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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자매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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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기억났다. 나와 언니 둘 중 하나는 악마다.”


‘나’가 악마면 악마고 ‘언니’가 악마면 악마지 ‘나’와 ‘언니’ 둘 중 하나가 악마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가 되찾은 기억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럴까?
띠지에 있는 이 문구를 보고 소설에 구미가 당겼다.

<마쉬왕의 딸>의 작가 카렌 디온느의 신작 <사악한 자매>는 사이코패스 딸이 있는 엄마 제니와 사이코패스 언니를 둔 레이첼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먼저 정신병원에 있는 레이첼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알려준다.

스물여섯 살 레이첼 커닝햄은 스스로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세상에는 레이첼의 아빠 피터가 레이첼의 엄마 제니를 총으로 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엄마를 쏜 것은 자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쓰러진 어머니 앞에 라이플(총)을 들고 서 있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정신병원에서 15년째 지내던 중 정신병원에서 만나 친구가 된 스코티의 남동생이자 기자 지망생인 트레버가 레이첼이 겪었던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취재를 하고 싶어 했고, 그 과정에서 레이첼은 트레버가 건넨 사건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이 엄마를 죽인 범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제니의 시점이 전개되는 시간은 과거로, 총기 사건 한참 전부터 시작된다.
처음에 제니는 남편 피터 그리고 딸 다이애나와 함께 도시에서 살았지만, 어느 날 이웃집 아이 윌리엄이 제니네 집 수영장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 이후 숲 속에 외따로 있는 피터네 집안 별장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집 수영장에 빠져 죽은 기억이 끔찍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이애나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윌리엄이 수영장에 빠졌을 때 집 안에 있었다고 했지만, 제니는 다이애나의 옷이 젖어 있는 걸 발견했었다.


“다이애나, 아가, 왜 동생 얼굴을 베개로 눌렀어? 그러면 아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몰랐어? 숨이 멎을 수도 있었다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는 아기가 숨이 멎을 때가 좋거든. 얼굴색이 변하잖아.”
“얼굴색.... 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p.116


우리는 제니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이의 고집으로만 볼 수 없는 폭력성과 아이의 순진함으로 넘길 수 없는 잔인함이 다이애나에게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제니도 딸 다이애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다이애나가 낙인 찍히는 것이 싫어서 남편 피터 외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이애나의 이상을 숨겼으며 사람과 접촉이 드문 숲 속으로 숨어 들다시피 한 것이다.

레이첼은 15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미래를 포기하고 지내며 자신에게 있었을 수많은 가능성을 뒤로 한 것에 분노했지만, 탓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래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을 나와 현재는 자신과 9살 나이차가 있는 언니 다이애나와 이모 샬럿이 살고 있는, 자신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부모님이 죽은 끔찍한 기억을 만든 숲 속 별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찾아간 별장에서 언니 다이애나의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는데...


나는 라이플을 들고 어머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검시관은 딸이 라이플을 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나는 살인자인가, 아닌가.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곳으로, 가장 행복하고도 가장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p.42


곰과 큰까마귀 등 야생 동물이 사는 숲 속 외딴 곳에 위치하며, 그 어두운 내부에는 여러 개의 총기와 수많은 박제 동물이 있고, 거주하는 사람 수에 비해 방 개수가 많아서 누가 몰래 숨어들어 살아도 눈치 채기 힘들 정도라는 거대한 별장은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레이첼의 시점과 제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퍼즐 조각을 하나씩 놓듯 전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만약 내가 딸이 사이코패스인 다이애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무려 15년 간 정신병원에서 보낸 뒤에서야 자신의 믿음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레이첼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읽으니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파지는 소설이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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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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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프랑스어는 한국어와 달리 단어에 성별이 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원제 Flaneuse(플라뇌즈)는 ‘산보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남성 명사 Flaneur(플라뇌르)를 여성형으로 바꾼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가 모국어인 저자 로런 엘킨이 자신의 책 제목으로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은 파리를 걸으며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프랑스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수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 (...) 플라뇌르는 남성적 특권과 여유를 지닌 인물형이다. 시간도 있고 돈도 있으나 당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없는 사람. 플라뇌르는 도시 다른 거주민들은 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도시를 이해한다. 플라뇌르는 도시를 발로 머릿속에 담았다. 길모퉁이, 골목, 계단 하나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몽상을 머리에 떠올린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누가 이곳을 지나갔나? 이 장소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p.18”


