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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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좌절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

  저는 곤혹스러움이 제 타고난 권리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많은 세상에 태어났기에 제게는 소재가 무궁무진합니다. 쓰기에 대한 접근도 간단하지요. 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을 찾아, 제 무지의 첫 번째 층을 벗길 수 있을 만큼의 글을 씁니다. 이 지점에서 계속 또 당혹스러움을 발견하고요. 그리고 되도록 멀리, 궁극적으로 제가 탐색한 마지막 층 아래서 신비의 층을 또 하나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씁니다.

저를 곤혹스럽게 하는 몇 가지를 나열해볼까요.

·······

  ● 나는 무엇이 타인을 곤혹스럽게 하는지 그토록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때로 내 믿음과 다른 것을 말하고, 행하는가?


  저는 내면과 주변의 모순들을 연료 삼아, 많은 시간을 들여 이에 대해 특히 신앙의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모순들에 관해 글을 씁니다. ‘육신이 된 말씀’에 기반 해 수립된 전통이 그토록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두려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어떤 이들은 이런 유의 질문이 신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 모순을 온전하게 의식하면서·······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종교공동체 내의 모순들이 두려운 나머지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하는 언행은 신앙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영적인 삶에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133-135쪽)


좌절-곤혹-당혹-모순은 다소 다른 맥락 안에서 한 가족의 의미망을 구성한다. 종당 이들은 역설의 바다에 가닿는다. 파커 J. 파머의 기품: 해학, 실천: 사색, 영성: 자연의 역동적 평형은 죄다 이 역설의 바다가 일으키는 해류와 파도의 교향곡이다. 해류와 파도는 난경이다. 난경이 빚어내는 곤혹과 좌절, 마침내 칼날 위의 모순, 그 “마지막 층 아래서 신비의 층을 또 하나 발견할 때” 비로소 안·정·동·요에 깃들 수 있다.


파커 J. 파머는 신앙을 글쓰기와 같은 진리 위에 놓는다.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 모순을 온전하게 의식하면서·······살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다.


영적인 삶에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가령 전능하고 의로운 하나님이라면서 왜 세월호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서보자. 명성교회 김삼환이처럼 말하는 것은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김삼환이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이 영적인 삶을 산다고 주장하는 개신교도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이 따위 신앙을 가진 자들이 더없이 나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저들보단 덜하지만 왜 신앙이 없는 사람도 나쁜가? 이들이 모순 없는 하나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 올바른 하느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참 하느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세월호 가족과 교감하면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실천에 참여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영적인 삶이다. 이들이 일으키는 영적인 삶의 네트워킹이 바로 참 하느님이다. 파커 J. 파머가 말하는 신앙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참 하느님을 살지 않는 사람이다. 가짜 하느님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좋음善’에 가닿지 못한다. 참 하느님 사건을 일으켜야 좋음에 가닿는다.


김삼환이 같은 부류의 가짜 신앙인의 마지막 출구는 이른바 심판론이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의로움을 옹호해야만 하므로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전능함과 의로움이 왜 하필 “최후”에야 나타나는가? 역사는 최후심판까지 괄호로 묶어야 하는 반 쪼가리 실재에 지나지 않는가? 심판론은 일관성이란 피상성에 기댄 옹색하고 비겁한 도피다. 현실의 악을 두호하는 속임수다. 결국은 자신들이 날조한 하나님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신성모독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없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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