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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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질병을 겪으며 배운 교훈 중 반절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


이 시는 내가 배운 것의 반절일 뿐이다. 햇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의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반쪽들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가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도덕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세계를 네 자신처럼 여겨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믿음을 가져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수 있으리라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222-224쪽)


기어이 정점에 이르고야 말았다. 병이 삶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라는 사실, 병들었을 때 아름다운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나아가야 참 기쁨에 이른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몰아세우는 위험한 질병이 들이닥쳤을 때 그것을 충만히 살아냄으로써 아서 프랭크는 마침내 지극한 영성 또는 오도悟道의 시공으로 들어섰다.


책의 거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가 『도덕경』을 인용한 것은 사뭇 인상 깊다. 그가 인용한 『도덕경』제13장 결부다. 즉,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다른 판본에는 제57장 故貴爲身於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 愛以身爲天下 女何以寄天下)를 해석한 것이다. 만일 그가 한문을 알았더라면 인용한 것처럼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인용한 번역은 거의 오역에 가깝다. 번역자의 어법과 분위기를 존중해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세계를 네 자신처럼 높여라

그러면 세계에 네 삶을 부칠 수 있으리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아껴라

그러면 세계에 네 삶을 맡길 수 있으리라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원문이라 논란이 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대구조차 무시한 인용 번역은 중역重譯의 의심마저 든다. 이런 번역으로는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그러니까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전경을 제대로 그려내기 어렵다. 세계를 높이고 아끼는 것은 세계에 내 삶을 온전히 기탁寄託할 때 드러난다. 기탁, 그러니까 자발적 공공 참여 없는 기쁨은 아라한의 집착이다. “집착하지 않는 데”서 부처 난다.


물론 부실한 『도덕경』번역이 아서 프랭크의 깨달음 자체에 누가 되지는 않는다. 아서 프랭크의 표현이 보여주는 명료함과 그로 말미암은 한계를 동시에 읽는 일은 바리데기 후예의 인식론적 특권이자 과제다.


아서 프랭크의 필생기必生技는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다. 이점에서 동아시아 전통은 느슨하다. 아니 무턱대고, 나아가 작정하고 자기 거점을 지운다. 내가 있고서야 나를 지운다는 말이 성립한다는 진리를 허투루 대한다. 아서 프랭크는 이 지점에서 단호하다. 그렇다.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나만의 이야기를 똑 부러지게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영적 허영 아니면 위선이다. 이 섬뜩한 진리에 곧 바로 싸대기를 날리는 한 마디.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단도직입으로 바리데기 통찰을 말한다. 세계는 나의 연장이 아니다. 나는 뻗어 나가지 않는다. 내 자아가 세계로 확대되지 않는다. 나는 배어든다. 나는 초미세 물방울로 효소도 없이, 에너지도 없이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밖으로 번져간다. 알뜰하게 번지면 배어난다. 배어날 때 비로소 새로운 이름이 된다. 새 이름은 나와 세계를 묶어서 푼다. 그 이름을 들라. 스르르 사라진다. 그 이름을 내려놓으라. 옴팡 새겨진다. 여기서 나는 그냥 일렁거린다.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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