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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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이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이 세상에는 제가 느끼는 이 상실감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 같아요.(23쪽-정예진 엄마 박유신)


수백 명이 모인 공개 장소에서 한 소녀가 느닷없이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두 뺨을 번갈아 가며 무참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달리 정작 옆에 앉은 엄마는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곡절을 알고 나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아파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는 아이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장애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고통에 그 소녀는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하는 엄마 마음은 또 얼마나 갈가리 찢어졌으랴.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는 아이가 말이 불가능해서 겪는 고통과 416엄마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 겪는 고통은 본질상 다르지 않다. 말해지지 못하고 표현되어지지 못하는 고통의 치유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같다. 다른 점이 있다. 416엄마는 반응reaction을 넘어 고통에 감응response한다.


감응은 “표현할 단어가 없는” 한계를 직시하고 부족하나마 할 수 있는 말들을 주고받음으로써 언어의 행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언어의 행간은 치유를 가로막는 견고한 적요가 아니라 치유의 틈을 내는 역동적 고요다. 이 고요가 네트워크를 짓는다. 네트워크는 존재의 근원이다. 존재의 근원을 복원하는 행진의 선두에 416엄마가 있다.


416엄마는 이 세상에 있는 단어로 말함으로써 이 세상에 없는 단어를 고요 속에 전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언어에 기대지 않는 진리[不立文字]를 낳는 위대한 자궁이 된다. 박유신은 정예진을 잃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정예진 엄마 너머 숭고 공동체의 엄마로 번져 간다. 골고다 언덕에서 빈 무덤을 미리 본 자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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