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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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마이북에서 독서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에 참여해주신 한 분이 <<사소한 부탁>>(황현산)을 선물해주셨다.
선물 받은 책은 이상하게 읽지 않게 된다. 아까워서 그런가?
하지만 책을 펼쳤다.
황현산 선생님은 <서문을 대신해서>에 이렇게 썼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 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문학으로 그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


"문학적 시간"이라는 말, 이 정확한 말 앞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과 같은 말이 젠체하는 수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선물 받아 또 좋다.

아무래도 읽는 건 잠시 미뤄 둬야겠다.
읽으면 이 좋음이 달아나 버릴 것 같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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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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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용도 훌륭한데 들어가는 말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특히 전문가를 위한 책좋은 입문서를 비교하는 부분은 정곡을 찌른다.

 

전문가를 위한 책은 알고 있는 것을 쌓아 올려 갑니다. 거기에는 주지하고 있듯이라든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또는 과연 그렇기는 하지만같은 말만 잔뜩 적혀 있어서 책을 읽을 때마다 뭐가 그렇다는 거야?’라는 생각에 분노를 느끼기 쉽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지요.”(6)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좋은 입문서는 먼저 첫머리에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6~7)

 

전문가입네, 합시는 책들. ‘주지하는 바와 같이라는 말에 주눅들며 책을 읽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나도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과 같은 말을 멋인 것처럼 썼을 때가 떠올랐다. 이 부끄러움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니 젠장!

 

정말 대박은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에 대해, 그러니까 우리는 왜 무지한가에 대해 답을 던지는 부분이다. 그 답은 이렇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

 

반박불가 빼박캔트!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라니 정말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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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 사랑에 관하여 - 세계의 고전 사상 7-003 (구) 문지 스펙트럼 3
플라톤 지음, 박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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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이드로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를 신들 중에서 최고 연장자이고, 수치심과 존경심을 통해 훌륭한 삶으로 인도해주며, 이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에로스는 모든 덕목과 우월함의 근원이다.


2. 파우사니아스: 파우사니아스는 사랑의 신에도 두 종류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천상적 사랑과 지상적 사랑의 특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사랑의 양태(관습)을 분석하는데 사랑은 호의를 베풀며, 진심으로 봉사하는 속성을 가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차례가 되었으나 딸꾹질이 멈추지 않자, 의사인 에릭시마코스가 그를 대신한다.


3. 에릭시마코스: 의사인 에리시마코스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 파우사니아스의 견해가 옳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두 종류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적용된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의술은 전적으로 사랑의 신의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의술의 기능은 신체 안에 들어 있는 대립적 요소들을 사랑과 조화 속에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농경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좋은 에로스는 자제력과 조화로움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나쁜 에로스보다 더 훌륭하다.


4. 아리스토파네스: 그는 에로스의 참다운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본성과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영감을 받은 신화에 따르면, 현재의 인간들은 본래의 인간들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성(동성 또는 이성)을 지닌 공 모양의 인간이 반으로 나뉘어 생긴 반편들이다. 따라서 사랑이란 본능은 우리들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은 육체적인 결합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진정한 반쪽과 결합하기 위한 노력으로 구현될 때, 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


5. 아가톤: 아가톤은 에로스의 권능과 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신세를 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선 에로스의 본성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 그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자고 한다. 그에 따르면, 신들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미묘한 사랑의 신은 모든 시와 학문의 기원이 된다. 이는 에로스가 가장 늙은 신이라는 파이드로스의 견해와 상반된다. 그 이유는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하듯이 에로스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신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은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모든 존재자들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에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 외에도 모든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올바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기거이 사랑에 봉사하는데 그러한 상호 승낙에는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또한 자제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즐거움과 욕망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용감하고, 천재이며,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사랑과 욕망의 인도를 받아야만, 모든 기술은 그 각각의 기술을 담당하는 신들에 의해 발견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로스야말로 아름답고 훌륭하며, 모든 선과 미의 근원이 된다.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대화 혹은 사랑의 전제에 동의하기: 모든 사랑은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핍된 것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미와 선을 갈구한다면, 그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탓이다. 따라서 에로스 자신은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6. 소크라테스: 에로스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는 중간자이다. 완전 무지렁이도 대단한 현자도 아니다. 그는 가사적 존재도 아니고 불사적 존재자도 아니다. 그는 그 두 존재자들의 의사소통을 중재하는 다이몬이다. 그는 여신 아프로디테의 생일이 계기가 되어 만난 결핍의 여신 페니아와 길 또는 방법의 신 포로스의 아들이다. 그의 태생은 그의 성격을 이미 규정지어주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 모든 면에서 결핍된 불완전한 존재이다. 때문에 완전성에 이르려는 갈망으로 가득 찬 영혼을 지닌 존재이다. 모든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아름다움 즉 완전성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성격을 이어 받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좋음을 수반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은 좋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려는 갈망이 된다. 그러한 목적에 도달하려면 우리 인간의 영혼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상승은 언제나 로고스를 동반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단일성에서 출발하여 아름다운 영혼들과 훌륭한 직업·지식들의 단일성을 거쳐 앎의 단일성을 향해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앎이라는 마지막 단계의 앎을 위한 예비 단계들일 뿐이다. 즉 연속적 앎은 직관이라는 불연속적그 연속성을 단절시키고 초월해버리는직관에 의해 완성된다.