걷는 것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지금과 달리 19세기 여성들에게 혼자 집 밖으로 나가 걷는다는 것은 오명을 쓸 위험이 있었다.
저자는 과거 여성들이 걷던 도시를 걸으며 진 리스,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소피 칼, 마사 겔혼과 같은 인물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나는 저자의 글을 따라 파리, 런던, 베네치아 등 내가 가보지 못한 여러 도시들을 걸어보고, 그곳을 앞서 걸었던 여성들에 대해 알게 된다.
도시를 걷는다는 일상적인 행위를 저자 로런 엘킨은 매력적으로 풀어냈다.


“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공간은 페미니즘의 이슈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 여기 도시의 공간은 끝없이 다시 만들어지고 해체되고 구성되고 경탄의 대상이 된다. “공간은 의심이다.” 라고 조르주 페렉이 말했다. “나는 끝없이 공간을 표시하고 표기해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고 나에게 주어지지도 않고 내가 정복해야만 한다.”

테헤란이든 뉴욕이든, 멜번이든 뭄바이든, 여자는 여전히 남자와 같은 방식으로 걸을 수 없다.

p.421“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여성들 역시 걷는 자유를 누리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생각했다.
거리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더 위협적인데, 보통 사람들이 여성 인권에 있어서 깨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선진국에서조차도 그렇다.
예전에 한 여성이 길을 걸으며 찍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영상 속 그 여성이 걸을 때 사방에서 희롱하고 지분거리는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영상에서 본 행동은 해외에서 흔히 일어나는 ‘캣콜링’이라고 했는데,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그 외에도 수많은 캣콜링 영상이 올라와 있다.

이는 비단 거리를 걷는 것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과거 여성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걸었던 여성들을 잊지 않고 우리도 우리 뒤를 걸을 여성들을 떠올리며 걸어나가야 한다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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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도시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 공학으로 읽고 예술로 보는 세계의 다리 건축 도감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에드워드 데니슨.이언 스튜어트 지음, 박지웅 옮김 / 보누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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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차를 타고 긴 다리를 건널 때면 다리 무게만으로도 엄청날 거라고 추정되는 거대한 다리 위에 이렇게 많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데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후에 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리에는 과학적 원리가 적용되어 있어서 내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역시 자세한 건 몰랐기 때문에 다리에 적용된 원리에 대해서 더 알게 되면 그런 불안을 떨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위대한 도시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는 구성이 탄탄하다.

1부 <다리의 이해>에서는 다리의 재료부터 알려준 다음, 구조와 목적에 따라 다리의 종류를 나눠 설명하고, 유명 다리 설계자를 소개하며 다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나는 예스러운 다리로는 아름다운 아치교를, 현대적인 다리로는 현수교를 떠올렸는데, 이번에 아치교와 현수교에 적용된 원리를 알게 되었고, 여러 줄의 케이블이 눈에 띄는 외관 때문에 같은 종류로 여겼던 현수교와 사장교의 차이점도 알게 되었다.
(처음 본 사장교와 익숙한 이름의 현수교는 케이블을 사용하는 원리는 같지만 현수교의 케이블은 하나로 이어지고 사장교의 케이블은 서로 분리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책에 소개된 다리 설계자는 그 분야에서 유명하다지만 내가 이름을 들어본 설계자는 구스타브 에펠이 유일했다.
‘에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의 그 에펠이 맞는데, 에펠탑을 설계하고 건축한 구스타브 에펠은 다리도 설계하고 미국 자유의 여신 내부 골조도 설계한 인물이라는 걸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2부 <위대한 도시의 아름다운 다리>는 세계 곳곳의다양한 다리를 소개하는 부분으로, 1부를 읽고 나니2부에 등장하는 다리의 사진을 보고 어떤 다리인지 짐작하기도 하고 다리에 대해 읽을 때도 이해가 한층 잘 되는 것을 느끼며 1부를 허투로 읽은 것이 아니구나, 저자들이 이 책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구나 깨달았다.

