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수호지 1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08명 양산박의 좌충우돌 영웅담을 담고 있는 이 수호지는 조금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로 나름의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중국 4대기서(삼국지, 서유기, 금병매, 수호지) 중 하나요, 삼국지 초한지 열국지같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중국고전 중에 하나다. 물론 강호는 이중 수호지를 제일로 좋아하고 또 많이 읽어왔다고 밝힌바 있는데, 그것은 이 속에서 그 어떤 강호의 세계를 맛보며 쏠라닥질같은 인간사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전략 만화 삼국지'로 유명한 '요코야마 미쯔데루'의 만화 수호지 6권짜리를 켈렉하며 짬이 나는대로 틈틈히 만화 수호지를 읽고 있다. 이에 각 권마다 내용 정리는 물론, 매 책마다 뒷편에 수호지에 대한 역사, 인물, 문화 등 읽을거리가 있어 그것도 같이 정리해 보는 일환으로 삼는다. 먼저 1권의 간단한 내용은 이렇다. 어느 정도 '수호지'를 안다는 가정하에 주요 인물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며 이야기가 전개됐는지 위주로 쓴다.



때는 11세기 초 송나라시대, 역병이 창궐하여 온 나라가 힘들어할 때 인종황제는 사자를 시켜 용호산에 있는 선인에게 전염병을 물리칠 기도를 부탁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이 정신나간 관리가 용호산 기슭의 절에 찾아와 호기심으로 악마가 갇혀 있다는 '복마전'을 열고 만다. 그러면서 그 안에 갇힌 악마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서 수호지는 시작된다. 바로 악마는 108명의 영웅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인종->영종->신종->철종->휘종 황제까지 왔다. 바로 본격적인 수호지의 바탕이 되는 북송의 휘종황제 시절이다. 그 휘종황제의 총애를 받은 놈은 축국 한번 잘해서 출세한 그 유명한 '고구', 전수부 태위로써 군부의 최고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면서 멀쩡히 잘 지내던 금군의 사범 '왕진"이 쫓겨나고, 그 왕진이 어머니와 도망치는 과정에서 아홉마리 용문신을 한 '구문룡 사진'을 만나 무술을 가르쳐주고, 홀연히 떠난다.

그러면서 구문룡 사진은 산적 패거리였던 주무 진달 양춘과 한바탕 싸우는 과정에서 간담상조하고, 관군이 몰아닥치자 일단 해치우고 홀로 길을 떠난다. 그러면서 수호지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인 '노지심'이 나온다. 노지심은 원래 법명이고, 군인 헌병을 뜻하는 제할로 이름은 '노달'이었다. 그런 그가 사진과 만나 친해지고, 어렵게 길거리 가무를 하던 부녀를 도와주게 되다 그들을 괴롭힌 사람을 죽이면서 노달도 도피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된 노지심, 채소밭이나 가꾸라는 일상의 무료함에 '표자두 임충'을 만나며 친해진 두 사람, 그런데 임충도 왕진과 마찬가지로 고구 아니 고구의 아들에게 시달린다. 급기야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면서 옥고를 치르게 된 임충, 저기 어디 먼 곳으로 길을 떠나면서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그때 노지심이 도와주며 위기를 벗어난다.

'소선풍 시진'의 따뜻한 배려로 안도하게 된 임충은 그의 소개로 양산박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의 수령이 사람 하나 죽이면 인정한다는 소리에 차마 일반인은 못 죽이고 칼찬 무사 '청면수 양지'를 만나 용호상박의 대결을 갖고 둘은 간담상조한다. 양산박에 같이 머물기를 바랬지만, 양지는 고구 밑에서 친위대 장교였던 몸, 더군다나 풍랑으로 황제의 일처리를 못해 쫓겨날 판이지만 우선 보고를 하러 갔다가 결국 쫓겨난다. 소위 무사 집안의 체면이 말이 아닌 양지는 길거리에서 칼을 파는 행상을 하다가 급기야 사람을 죽이고 다시 길을 떠나는데... 바로 여기까지가 요코야마 미쯔데루 수호지 1편의 이야기다. 다음 2편도 기대 바라며, 그렇다면 1편 부록의 내용을 또한 정리해 본다.

1. 수호지란 무엇이며 무슨 이야기인가?

