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비도야.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시고 군자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莫見乎隱 莫顯乎微.

막현호은 막현호미.  

故 君子愼其獨也.

고 군자신기독야.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중야자천하지대본야 화야자천하지달도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語氣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도 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性과 도道와 교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독자가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과 도와 교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신기독야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신독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중화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중화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중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화는 중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절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중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집요한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러운’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超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위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육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육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일단 각자의 가슴에 각자의 답을 품은 채 고요히 이 땅의 현실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필코 총체적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다가들어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나와 내 공동체의 살아 있는 콘텍스트에서 중용을 묻지 않으면 그것은 참 중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의 질문은 ‘중용이 무엇인가?’가 아니고 ‘무엇이 중용인가?’여야 합니다.


자, 다시 고쳐 질문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중용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에 맞서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한 소통, 그 연대 행동이 다름 아닌 우리의 중용입니다. 이 깨달음을 급격하면서도 간절하게 일으킨 것이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입니다. 아이들의 죽음, 그 진실을 걸고 그 목숨 값을 걸고 우리는 우리의 중용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있지 말고 중용해야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