책을 읽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처럼 거대한 다리나, 장관 속 보기만 해도 아찔한 다리나, 움직이는 다리나, 다리 위에 가게와 집이 있는 주상복합 다리 등 다양한 다리를 볼 수 있었는데, 이 책의 최대 장점인 풍부한 사진과 그림 자료를 활용해 다리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다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다리에 적용된 원리뿐만 아니라 다리의 아름다움까지 눈에 담으며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일상 생활에서 자주 쓰이지는 않는 용어들 때문에 초반에는 이 책이 어려워 보였는데, 책 말미에 있는 용어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나가니 점차 용어에 적응이 되었고, 관련 지식이 쌓일수록 처음보다 읽는 게 수월해졌다.
책을 읽을 때 풍부한 사진/그림 자료와 함께, 나에게는 낯선 용어가 정리되어 있는 용어 사전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다만 용어 사전은 책 말미에 철자 순으로 정렬되어 있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책장을 넘겨서 단어를 찾는 게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각 페이지에 일일이 각주를 달았다면 자리를 많이 차지했을 것이고, 이런 점을 고려해서 용어 사전을 수록한 게 아닐까 생각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을수록 자연스럽게 조금씩 용어를 익히게 되니 용어 사전을 찾아보는 것에 대한 번거로움이 줄어들기도 했고.

다리는 오래 전부터 인류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으며, 교통과 운송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효율적으로 사람과 그밖의 것들을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크고 작은 다리가 우리 생활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 나는 다리를 건널 때에도 다리보다 다리 너머의 풍경에 더 관심을 가졌는데, 다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책의 원제인 <How to Read Bridges>처럼 (전문가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다리를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철로 만들어지고 구조가 다 드러나 투박해 보이기만 했던 다리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다리를 건너면서 그 너머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지 않을 것이다.


“ (...) 도심 한복판에 있는 다리부터 가장 외딴 협곡에 설치된 다리까지, 모든 다리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단지 보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p.5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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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 지음, 문승준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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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과 비슷한 영화 <러브레터>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는 소설도 쓰는데, <러브레터>도 소설로 먼저 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 <라스트 레터>도 이와이 슌지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러브레터> 속 하얗게 눈이 내린 배경에 담긴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감성을 생각하면 그의 소설은 어떨지 궁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설 <러브레터>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라스트 레터>는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라스트 레터>는 <러브레터>와 비슷하게 한 사람의 죽음과 편지가 주요 소재이고, 화자 오토사카 교시로가 줄곧 ‘너’라고 부르는 도노 미사키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소설로 가장해서 쓰였다.

어느 날 중년의 오토사카 교시로는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옛사랑 도노 미사키인 척하는 미사키의 동생 유리를 보게 된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나 지나서인지 다른 동창들은 미사키가 아닌 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오토사카 교시로는 그녀가 미사키가 아닌 동생 유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미사키인 척하고 나타난 유리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장단을 맞춰주며 유리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고, 이후에 그 연락처로 보낸 문자를 유리의 남편이 보고 분노 조절을 못 해서 유리의 휴대전화는 박살이 나고 만다.
이게 손가락으로 몇 번 누르면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세상에서 유리가 (여전히 미사키인 척하며) 교시로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유리가 주소를 밝히지 않아 일방적으로 교시로가 편지를 받아보기만 하다가 교시로가 미사키의 본가 주소를 찾아 답장을 보냈고 그 편지는 교시로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읽게 되는데...


