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라피스트회 수도사 토머스 머튼은 내 개인적인 성자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극적인 ‘실패’ 때문에 그가 속한 교회에 의해 성자의 반열에 오르지는 않을 듯하지만 말이다. 그는 기독교 바깥의 도교와 불교에서 지혜와 위로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입원했던 병원의 간호사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번민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머튼은 수도원을 떠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야 할지를 놓고 씨름했다. 결국 그는 수도사의 서약을 지키겠노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고통이 가라앉았을 때 머튼은·······놀라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게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계적인 수준의 신비주의자가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머튼은 작가 미들턴 머리가 했던 말, “선한 사람이 선함보다 온전함이 낫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는 건, 꽉 막힌 다른 생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청렴은 이에 비하면 꽃처럼 분방한 방종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걸어야 할 이 길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다. 또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머튼이 켄터키주 루이빌 시내에서 통찰에 대해 쓴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루이빌의 어느 쇼핑센터에서,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그 행복감은 이런 말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205-206쪽)


파커 J. 파머가 “얼마나 놀라운가.”라며 놀라워하지만 나는 놀랍지 않고 안타깝다 못해 아프다. 토머스 머튼도 토머스 머튼이려니와 그 간호사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이 사랑한 간호사는 토머스 머튼에게 과연 무엇인가? 그는 그 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런 내 감수성은 구도자 앞서 치유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버림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평범한 한 여성으로서 상대방에서 비롯해 사랑이 꺾였을 때 그가 받은 고통은 전혀 다른 무엇이었을진대 이 문제에서 토머스 머튼은 어떤 위치였을까 생각하면 심사가 불가항력적으로 날카로워진다.


날카로움을 달래면서 차분히 처음부터 다시 톺아보자. 토머스 머튼은 자신이 사랑한 간호사를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고 표현했다. 파커 J. 파머와 또 달리 내게는 그가 한 말 전체가 놀라운 게 아니라 이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는 표현이 충격이다. 레토릭이 아닌 한, 자신 바깥에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는 하느님 개념은 근원적으로 가소롭다. 큰 하느님이란 게 고작 ‘덩치 큰’ 하느님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양量으로 입자로 하는 사고가 천형처럼 부과된 서구전통에서 사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것 바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저들의 개념적 신앙과 달리,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란 신약성서 표현이 레토릭 수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머튼은 ‘기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던졌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


하느님 신앙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고백임에 틀림없다. 토머스 머튼의 이 놀라운 고백은 그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나?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되는 길을 가다가 그만둔 그러니까 ‘실패한’ 경험의 소산이므로 그의 선택은, 이제부터 쉽고 거룩한 삶이다? 여기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 “쉬운” 길은 “거룩한” “꽉 막힌”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 토머스 머튼에게 “축하받을 일”이 생겨버린다. “온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


여인 하나 사랑하는 “꽃처럼 분방한 방종”, 그 “극적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을 걸은 결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나아가 “인간이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게송을 들어보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버려서 모든 사람 사랑하는 전체성을 얻었다는 역설의 설파가 자못 통쾌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 통쾌는 유사품이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관념의 복제품이다. 이는 마치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네 몸과 같이”를 쏙 빼고 자기 기만하는 것과 같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는 전복이 기묘한 것이 아니라 영묘한 것이 되려면 토머스 머튼은 여인 하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어려운” 길을 택했어야만 한다. 이 선택만이 토머스 머튼이 하느님과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끝내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인간이 참 인간인 사건,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건이다. 서구기독교 전통이 참으로 구원의 전통이 되려면 인간과 분리된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내러티브를 넘어서야 한다. 몸 아닌 하느님을 몸인 인간이 구원해낸 역사가 성서의 장엄 전언임을 간파해야 한다. 몸 본질을 간과한 진리는 ‘구라’다. 저 ‘구라’ 은산을 깨뜨리지 못하고서 예수를 입에 담는 것은 전주 사람이라면서 모주 한 잔 권하자 운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파커 J. 파머와 토머스 머튼을 키운 서구전통에서 눈길을 돌려 우리 전통 원효를 본다. 주지하다시피 원효의 선택은 토머스 머튼과 정반대였다. 원효는 요석을 사랑해 스스로 파계하고 소성거사로 살아 부처와 중생을 일통했다. 요석은 운향이 되었다. 두 연인은 서로를 상승시키는 도반으로서 몸과 마음을 모두 구원했다. 나는 언젠가 운향 요석의 시선으로 원효를 들여다보는 글을 쓸 것이다. 그 글을 토머스 머튼의 연인이었던 간호사에게 헌정하련다. 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