먼저 수호지는 14세기 중반, 원말명초 무렵에 집대성된 장편소설로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와 함께 중국 4대기서로 꼽는 작품으로 작가는 '시내암'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시내암의 원작을 삼국지연의 나관중이 손질한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시내암은 강소성 사람으로, 원말의 군웅 중 한 명인 장사성의 수하였던 적이 있어 <수호지>에는 그때의 경험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장사성'이라는 인물은 원말 강소성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켜 원 왕조에 저항, 원나라 멸망 후에는 명 태조 주원장과 싸워 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를 집대성한 나관중은 원곡(원대에 형성된 가극)의 작가로서 삼국지연의가 칠실삼허(七實三虛), 즉 70%의 사실과 30%의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정도로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활용한 역사소설인데  반하여,

<수호지>는 북송말(11세기 초)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작중에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 이 이야기는 송나라 말기 휘종 황제(재위 1100~1125) 시절에 호숫가의 요새란 뜻으로 수호채라 불리던 산동 양산박에 모인 108명 호걸들의 이야기로 그 108명 호걸들의 수령은 바로 그 유명한 '급시우 송강(宋江)'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108명의 등장인물 중 이 송강이라는 인물의 이름만이 역사서에 남아 있으니, 북송·남송 양대의 정사인 『송사宋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2. 수호지 인물 중 수령 '송강'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휘종본기 : 선화(宣和) 3년(1121) 2월, 그때까지 회하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강 등 도적(기아농민을 주축으로 한 봉기집단)들이 회하 북쪽으로 진출하였기에 장군을 파견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송강 등이 거듭 북으로는 도성(하남성 개봉시)의 동쪽에, 남으로는 장강 북안에까지 출몰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는 동지나해 연해지방으로 나와 초주(강소성 회안시)를 넘어 해주(강소성 연운항시)에 침입하였으므로 해주 지사 장숙야에게 명하여 투항을 권고하였다.

후몽전 : 송강이 도성의 동쪽에 진출했을 때 후몽(侯蒙)은 상주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방책을 올렸다. "송강은 36인 간부집단을 거느리고 산동 서부, 강소 북부 일대를 어지럽히는데 관군 수만을 동원해도 막아내기 힘든 형세입니다. 송강은 뛰어난 지휘관인 것으로 보이니 그에게 투항을 권고하여 그 죄를 용서한 뒤, 강남의 청계(절강성 순안시)을 점거하고 있는 방랍(方臘)을 토벌하게 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황제께서는 "후몽은 일개 지방관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잊지 않는 충신이로다" 라고 말씀하시고 동평부 지사로 임명하였으나 부임 도중에 병사하였다.

장숙야전 : 송강은 하북에서 봉기하여 10군을 어지럽혔다. 각지의 관군은 싸우려 하지 않고 도망했다. 장숙야가 적군이 접근한다는 말을 듣고 탐색대를 보내 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적군은 해안으로 직행하여 정박 중이던 상선 10여 척을 탈취해 각지에서 빼앗아온 물품을 실으려 하였다. 장숙야가 결사대를 모집하였더니 천여 명이나 모였으므로 새로이 성 밖에 복병을 배치하고 소수의 부대를 해안으로 보내 도적들을 유인한 뒤 적군이 배에서 떨어진 틈을 타 배에 불을 붙였다. 배를 읽은 적군이 허둥거리고 있을 때 복병이 포위하고 부장을 사로잡자 송강도 어쩔 수 없이 항복하였다.

이렇게 위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북송말에 송강 이하 36인의 동료가 각각 수하를 거느리고 산동에서 강소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전전하면서 관군이 싸우지 않고 도망친 지방 도시들을 습격해 약탈하였지만 산동에서 장숙야의 계책에 빠져 항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전에 후몽이 송강에게 투항을 권고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다른 지방의 반란군 토벌에 동원하자는 상주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방랍의 난은 선화 2년 (1120) 100만 명 농민들이 악정에 항거하고자 결기하여 강남의 6주 52현을 점거했던, 진압까지 2년가량이 걸린 대사건으로서 송강은 같은 시기에 산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송은 이로부터 머지않은 1127년, 남하해온 여진족 국가 금(金)에 의해 수도인 개봉을 점령당하고, 휘종, 흠종 부자가 북쪽으로 연행되면서 일단 멸망한다. 바로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정강의 변'이라 하며, 이때 지방에 있어 난을 피한 흠종의 아우 고종이 절강성 항주에서 재건한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한다.



3. 송나라 때 다채로운 대중예술 속에서 꽃핀 '수호지'

역사적으로 300년 가량 이어진 송대는 북송(960~1127), 남송(1127~1279)을 거치는 내내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리는 시대였으나,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대중예술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대이기도 하다. 서커스, 곡예 등 다채로운 대중예술 가운데 이 시대에 하나의 분야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졌던 것이 바로 노래와 이야기로 이루어진 설창(說唱)이다. 즉 우리가 자주 듣는 '설화(說話)'라는 것인데,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예능인은 설화인 '강석사'라 불렸다. 북송의 수도 개봉(당시의 변경)과 남송의 수도 항주(당시의 임안)에는 '와자(瓦子)'라 불리는 오락가가 몇 군데씩 형성되어 있었고, 그곳에 크고 작은 극장이 늘어서 있어 당시의 항주에는 외자가 17곳이나 있었는데 그 와자에서 강석된 설화는 크게 나누어 4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1. 소설(小說, 한 차례 이야기로 완결되는 단편 강석)
2. 담경(談經, 불서를 풀이한 강석)
3. 강사서(講史書, 여러 차례에 걸쳐 이어지는 역사 강석, <삼국지>, <오대사五代史> 등)
4. 합생(合生, 내용은 불명)