“ (...) 네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네가 온다면. 그곳에 네가 있다면. (...)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상심 또한 오래전에 치유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건 마법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너를 만난다면 과연 너는 네가 나에게 건 이 마법을 풀어줄까?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24년 만에 나를 만남으로써 내 스스로 결판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p.33“


계속해서 언니 미사키인 척 연기를 하는 유리를 보고 당사자인 교시로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그 이유가무척 궁금했고, 나도 소설을 읽으면서 유리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가 궁금해서 나름대로 추리를 하며 소설을 읽었다.
아마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도노 미사키의 죽음 이후 주변인들이 어떻게 그녀의 죽음을 극복하는지가 그려지는 잔잔한 이야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전에 했던 예상과는 달랐던 점이 하나 더 있다.
겨울에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나는 것처럼 여름이면 <라스트 레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소설이 여름 느낌을 물씬 담아냈을 줄 알았는데 여름에 읽으면서도 소설에서 여름의 흔적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글보다는 영상이 계절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더욱 잘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이 여름 축제에 가거나 여름이어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문장 정도만 있을 뿐 묘사가 풍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고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 나도 이 소설은 빠른 속도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 우리의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수없이 많은 인생의 선택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있는 졸업생 한 명 한 명은 지금까지처럼, 그리고 앞으로
그 누구와도 다른 인생을 걸어갈 겁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괴로울 때, 살아가기 힘들 때
우리는 몇 번이나 이 장소를 떠올릴 겁니다.
자신의 꿈이나 가능성이 아직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이 장소를.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귀하게 빛나던 이 장소를.

졸업생 대표 도노 미사키

p.247”


이와이 슌지 감독이 썼고 영화 <러브레터>와 제목이나 소재가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으로 읽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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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 - 2,000살 넘은 나무가 알려준 지혜
레이첼 서스만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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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지고 싶은 책을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조금씩 구매해나간다.
산 책 중에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있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장바구니에 담긴 책 중에 아직 구매하지 못한 책이 많은데, 그래서 구매하기 전에 장바구니 안에서 절판을 맞이한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얼마 전에도 장바구니 안에 넣어둔 책 한 권 아래에 빨간 글씨로 품절(절판) 표시가 되어 아뿔싸! 했는데, 그 책은 나보다 지구상에서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들에 관한 책 <위대한 생존>이었다.
그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 갑자기 절판되어 여기저기 문의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후회하고도 또 같은 일을 겪게 되다니!
나라는 인간은 후회할 일을 또 반복하는구나 자책하기도 하고 그나마 <위대한 생존>은 가격이 두 배가 넘더라도 원서를 구할 수는 있지 않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위대한 생존>이 <나무의 말>이라는 새로운 제목과 다른 판형으로 개정되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체적인 책 디자인과 제목이 바뀌면서 책 이미지 또한 많이 바뀌었지만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같은 책으로 또 같은 후회를 하지는 말자며 이번에는 얼른 손에 넣은 <나무의 말>은 저자 레이첼 서스만이 10년간 여러 대륙을 거쳐 2,000년 이상 산 고령 생물로 추정되는, 그러니까 기원전에 태어난 단일 단위 개체와 무성 번식 군락 생물을 찾아 떠난 여정을 담고 있다.
그 여정을 책으로 읽으며 함께 하면서 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는 꿈꾸기 힘든 세월을 산 나무를 보며 생명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환경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저자는 시베리아와 남극 그리고 바다 아래까지 잠수해 들어가서 고령의 생물을 찾아 사진을 남겼다.
사진으로 적게는 수천 년부터 많게는 수십만 년까지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생물을 만나면서 내가 가진 선입견을 마주했다.
나는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산 식물이라고 하면 책 표지에 등장하는 3천 살의 올리브나무나 책 속 2천 살의 바오밥나무처럼 두꺼운 줄기를 가진 큰 나무를 떠올렸는데 고령의 식물로는 바닷속 뇌산호와 해초도 있고, 심지어 2,500년에서 5,500년을 산 이끼들도 있었던 것이다.
무려 10만 년을 산 것으로 추정되는 해초는 거대한 나무보다도 오래 살았다.
겉보기에는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엮인 덤불이나, 방치되어 아무렇게나 자란 화초처럼 보이는 식물도, 나이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끼도 인간의 수명에 비해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였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부끄러워졌다.