8.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를 실레누스 조각상과 비교하면서 묘사한다. 즉 신이 조각상 안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도 겉모습과는 달리 그 내면 속에 입문자들만 알 수 있는 매력을 감추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구두 수선공이나 무두장이처럼 추하고 항상 지루하게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신의 덕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연마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언제나 의미 있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계속하여 그는 포티데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예를 들면서 그의 용감성과 참을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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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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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고 자신을 따르던 소년 마놀린도 다른 배로 가버렸다. 85일째 되는 날 드디어 노인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거대한 물고기를 따라가다가 너무 멀리까지 나왔다. 물고기를 끌고 가는 동안 상어 떼의 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되는 상어 떼가 공격해왔고, 노인은 사흘 간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힘겹게 해안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노인은 그 노력에 부합하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노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한 물고기를 모두 뺏기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노인은 노력을 하는 것일까? 노력을 해도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노력을 하는 것일까? 이건 정말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결말을 내놓은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작가는 결과는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을 짓밟아버렸다.

책의 해설에서는 이것을 순수한 노력이라 말하고 있었다. 패배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 패배를 향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노력을 위한 노력. 이것이 나는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노인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나도 저 노인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할 것 같다. 잡은 물고기를 놓고 버리고 싶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괜한 오기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상어 떼와 싸우 보고 싶기는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싸우지 않으면 싸움의 결과를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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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청소년 현대 문학선 10
이순원 지음, 이정선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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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한 신문에 내가 썼던 글...

  `19세`(이순원).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성장담에 대한 것이다.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어떤 소설이 청소년을 위한다거나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 것이다. 또한 예상독자가 청소년이라고 해서 그 소설을 얕잡아 보는 것 역시 오만이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의 강원도를 배경으로 주인공 정수를 등장시키고 있다. 갓 중학교에 들어간 정수는 문교부장관이 누구냐는 국어 선생님의 질문에 `검정필`이라고 말했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한다. 교과서마다 `문교부장관 검정필`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검정필`이라 불리게 된 주인공은, 두 살이나 많지만 같은 반인 박승태와 친해진다. 정수는 승태에게 성교육을 배우고, 승태는 정수에게 학교 공부를 배우면서 둘은 친해진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서울대에 들어간 형 정석처럼 공부로 성공하긴 글렀다고 느낀 정수는 상고를 지망한다. 상고를 졸업해서 은행에 들어가 남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고 싶어했다. 돈을 빨리 번다는 것, 이것을 정수는 어른의 징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수는 주판에는 젬병이어서 자신의 생각처럼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수는 꿈을 농사꾼으로 바꾼다. 대관령에 해도지(賭地) 땅을 얻어 고랭지 채소를 심어 큰돈을 벌겠다는 속셈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기어이 학교를 그만둔 정수는 배추 농사짓기에 돌입한다. 그해 정수는 일꾼을 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보다 배추를 늦게 옮기게 되는데,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정수의 배추밭은 풍년이 든다. 소원대로 큰돈을 만지게 된 정수는 그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고 승태와 술을 마시고 매춘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수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왠지 그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른 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가슴을 무겁게 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213면)


  △ 어른은 어려워

  정수가 자신이 보인 일련의 행동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거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한탕을 노리고 도박이나 투기에 뛰어들고 싶을 때라든가,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라든가, 그런 순간에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운 경우는, 오히려 확고한 생각이나 신념에 갇혀 있을 때다. 이것을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불러도 좋겠다. 내 조카는 너무 어려서 “너 잘못했지! 빨리 사과해”라고 말해도, 심지어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피아제는 이런 유아기의 심리상태를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했지만, 이런 성향이 꼭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몰인정하게 행동하는 구두쇠이야기가 동양과 서양에서 발견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서양의 스크루지는 꿈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고 난 뒤에야, 우리나라의 옹고집은 도승의 도술로 갖은 고생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잘못된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예측하고, 자신을 돌이켜 행동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어쩌면 진짜 어른은 내 행동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게 만드는 나의 생각이나 신념을 포함하여 나의 관념과 사유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언제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을 어른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고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우며, 우리는 늘 어른과 아이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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