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하늘·땅·자연·몸에 관한 2천 년의 합리적 지혜
신동원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2월
평점 :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우리나라의 과학과 의학 기술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선진국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할 만큼 인정 받고 있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과학과 의학 기술에 대해 생각하면 나만해도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전통 의학에서 비롯된 한의학은 과학적이지 않고 양의학(서양 의학)만 못하다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말이다.
나는 과거 우리나라의 과학문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리 과학문명의 역사를 폭넓게 다룬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를 손에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 니담 동아시아과학사연구소 방문연구원을 지낸 뒤 현재는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이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문화재위원,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대한의사학회장, 국제동아시아과학사학회 공동 조직위원장 경험도 있고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이렇게 이력을 보면 저자가 한국과학문명사 분야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책 내용에 신뢰가 갔고, 또 편향된 사관을 피하고자 결이 다른 여러 선행 학자의 연구를 참고하고 가능한 한 당대사람의 시각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과학문명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니 어렵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테고, 미주와 참고문헌을 제외해도 845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보고 책을 펼치기 전부터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경험자로서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책을 펼쳐서 본문을 몇 장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은 친절한 교수님이 조곤조곤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문체로 쓰였기 때문에 보통 역사책 하면 떠올리는 것처럼 딱딱하지가 않다.
그리고 한국과학문명사에서 중요하고 흥미로운 부분을 쏙쏙 골라잡아 폭넓게 다루어서 지루하기는커녕 사진과 그림 자료를 함께 보며 읽다보면 어느새 수십 페이지가 넘어가 있을 것이다.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책 말미에 있는 참고문헌을 찾아 읽어보면 된다)
또 본문은 천문학과 수학을 다룬 1부 하늘, 지도와 지리 그리고 광물을 다룬 2부 땅, 농사를 비롯한 생활 그리고 동식물과 곤충에 대해 다룬 3부 자연, 우리의 전통 의학을 다룬 4부 몸, 금속활자와 훈민정음 등 과거 우리 기술의 결정체를 만날 수 있는 5부 기술과 발명, 서양 문물을 마주하고부터 일제강점기 시기의 과학기술까지 다룬 6부 한국 근현대 과학사, 이렇게 주제별로 나뉘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폭넓은 한국과학문명사가 착착 정리된다.
무엇보다 한국과학문명사는 그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흥미롭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서 하나하나 말하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역사 속 여성에 관심이 있는 나는 드라마 <대장금>으로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의 여성 전문 의료인인 의녀를 다룬 부분도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유교 이념을 따르던 조선에서는 남녀유별 의식이 팽배했기에 궁중과 양반집 여성의 의료를 담당하는 의녀가 존재했는데, 각 지역의 어린 여종 중에 뽑인 아이들이 십대 초중반 나이에 혜민서에 입학해서 치열한 경쟁 끝에 의녀가 될 수 있었고, 그 중 장금은 중종을 간병하고 어의와 함께 약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의녀였다.
의녀는 여성이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던 유교 사상의 시대에 전문적인 일을 하는 여성이었기에 더 특별하게 보였다.
그리고 백신이 나왔지만 코로나19라는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아직 종식되지 않은 만큼 옛사람들의 전염병 대처 방법도 기억에 남는다.
조선 시대에는 돌림병이 몇 해에 한 번씩은 있을 정도로 잦았다는데, 마을에 돌림병이 돌면 우리 조상들은 산 너머 다른 마을에 있는 친척집에서 지내거나 산속에서 생활하며 돌림병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고 한다.
1920년에 콜레라가 생겨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 책에 실려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며 그 이전의 모습도 상상해보았다.
물론 천연두를 치료한 그 유명한 허준과 같이 돌림병에 맞서 이겨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워 할 내용은 바로 조선시대 법의학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시체에 남아 있는 단서를 과학적으로 풀어내 살인범을 잡는 CSI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는 법의학은 원통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의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법의학 전통은 고려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조선 세종 때에 본격적인 기록이 있는데,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이 당시에 법의학 지식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때는 사또가 수사 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사또는 <무원록> 내용을 통달해야 했다.
물론 시체를 검사하는 직책은 오작인이라고 따로 있었는데, 오작인은 시체에 식초나 술지게미를 바르고 물로 닦아내어 상흔이 드러나게 했다.
(...) 이런 단계를 거쳐, 살인 사건이 난 고을의 수령은 수사관이 되어 몸에 난 흔적을 근거로 어떻게 살해되었는가를 밝히게 됩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병으로 죽었는가 독살인가, 왼손잡이한테 칼을 맞았는가 오른손잡이에게 칼을 맞았는가, 물에 빠져 죽었는가 다른 방식으로 죽인 후 물에 빠뜨려 익사를 꾸민 것인가 등을 알아냈죠. 꽤 과학적이죠? 조선시대에 실제로 이렇게 수사가 이루어졌습니다.
p.488
그리고 독약을 먹여 죽였을 경우에는 은수저나 은비녀를 시체의 목구멍에 찔러 넣어 색깔 변화를 확인했다는데, 지금도 잘 알려졌다시피 독에 있는 비소와 황이 은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은이 검게 변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또 <신주무원록>에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초동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주무원록>에는 피가 섞인 형제나 부모자식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각자 피를 뽑아 한 그릇에 떨어뜨렸을 때 피가 섞인 자들이라면 피가 섞이고 아니면 섞이지 않을 것이라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밥상에서 중간중간 입가심이 되어주는 시원하고 아삭한 김치처럼 곳곳에 배치된 이야기를 또 빠뜨릴 수 없는데, 나는 <단군신화> 속 쑥과 마늘에 대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동굴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 이야기를 알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늘을 많이 먹기로 유명해서 온라인에서 그에 대한 재미있는 사진이 돌아다니기도 할 정도고, 나도 마늘을 많이 먹는 편이어서 정말 마늘 먹고 사람 된 웅녀의 자손답다고 웃고는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마늘은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마늘이 아니었다!
식물의 역사에서는 달래와 마늘을 모두 ‘산’이라고 했는데, 달래는 작아서 소산이라 하고 마늘은 커서 대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늘과 달래는 명칭이 헷갈리기 짝이 없었던 데다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기원전 2333년에는 우리 땅에 마늘이 없었기 때문에 신화 속 ‘산’은 마늘이 아니라 달래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에게 주어진 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쑥이 맞지만, 다른 하나의 정체는 마늘이 아니라 달래 혹은 산마늘이었다.
<단군신화>를 떠올릴 때마다 빈속에 마늘을 그렇게 먹으면 사람이 되기 한참 전에 속 다 뒤집어지겠다 싶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환웅은 그렇게 잔인한 신은 아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내용이 술술 넘어가는 글로 적혀있으니, 읽다보면 어느새 책장이 훌쩍 넘어가 있어서 일명 벽돌책이라고 불리는 두께임에도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를 읽는 시시간은 비어있는 지식의 곳간을 채우고 우리 역사 속 과학문명에 대한 애정을 쌓는 시간이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