“굉장히 긴 수명을 가진 생물들은 우리가 영원이라는 거짓 감각을 믿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변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장기적인 생각 없이 현실의 일상에 쉽게 파묻혀버린다. 하지만 오래 살았다고 해서 불멸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가 있다 해도 그 기회가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접근하기 쉬워 보이고 긴급해 보이지 않았기에 상원의원 나무를 재방문하는 것은 내 우선 순위에서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p.111”


또한 그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온 나무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보고, 연로한 바오밥나무가 술집으로 쓰이는 것을 보고 나도 저자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상원의원 나무로 불리는 3,500년을 산 폰드 사이프러스 나무의 마지막은 마음이 좋지 않다못해 허무하기까지 했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일주일이나 불에 타서 죽은 상원의원 나무는 지역 프로그램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필로폰에 취한 젊은이가 속이 비어있는 나무 몸통에 몰래 들어갔다가 불을 낸 것 같다고 했다.
3,500년을 산 나무가 저런 인간의 생각 없는 행동 때문에 사라지다니, 그 허무한 죽음에 엄청난 숫자의 세월 앞에서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게 된다.

<나무의 말>은 책 제목과는 달리 나무만 나오는 것은 아닌데, 책에서 소개되는 생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생물은 나무가 아니라 시베리아 방선균(시베리아 박테리아)로 40만에서 60만 살로 추정된다.
실험실 연구 결과 시베리아 방선균은 다른 고대 박테리아처럼 활동 정지되어 동결된 게 아니라 영하의 온도에서도 50만 년 동안 살아있는 상태로 천천히 생장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저자는 현미경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촬영해서 사진으로 남겼다.

책을 읽으며 바오밥나무처럼 웅장한 나무부터 파슬리와 친척이며 전체적으로 보면 동글동글한 모양을 한 야레타까지 (저래봬도 3천 살이다) 여러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슬프게도 5년 사이 책에 등장한 생물 중 둘이나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지 몇 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생명을 잃은 생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수명에 대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생각하면 이 책에 실린 생물종이 더 귀중하고 보호해야 할 생물로 여겨진다. 우리를 보모 벌레처럼 느끼게 해주는 수천 살이 된 생물을 보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하지만 1만 3,000살의 파머 참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유대를 깨닫는 것, 그리고 어떻게 파머 참나무와 우리가 이토록 다른 삶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더욱 굉장한 경험이다.

p.23”


직접 읽어보니 역시 좋은 책이었기에 이렇게 다시 출간된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진 자료가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책의 판형이 바뀐 게 아쉬웠다.
양장본을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은 뒤로 하더라도, <위대한 생존>의 책소개와 후기를 보니 그 책은 크기가 좀 더 커서 <나무의 말>처럼 두 페이지에 걸쳐 사진을 수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두 페이지에 걸친 사진은 커서 좋지만 작은 사진에 비해 사진의 단점이 좀 더 잘 보이고 사진 중간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양장본에서 반양장본으로 개정되고 책 크기가 줄어들면서 책 무게도 가격도 좀 더 가벼워졌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장하며 두고두고 볼 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부분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책 속 나무들이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 책도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무와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가 너무 깊지만 않다면 치유될 수 있으며 실제로 치유된다는 점이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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