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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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도대체 어떤 생물인가?······알수록 정말 두려운 것, 무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인간은 인간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었다.·······무차별적으로 서로 죽이고, 우리가 살아갈 무대인 자연계를 부숴간다. 불행히도 자멸로 빠져간다·······.


다른 편으로 눈을 돌리면, 인간은 정말 뛰어난 경지에 다다른 지혜와 능력·······깊은 사상·철학과 예술성·······두터운 자비심·······겸허·······한 품성을 지닌 생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슨 까닭으로 우주생명계의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인간은·······행복하고·······평화롭고 싶으며, 기쁨의 나날을 보내며·······풍요롭게 살고 싶어 한다.·······인간은 지구에 탄생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계속 희망해왔다.(252-254쪽)




이 대목은 가와구치 요시카즈 자신이 쓴 마무리 글 일부다. 인간 본성의 비대칭적 대칭을 말하고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어둡다. 그는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답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 글에 답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행복하고·······평화롭고 싶으며, 기쁨의 나날을 보내며·······풍요롭게 살고 싶어”하는 바로 그 “희망” 때문에 길을 잃었다. 본성은 비대칭의 대칭, 그러니까 양극성인데 희망은 일극성이니 말이다. 인간이 한 생을 살면서 과연 그렇게 행복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풍요롭게만 살 수 있느냐, 하는 현실도 그러하거니와 이런 당위의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인간은 행복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풍요롭게 살아야 하는가?”


당연하다 전제한 채 단 한 번도 정색하고 물은 적이 없다면 아무리 깨달았다 떠드는 그 누구라도 참으로 깨달은 자가 아니다. 참 각자가 어찌 일극의 행복과 평화와 기쁨과 풍요를 입에 담는가. 인간이 행복과 평화와 기쁨과 풍요를 전유할 때 그 대극의 불행과 불화와 슬픔과 빈곤은 대체 누가 떠안는단 말인가. 설혹 이 문제를 해결한다손 치더라도 근본 문제가 남는다. 불행을 모르는데 행복은 알 수 있는가. 불화를 모르는데 평화는 알 수 있는가. 슬픔을 모르는데 기쁨은 알 수 있는가. 빈곤을 모르는데 풍요는 알 수 있는가.


참으로 인간다운 삶은 내 행복, 내 평화, 내 기쁨, 내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불행, 남의 불화, 남의 슬픔, 남의 빈곤에 가 닿는 참여가 없는 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은 없다. 우리 존재가 비대칭의 대칭 구조면 당연히 우리 삶은 비대칭의 대칭 운동이다. 이 종자논리를 찰나적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삶도 길을 잃은 삶이다. 안타깝지만 천하의 가와구치 요시카즈도 이 점에서는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다. 그의 결함은 그의 ‘강인함’에서 나왔다. 강인한 사람의 눈에 남의 연약함은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강인한 사람인가. 딴은 그렇기도 하다. 나는 연약한 사람인가. 딴은 그렇기도 하다. 내가 내 강인함을 자각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내가 내 연약함은 자각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 강인함은 내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 데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와는 다른 길이다. 내가 아직 내 연약함에 기울어져 있다면 그는 유력한 참조점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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