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투두둑투두둑.
비는 더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고, 나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몽땅 젖었다.
겨우 숙소에 도착하자 안내데스크 직원이 물었다.
"Are you okay?"
(...)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몸이 여기저기 터지는데도 몰랐던 사람이다.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
p. 32
웃긴 건 지금도 엄마가 예전 이야기를 하면(예전이라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다) 재빨리 다른 화제로 돌리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고통을 모른 척 하고 싶어한다. 정말 못된 딸이다. 언젠가 엄마가 빨리 힘든 일은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길 바란다고 절에서 빈 적이 있다.
이제 생각하니 다 거짓말이다. 그저 내가 잊고, 모른 척 지나가고 싶었을 뿐인 것을.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괜스레 죄책감이 들기 때문일까.
" 어느 날, 엄마는 아빠의 옷을 장롱에서 한 아름 꺼내고는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자다 일어나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옷을 자르면서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흐느꼈다.
(...)
엄마가 떠난 후로 나는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휴지를 찢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가 가위로 옷을 자르듯 나는 휴지를 조각냈다.
하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휴지를 찢지 않았다. 내게 밴 버릇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
p.136
엄마가 떠나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김인숙의 <안녕 엄마 안녕 유럽>은 암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필자가 유럽 여행을 시작하며 엄마와의 이야기를 담아낸 여행에세이집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엄마의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며 필자는 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엄마라는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같은 마음에 시작한 여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뒤로하고 떠난 여행의 순간 순간에 엄마의 존재와 그 크기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엄마의 행동과 말들.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소중했던 순간들이 언제나 있다.
" 어릴 때 손빨래하던 엄마 옆을 지키다가 빨랫감을 보고는 "엄마는 왜 구멍 난 팬티를 입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가 뒤돌아 있었기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커가면서 철없던 질문이란 걸 깨달은 후 그날 일이 줄곧 마음에 남았다.
매일 가계부를 적던 엄마의 모습, 엄마가 젊었을 때 입었을 게 분명한 유행 지난 옷들이 가득한 옷장, 고무줄 늘어난 팬티가 곱게 개어 있던 서랍장, 반짝이던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떠올릴 때면 그날이 항상 생각났고 그래서 미안했다. "
p. 200
© 알라딘 제공. 한빛라이프
* 덧붙임.
페이지 곳곳에는 강영규 사진 작가가 찍은 유럽의 사진들이 함께 곁들여 있다.
책 사이즈가 조금 작은 편이라 그런지 페이지 별 사진이 작아 조금 아쉽다.
엄마에 대한 책은 사도 사도 아까운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