'소설'의 제목 중에서는 화화상(노지심), 행자(무송), 청면수(양지), 석두 손립 등 나중에 <수호지>에서 활약하게 되는 인물들의 이름(별명)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송의 유민 공성여의 <송강삼십육인찬>(원나라 초기, 주밀의 <계신잡식 속집 상권>에서 발췌> 서문에 실려 있는, 송강 일당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강석되지만 내용은 엉터리인 것이 많다. 하지만 당시 고여, 이숭 등 화가들이 그들의 모습을 그려 전하고 있으므로 학문상 무시할 수도 없다는 측면도 있다. 또한 남송 때 이미 36인 각자의 전기 같은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로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자 미상의 <대송선화유사>에는 '수호지'의 전신이라 말할 수 있는 '수호설화'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청면수 양지가 검을 팔러 갔다가 무뢰한을 죽이고, 조개와 오용이 독주를 사용한 책략으로 채 태사에게 헌상하는 재물을 빼앗았으며, 송강이 염파석을 죽이는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결국 양산박에 들어가 관군에 반항하였으나 장숙야의 중개로 조정에 귀순하여 무공대부로 임관되고, 방랍을 정벌한 공적으로 절도사가 되는 등 비록 세세한 차이는 있으나 <수호지>의 골자가 되는 설화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송나라 때 이후 몽골족이 세운 원에서는 '원곡' 또는 '원잡극' 등 희곡이 유행했고, 후에 <수호지>로 집대성되는 이야기 대부분이 이 '원곡'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들 수호극 중에는 특히 '흑선풍 이규'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그의 인기가 비교적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문수가 지은 <흑선풍쌍헌공잡극>에서 양산박의 동지를 '삽십육 대협 칠십이 소협'으로 세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송말에 송강을 비롯해 모두 36명이던 무리가 이 시대 설화의 세계에 와서야 36명의 천강성(天剛星, 대두목)과 72명의 지살성(地煞星, 소두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4. 수호지 원본 중 본연은 백회본, 수호지를 다시 꺼내든다.

시내암 원작자와 나관중이 편찬자로 집대성한 <수호지>의 원본은 크게 나누어 백회본(전 백 장)과 백이십회본, 그리고 청(淸)의 감성탄이 정리한 칠십회본(제오재자서본, 김성탄본)의 세 가지가 있다. 일단 전반의 1부뿐인 김성탄의 칠십회본은 별도로 치고, <수호지>는 송강 등 108인이 갖가지 경위로 양산박 충의당에 결집할 때까지의 개인 전기 부분인 제1부, 하늘을 대신해서 도를 행하는 '체천행도'의 군사를 일으킨 양산박 일당이 관군을 격파하고 조정의 귀순을 받아들여 귀순할 때까지의 제2부, 북방의 이민족 요나라의 침략군을 물리치는 제3부, 강남에서 독자 세력을 일으킨 방랍의 난을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싸움 중에 많은 동료를 잃고 귀환한 후에 양산박을 두려워한 중신들의 간계에 빠져 파멸하게 되는 제4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수호지> 본연의 백회본이며 이 백회본 제1부와 제2부 사이에 양산박 일당이 전호, 왕경을 정벌하는 내용의 20회를 추가한 것이 <수호전전> 이나 <수호전서>로 불리는 백이십회본이다. 칠십회본은 청초의 문예평론가 김성탄이 <수호지>의 제1회를  '설자'(서장)라 하고 제70회(본래의 71회)에 108인이 양산박 충의당에 모여 '체천행도'의 군사를 일으키는 대목까지 적은 뒤, 그날 밤 부수령이 된 노준의가 108인 전원의 목이 잘리는 꿈을 꾼다는 구절을 덧붙여 완결시킨 것이다. 이렇게 수호지는 총 세가지 원본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호지의 내용은 바로 '백회본'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수호지의 성립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아직도 중국고전 중에서 수호지가 허무맹랑한 구성이 많아 얼토당토 않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강호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듯 이 속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는 강호의 세계가 이중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여곡절 끝에 주류가 된 그들이지만 결국 주류로 남지 못했던 그들, 민중의 고달픈 희노애락을 대변하는 듯 펼쳐내는 그들의 재미난 이야기 속에는 바로 거창하지 않은 우리네 인생사가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렇게 수백 년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고 읽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고전이 주는 가장 원초적인 맛이자 재미일 것이다. 그래서 추워지는 이때 수호지 속으로 빠져보길 권해보며.. 강호의 수호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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